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학교의 맛

시간만 충분하다면 할 수 있어

21.03.24

by 이준수

K는 조금 느리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자주 느리고, 많이 느리다.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때가 잦고, 친구들이 무엇을 하는지 살피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변에 피해를 끼치는 타입은 아니다. 예민한 구석이 있으나, 전반적으로는 온순하고 내성적이다. 하는 행동도 귀엽다.


나는 학기초부터 K를 눈여겨보았다. 집중력이 부족하지만, 집중했을 때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충분한 아이. 수업 중 K 쪽으로 최소 한 번 이상은 다가가 교과서 쪽수와 필기를 확인했고, 과제 제출 여부를 챙겼다. K는 때때로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었으나 담임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면, 얼른 자세를 고쳐 잡곤 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꼈다.


지금껏 나를 거쳐간 수많은 제자 중 K보다 힘든 아이가 많았다. 담임이 오건 말건, 과제가 있건 없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무기력에 빠진 아이. 정당한 교육 지도를 하려고 시도하면 사나운 폭력성을 드러내며 자신의 상처를 암시하는 아이. 점퍼에서 니코틴 전 내를 풍기며 멍한 눈으로 스마트폰만 누르던 아이. 그에 비하면 K는 감사하고 사랑스럽다.


그러나 스물세 명이 생활하는 공간에서 K만 들여다보고 있는 건 불가능한 노릇. 나는 K가 국어 본문을 찾지 못해 헤매거나, 수학 교과서 뒤편에 첨부된 준비물을 뜯지 못해 낑낑댈 때 건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건우는 짝꿍의 책임감으로 - 코로나 방역 조치로 실제 짝꿍은 없지만 그나마 가장 거리가 가까워서 짝꿍이라 부름 - K를 보살폈다. 덕분에 주요 교육활동의 공백 없이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물론, 건우도 아이이고 본인이 해야 할 과업이 있기에 K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조할 수는 없다. 그럴 때는 K를 교사용 책상 옆에 앉혀놓고 1:1로 공부했다. 흥미로운 건 그다음이었다. 건우는 수업이 끝나고 K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와 슬쩍 둘러보곤 했다. "어디, K가 빠뜨린 문제는 없나" 하며 마치 부담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건우야, 고맙다. 잘 도와줘서."

"아니에요. 시간만 주면 잘하는 것 같더라고요."

"맞아, 누구나 시간만 충분히 주면 할 수 있어."


초등학교 수업 하나에 할당된 40분은 보통의 아이들이 공부하기에 가장 적당한 길이의 시간일 것이다. 이론적으로나 통계적으로. 하지만 세상에는 평균과 통계 밖의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평범한 사람도 특정 영역에 있어서는 보편의 기준을 맞추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어긋나있다. 좌절할 필요는 없다. 건우 말대로 시간과 기회를 충분히 주면 되니까. 그러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만일 못 해낸다고 해도 자신만의 속도를 존중받았으므로 괜찮을 것이다.


자기 속도와 시간을 믿는 사람으로 아이를 길러내는 것. 내가 궁극적으로 가닿고 싶은 경지는 여기이나, 나는 어김없이 수업 시간 40분과 쉬는 시간 10분에 맞춰 학사 일정을 돌리는 실무자 이기도 하다. 정규 시간을 지키되, 시간을 뛰어넘으라고 주문해야 하는 직업. 흐음, 역시 학교는 이래저래 역설적인 공간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병 주고 약 주면 괜찮은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