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4.08
요즘은 뉴스 다섯 개를 읽으면 하나는 부동산 이야기인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교사다 보니 아파트 브랜드에 따라 초등학생이 차별을 받았네, 임대 아파트 학생은 등굣길을 돌아가네 하는 기사를 클릭하게 된다. 뭐, 수년째 반복되고 있는 뻔한 얘기 아니겠나 싶으면서도 어김없이 누른다. 역시나 대도시, 수도권 발 기사다. 후유- 안도인지, 허탈함인지 모를 한숨을 내쉰다.
삼척에 근무하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아이들이 집 주소로 스트레스받는 일을 목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특별히 착해서라기보다 – 물론 제가 만난 친구들은 좋았습니다 – 집값이 고만고만하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집 주소를 의식해야 하는 비극은 극심한 부동산 가격 격차에서 비롯된다. 적어도 집값으로 유세를 떨려면 직관적으로 비싼 느낌을 주는 집이 있어야 하니까. 하지만 여기는 아직 도토리 키재기다.
신축 아파트가 지역에서 나름 고가를 형성한다고는 하나, 절대적인 액수에서 그리 큰 격차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집 주소로 목에 힘을 줄 수 없는 환경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아이들은 대한민국에서 부동산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직간접적으로 느끼고 있는 듯하다. 나는 국어 수업을 하다 말고 우연히 그 순간을 포착했다.
교과서 본문에 독일의 ‘보봉 Vauban’ 이라는 곳이 나온 적이 있었다. 친환경 정책으로 이름난 마을로 자동차를 안 타고, 태양열로 전기를 생산하며, 콘크리트를 적게 쓴다. 나는 본문의 길이가 짧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보봉이라는 마을을 조금 더 생생하게 알고 싶었다. 마침 EBS 세계 테마 기행 독일 편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보았다. 보봉은 3분 남짓 소개되었지만,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아이들 하교 이후 교실 전등을 내내 끄고 있을 만큼. 우리는 수업의 막바지에서 소감을 나눴다.
“여러분들은 보봉 마을에 대해 배우면서 어떤 생각을 했나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손들이 올라왔다. 나는 그중 유독 비장한 얼굴의 준석이(가명)를 지명했다.
“보봉 마을은 월세가 12만 원밖에 안 해서 참 좋은 곳 같아요.”
응? 저런 내용이 있었나.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나는 푸르른 마을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월세 대목을 놓쳤다. 다시 영상을 돌렸다. 과연 주민 인터뷰 내용 중 월세를 언급한 장면이 있다.
“한 달에 90유로(한화 약 12만 원)만 내면 더 이상 내야 할 돈이 없습니다.”
1921년 월세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금액이다. 왜냐하면 그 주민은 근사한 정원을 갖춘 3층짜리 주택에 살고 있었으니까. 방송 시기는 2018년으로 불과 3년 전 월세다. 아무리 독일 지방 도시(프라이부르크) 외곽에 위치해 있다고 하지만, 보봉이라는 녹색 마을의 명성과 주민 수준을 고려하면 압도적으로 저렴하다. 이런 사정이라면 지갑이 얇은 젊은이도 간단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훌륭한 집에서 머물 수 있을 것이다.
11세 아이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 걸까. 준석이의 보봉 월세 지적에 다수의 아이들이 격렬하게 동의했다. 약간 놀랄 정도로. 흠, 생각해보면 당연하다. 미친 부동산 가격은 아이들에게 곧 닥칠 미래 위기다. 녀석들도 9년만 지나면 성인. 언젠가는 집을 떠나 본인만의 보금자리를 구해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월세 12만 원에 보봉 같은 마을에서 꽤 괜찮은 집을 구하기 힘들다(라기에는 불가능에 가깝다).
‘마트 물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월세는 확실히 싸 보여.’
나는 준석이의 눈빛에서 느낄 수 있었다. 부러움과 두려움의 감정을. 부러움은 저런 방식으로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도 있구나 하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두려움은 나는 힘들겠지 라는 체념에 가까웠다. 하지만 결국에는 나도 같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 대출 이자 납부일이 코앞이다. 준석아, 선생님도 이 굴레를 언제 벗어날지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