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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학교의 맛

독자와 나

21.04.12

by 이준수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발신자는 고등학생 L. <선생님의 보글보글>을 읽고 쓴 독자 편지였다. L은 교대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다. 이름으로는 성별을 추정하기 쉽지 않은 L은 진지하게 어린이의 세계와 학교를 궁금해했다. 그럼에도 이런저런 십 대의 고민과 번민이 있었고 나를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고 적었다. 그저 빈말이 아니라 동아리 선생님을 섭외해 작가 초청 강의까지 약속받은 상태였다. 그야말로 정식 초대.


뭐라 답장을 해야 이 정성을 해치지 않으려나. 나는 옷매무새를 바로 잡았다. 왠지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책 지은이로서는 처음으로 받아보는 북 토크 신청이다. 저녁에 받은 편지에 답장을 쓰려다 다시 키보드를 밀어 넣었다. 중요한 청탁 원고를 쓸 때처럼 생각을 머릿속에 묵혀 두었다가 적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잠을 깊게 이루지 못했다. 모두가 잠든 세 시 반에 눈을 비비고 일어나서는 'L님께'로 시작하는 문장을 썼다. 나의 십 대 이야기, 초대를 해주신 것에 대한 깊은 감사를 담아 제법 긴 답장을 남겼다. 누군가 내 책을 읽고 있다는 감각이 알알이 느껴졌다. 그 따스함과 관심은 어린 날의 소중한 추억처럼 내 몸 깊숙한 곳에 닿았다. 나는 전송 버튼을 누르고서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내 책을 읽어 주는 독자님이 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그분들을 상상하며 감사한 마음을 품는다. 시간을 내어 책장을 넘기는 마음을 생각하면 글쓰기가 아주 좋아진다. 이런 경험은 돈으로도 살 수 없을 것이다. 밝게 빛나는 달 조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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