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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Apr 16. 2021

우유팩 다발 들고 이리저리

21.04.16

올해 초 우유팩 서른 장을 잘 말려 가면 주민센터에서 휴지  롤로 바꿔준다는 기사를 읽었다. 어디 언론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용만큼은 강렬해서 아내에게 호들갑을 떨며 알려주기까지 했다. 그러니 읽은 건 확실하다. 그 후 우리 부부는 열심히 우유팩을 모았다. 결코 쉽지는 않았다.


과거의 경우, 다 마신 우유팩을 깨끗이 씻어 뒤집어 말린 후 종이함에 내다 버렸다. 그런데 휴지를 목표로 삼은 이후, 몇 단계가 추가되었다. 다 마신 우유팩을 가위로 잘라 사각형 형태로 편다. 그리고 씻어 말린다. 만약 뚜껑이 달려있거나 상단부가 플라스틱이면 오려낸다. 별도의 상자에 차곡차곡 모은다.


안 그래도 베란다가 좁은데 우유팩 더미를 피하느라 까치발 생활을 몇 달 했다. 그리고 마침내 육십 팩을 모았다. 우하하하, 자그마치 휴지 두 롤이다. 다른 의미도 있다. 휴지가 풀면 풀수록 늘어나는 것처럼 우유 팩을 모으는 동안 마음이 초록색으로 점점 진해졌다.  우리는 가급적 플라스틱 사용을 자제했다. 휴지 두 롤 가격으로 환산할 수 없는 라이프 스타일이 따라붙은 것이다.


우유팩을 노끈으로 묶었다.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는 뿌듯함에 힘이 솟았다. 차를 타고 싶지 않아 우유팩 다발을 들고 덜렁덜렁 걸었다. 주민센터까지 가는데 사람들이 흘깃 쳐다보기도 하였지만 씩씩하게 걸었다. 노끈으로 묶은 우유팩 다발 처음 보세요?라고 까지는 되묻지 않았지만 부끄러울  하나도 없다.


주민센터 입구에서 발열 체크와 명부 작성을 마치고 자원 담당자 앞에 섰다. 나는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칭찬을 받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은 애처럼 입을 열었다.


"우유팩 어디다가 두면 되나요?"

"길가에 내놓으시면 가져갈 거예요."


? 무슨 길가. 다시 물었다.


"우유팩 모아 오면 휴지로 바꿔주는 이벤트 없나요?"

"없는데요. 재활용 수거함 옆에 놓아두세요."

"예전에도 그런 행사가 없었나요?"

"네, 한 번도요."


나는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한참이나 네이버 검색창을 돌렸다. 흠, 내 실수다. 지자체 별로 하는 곳도 있고, 안 하는 곳도 있다. 터덜터덜 걸어 입구를 나왔다. 주민센터 인근에 있는 재활용 수거함 근처에 우유팩을 던져 놓고 올 수도 있었지만 그냥 집에 가지고 왔다. 그간 들인 정성이 아까워서 매몰차게 버릴 수가 없다.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는 보관하고 있어야지. 아쉬운 마음이 술술 풀리면 그때 놓아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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