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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학교의 맛

10초와 이름 없는 삼겹살

21.03.12

by 이준수

급식을 받으려 줄을 서다 보면 좌측 기둥에 새집 같이 생긴 것이 보인다. 아이들에게 급식 희망 메뉴를 신청받는 작은 창구 같은 것으로, 종이와 연필도 친절하게 꽂혀있다. 새집(정말 나무에 달아놓은 새집처럼 생겼다)은 텅 비어있었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희망 메뉴를 접수하지 않은 듯했다.


학생수가 700명에 달하는 학교에서 희망 메뉴가 없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내가 학생이라도 종이에 뭘 적어내기가 어려울 듯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시간이 촉박하다. 급식 줄은 학급 별로 선다. 거리 두기를 위해 1m씩 간격을 벌려 발바닥 모양 스티커 위에 발을 모아야 한다. 대략 10초 주기로 한 칸씩 이동을 하는데, 조금만 딴청을 피워도 줄이 밀린다. 우리 반 뒤에는 또 다른 반이 있기에 담임들이 가운데 서서 지도를 하며 앞으로 이동하라는 신호를 보내기 일쑤다.


10초. 내가 뭘 먹고 싶은지 떠올려서, 종이와 연필을 꺼내, 얼른 적어 내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그래도 행동이 민첩한 아이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럴 수 있다. 선호하는 메뉴가 뚜렷하다면 재빨리 써서 내기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두 번째 관문이 있다. 희망 메뉴 쪽지에는 학년과 반 이름을 적어야 한다(부담스럽게 왜 이런 걸 적어야 하는 걸까). 수혁이는 '삼겹살'이 먹고 싶어 죽겠는데 이름을 쓰기 싫어서 버텼다. 그러다 오늘은 참을 수 없었는지 연필을 들었다.


나는 수혁이가 손을 떨듯 글씨를 휘갈기고, 새장에 종이를 던지고 가는 걸 보았다. 대번에 뒤에 있던 원용이가 신고했다.


"선생님! 김수혁 이름 안 썼어요."


새장을 열었다. 칸을 무시하고 큼직한 글자로 삼겹살이 적혀있었다. 소속과 이름은 없었다. 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그냥 물어보았다.


"수혁 이름 왜 안 써?"

"부끄러워서 안 쓸래요."


에휴, 먹고는 싶은데 부끄러운 게 문제라면 이런 건 담임이 써 주면 된다. 양식을 제대로 갖춰야 접수가 될 테니까. 4학년 4반 X번 김수혁. 내가 쓰면서도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세계의 각박함이 손끝으로 느껴진다. 마침표를 찍고 새장 문을 연다. 그때 원용이가 스윽 끼어들었다.


"잠깐만요."


그러고는 김수혁 옆에 자기 이름을 적는다. 김수혁, 김원용.


"먹고 싶었어요. 삼겹살."


흐음, 그럼 원용이는 왜 수혁이 신고를 했던 걸까. 김수혁이 먼저 이름을 써야 자기도 따라 쓸 수 있는데, 안 쓰고 그냥 가서 섭섭했던 것인가. 실 나도 김원용 뒤에 이준수라고 쓸까 하다가 부끄러워서 말았다. 삼겹살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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