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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학교의 맛

병 주고 약 주면 괜찮은 거죠?

21.03.22

by 이준수

이년 째 반투명 가림막 수업이 계속되고 있다. 비말이 주변으로 튀는 걸 막기 위한 조치다. 침은 마스크에서 한 번, 플라스틱 가림막에서 두 번 막힌다. 희미한 회색의 가림막은 흠집 하나 없는 상태로 배부되었다. 그러나 책상 주인의 성향(혹은 성격에) 따라 가림막은 전혀 다른 운명을 맞이한다.


"선생님! 고정 테이프 떼 졌어요. 다시 붙여주세요!"


설마, 벌써 떼 질 리가 없는데... 하면서 도착한 책상은 가림막이 떨어지기 직전의 상태였다. 테이프는 군데군데 일어나 있고, 거무튀튀한 먼지가 끼어 볼썽사납게 지저분했다. 반면 같은 시기에 설치한 옆 책상의 가림막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쩡했다. 불과 80cm 떨어져 있을 뿐인데, 도대체 무슨 비극이 벌어졌던 걸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책상 주인 녀석은 싱글벙글. '다 아시면서. 뭘 새삼스럽게' 하는 표정 앞에 나도 긴장이 무너지고 만다.


헌 테이프를 말끔히 떼어 내고 쓱쓱 새 테이프를 발라주니 한결 책상이 환해 보인다. 그래, 가림막을 씹어 먹은 것도 아닌데... 이 정도는 귀엽게 봐주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은 고의에 의한 훼손 신고가 들어왔다.


"선생님. 제가 바보인가요?"


김수혁이었다. 바보라니, 수학 1단원 평가 만점의 사나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여기 좀 보세요. 바보라고 쓰여 있잖아요."

"보자. 흠... 너는 바보야 라고 적혀있네. 진짜네."


필체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수혁이 본인이 썼을 리는 없고 주변에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과연 짐작은 빗나가지 않았다. 대번에 M군이 자수를 했다.


"아, 그게 아니라. 그거 제가 닦아 주려고 했어요."


M군은 과장된 동작으로 열심히 수혁이 가림막을 닦았다. 소독용 티슈의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병원 프런트에서 맡을 수 있는 알싸한 향이다. 생선 피 냄새를 맡고 상어가 몰려들듯, 또다른 피해자 민석이가 삐죽 말했다.


"나한테 쓴 것도 지워. 나이키 마크 그린 거랑."

"네네~ 깨끗하게 지워 드립니다."


M은 주말 봉사활동으로 마을의 오물 묻은 벽을 청소하는 착실한 소년처럼 낙서를 지웠다. 그걸 지켜보던 민석이는 어이없다는 듯


"병 주고, 약 주고 잘하네."


라고 했다.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었다. 병도 잘 주고, 약도 잘 주고. M은 두 친구의 가림막을 깨끗하게 만든 후에야 내게 확인하듯 물었다.


"선생님, 병 주고 약 주면 괜찮은 거죠?"

"(끄덕끄덕) 될 수 있으면 약만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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