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학교의 맛

변기 속 종이죽과 초콜릿 우유

21.07.14

by 이준수

과학 시간에 종이죽으로 재생종이를 만든다. 혼합물의 분리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러나 교육적 효과와는 별개로 주변이 몹시 지저분해진다. 치명적인 부작용이다. 재생 종이 만들기는 실패 없이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을 만큼 작업 공정이 간단하다. 문장으로 훑어도 장면이 그려질 정도다. 1단계 종이죽과 휴지 따위를 수조에 넣고 잘 섞는다. 덩어리가 생기지 않도록 손으로 풀어준다. 2단계 종이죽 믹스를 사각형 모양의 채에 올린 후 물기를 뺀다. 3단계 물기 뺀 반죽을 천 위에 옮기고 건조한다.


잡념을 지우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작업처럼 보이지만 우리 반은 1단계부터 난관에 봉착한다. 수조에 물을 받아 오던 A가 복도에 물을 쏟는다. B는 수조에 1/5만큼만 물을 받으라고 했는데 절반을 넘게 채웠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물이 출렁출렁. 복도와 교실 바닥이 축축해진다. 나는 틈틈이 대걸레로 물기를 훔친다. 진짜 고비는 이제부터다. 종이죽이 기다리고 있다. 표면이 균질한 종이를 만들려면 수조에 손을 담그고 종이죽을 살살 풀어야 한다.


그런데 종이죽 풀기가 만만치 않다. 종이죽의 특성이 아이들을 자극시키기 때문이다. 하얗고 보드라우며 찐득찐득한 섬유 덩어리는 물과 만나 괴물이 된다. 아이들은 뭔가 더럽고, 차분하지 않고, 어수선한 것에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익히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헛된 희망을 품었다. 에어컨 온도를 25도로 차게 맞춰놓았으니 컨디션이 좋을지도 모르잖아, 하면서. 섣부른 기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면서도 어리석은 환상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뉴턴 물리학 제2법칙처럼 정확하고도 엄정하게 흐른다. 교실 사방에서 허연 액체가 분수처럼 튀어 올랐다. 쌀 뜰 물 같이 생겨서 옷에 묻으면 잘 지워지지도 않는 그 액체는 아이들의 팔로, 바지로 올라 붙었다. 어릴 때 수두를 앓고 발랐던 연고 같은 얼룩이 군데군데 퍼졌다. 교실은 이내 비명과 변명으로 가득 찼다. 언젠가 악몽에서 마주하게 될 그림이었다. 나는 양 볼을 착 때리고서 일어났다. 한 손으로는 바닥을 닦고 한 손으로는 물기 빼는 걸 거들었다. 팔이 열 개 달린 인도의 신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체에서 물기를 빼는 과정은 악몽의 하이라이트다. 불쾌한 액체가 홍수를 일으켜 걷는 걸음걸음이 바닥에 찍혔다. 오! 나마스떼. 이 와중에도 아이들은 손이 더럽다며 화장실로 뛰어갔다. 회색빛 발자국이 거품을 일으켰다. 나는 실시간으로 바닥을 문지르며 우윳빛 절망을 지워나갔다.


하아, 이렇게까지 하면서 재생종이를 만들어야 하나, 하고 잠시 4학년 과학 교육과정에 회의감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가 쓰는 물건이 지난한 역경을 뚫고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기에 적절한 수업인 것 같기도 해서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깨끗하고 반질반질한 A4 용지는 얼마나 대단한 발명품인가.


두 시간의 진통 끝에 모든 아이들이 천에 반죽을 옮겼다. 이제 수조와 채만 잘 씻으면 된다. 수조에는 소량의 찐득찐득한 종이죽 반죽이 남아 있었다. 냄비 바닥에 붙어 구제할 길 없어진 수제비를 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자잘한 덩어리와 뿌연 액체를 제거한답시고 변기를 찾았다. 웃는 얼굴로 변기 뚜껑을 열었는데, 내려가지 못한 똥을 목격했다. 종이죽과 마찬가지로 진득한 똥. 또다시 비명과 괴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악몽은 저주로 악화되었다.


장난기 많은 누군가가 막힌 변기에 종이죽을 부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똥이 종이죽을 만나 모양과 색깔이 이상해지자 또 다른 누군가가 레버를 내렸다. 나는 눈앞에서 그걸 막지 못했다. 막힌 변기에서 역류한 물은 변기의 한계선까지 차올랐다. 오! 나마스떼! 만일 팔 많은 인도의 신이 나를 긍휼히 여겨 변기 물이 넘치기 직전에 막아 주지 않았다면 끔찍한 일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당분간 죽은 먹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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