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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Jul 22. 2021

수협에서 이름 쓰기 연습

21.07.22

스마트폰이 나온 이후 좀처럼 은행에 갈 일이 없었지만 오늘은 말끔히 씻고 은행에 갔다. 아파트를 분양받았는데 지금 가진 돈으로 원금을 다 낼 수 없으므로 은행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릉 수협이라는 곳을 방문했다. 농협도 있고, 하나은행도 있는데 굳이 수협을 간 이유는 단순하다. 이자가 고정금리 3.0% 쌌고, 아파트 법무법인 계약 지점이라 수수료가 무료고, 수협이 어떤 곳인가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갔다.


아무 약속 없이 불쑥 방문한 건 아니고, 그저께 유천동 H아파트 대출담당이라는 분께 전화를 걸어 예약을 잡았다. 대출에 뭔 예약이 필요한 가 했더니, 전화를 걸지 않았으면 큰 일 날 뻔했다. 나는 대학 입시 서류를 제출할 때 보다 많고, 다양하며, 개인정보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종이뭉치를 챙겼다. 아내와 나는 임용 고시 면접을 보는 기분으로 의자에 앉아 팀장님이 짚어주는 대로 성실히 이름을 적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적었다는 게 아니라, 이름을 너무 자주 적어야 해서 성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녀 분들 주민등록 초본을 안 떼 오셨네요. 주민번호 뒷자리까지 다 나오게 주민센터에서 한 부 씩만 부탁합니다."


아내나 부모님이면 몰라도 대관절 5세, 7세 어린이들의 초본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자 이내 눈치를 채셨는지 팀장님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태어날 때부터 집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어서요, 은행에서는 여러 가지 것들을 면밀하게 검토하거든요. 우리랑은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이지만(웃음). 절차가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이에게 집이 있으면 좋은 게 아닌가, 혹시 집이 있으면 축하한다고 대출 이율 낮아지는 것인가 하 생각하다가 그냥 "부럽군요."하고 말았다. 확실히 부러운 이야기다. 수협에서는 대출의 세부 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수협 통장 개설,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신용카드 개설 후 3개월 유지, 달러 외환 예금 20만 원 3개월 유지.


나는 홍수에 휘말려 강 하구까지 떠내려간 돼지처럼 1층 창구로 갔다. 휴가철의 강릉 수협은 한산했다. 환율 현황표는 전원이 내려가 있고, 넓은 플로어에 손님은 한 사람이 전부다. 나는 금융이라면 머리가 아파서 싫지만, 이런 느낌이라면 근무해도 꽤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너무 바빠서 눈코 뜰새 없는 신한 은행 예금 계장보다는 훨씬 행복할 것 같다. 월급이 조금 적더라도.


나는 과외를 받는 기분으로 창구에 앉아 수협에서 판매 중인 두 가지 종류의 신용카드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여러 글자가 적혀있었지만, 차이를 잘 모르겠어서 찐 zzin 카드를 골랐다. 12월에 가위로 잘릴 운명의 카드 이지만, 카드 발급은 나를 담당한 은행원의 보너스에 바닷물 한 숟갈만큼의 기여를 할지도 모른다. 현대 금융의 30% 정도는 상부상조식의 금융상품가입과 약정 금액 소비가 아닐까. 그다음 단계는 달러 예금 등록. 수협 앱을 깔고 어쩌고 인증서를 저쩌고 금융기관 특유의 고객 괴롭히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눈두덩이 무거워졌다.


이것이 대출과 무슨 상관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한 시간 넘게 나를 위해 입이 마르도록 상담을 해주고 인내심을 발휘해준 직원분들의 실적을 위해서 묵묵히 또 서명을 했다. 손글씨를 연습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는 은행일지도 모다. 에어컨이 잘 나오고, 철자를 틀리면 지적해주는 사람도 있고, 이름을 반복해서 적어야 하니 적어도 이름에 들어있는 획은 마스터할 수 있지 않을까.


대출 작업은 한 시간 삼십 분 만에 모두 종료되었다. 가족관계 증명서를 바르게 떼 왔으면 10분 정도 단축되었을 것이다. 일억 사천 만 원을 빌려주는 대가 치고는 꽤 합리적인 시간 투자였다. 우리 가족은 앞으로 십 년 간 부지런히 대출금을 갚아 나가야 한다. 3년 이후에는 중도상환 수수료가 없다고 하니 알뜰하게 살면 상환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힘을 내자.


내년에 육아휴직을 쓸 예정인데 갑자기 마음이 흔들린다. 휴직을 취소하면 수명은 줄겠지만 몇 천 만 원이 늘어난다.  그러나 한 번 밖에 없는 공무원 인생에 육아 휴직 한 번 안 쓰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놀 때는 과감히 놀아야 한다. 노는 것은 꿀을 떠먹는 것이며 꿀을 눈앞에 두고 먹지 않으면 어리석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미 대출을 받은 주제에 이런 거 저런 거를 따져봤자 아무 의미 없다. 여하튼 오늘의 교훈은 자기 이름을 멋지게 적고 싶은 사람은 은행에 대출을 받으러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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