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리코더 녹음 숙제를 내줬다. 녹음 곡은 퍼프와 재키. 파#이 두 번 들어가는 것을 제외하면 무난하게 연주할 수 있는 다장조의 밝은 노래다. 아이들은 리코더 파트 1과 2를 각각 촬영하여 학급 밴드에 올려야 한다. 학교에서 실습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어렵게 하느냐고? 방역 수칙 때문이다. 이 년째 종식될 기미가 없는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 이후 교실에서 관악기 연주는 불가하다. 결국 학교에서 이론을, 집에서 실습을 한다.
퍼프와 재키는 채 1분이 되지 않는 짧은 곡으로 파트 2개를 모두 녹음한다고 해도 부담되는 분량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녹화에서 제출까지 5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금토일 3일에 걸친 주말 과제가 아닌가. 하지만 쉽다고 안 해오면 숙제가 아니지. 역시나 너무 쉬운 과제여서 그런지 너무 쉽게 숙제를 무시한 아이들이 삼분의 일이나 되었다. 강원도의 여름이 숙제하기에 적당한 계절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좀 심하다.
"넉넉하게 이틀 더 줄 테니 화요일까지 모두 올리세요!"
나는 벌 청소를 준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효과가 있었다. 숙제보다 청소가 더 싫었던지 과제 영상이 속속 올라왔다. 그런데 단 한 사람 D만이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그럴 아이가 아닌데. 뭔가 착오가 있었겠지 하고 기다렸다, 하루를 기다리고, 또 하루를 기다렸다. 그러나 D의 과제는 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D를 불렀다.
"왜 과제를 안 내죠? 분명히 몇 번이나 말했는데요."
"집에서는 리코더를 불 수가 없어요."
그러자 주변 아이들이 비웃었다.
"말도 안 돼."
"그런 핑계가 어딨냐. 5분이면 되는데 그걸 하기 싫어 가지고."
D는 질색을 했다. 진짜라고! 흠, 숙제가 뭐라고 이렇게 억울해 하나. 감정이 다소 격한 듯하여 나도 더는 채근하지 않았다. '어떤 날에는 평소와 달리 흥분할 수도 있지 뭐, 하고 잠자코 있었다. 시간이 흘러 5교시 수업이 끝났다. 오늘 일과 종료. 그런데 친구들이 모두 집에 돌아갈 때까지 D는 교실을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D만 남았을 무렵 D가 입을 열었다.
"저희 집 앞에 외국인이 살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피리 소리, 리코더 소리 이런 걸 엄청 싫어해요. 항의도 막 하고. 그래서 집에서는 리코더를 못 부는 거예요. 여기 남아서 하고 가도 돼요?"
응? 외국인과 항의라. 나는 새로운 사실에 뒷골이 얼얼해져서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전혀 예상에 없던 조합이다. D가 리코더를 부는 동안 지금껏 나온 정보를 반추해보았다. 종합해 보면 외국인이 D의 집 앞에 산다. 외국인은 리코더 소리를 싫어한다. 그런데 외국인이 D의 리코더 소리를 듣고 항의까지 하려면 소리가 상대의 주거지에 도달해야 한다. 방음 시설이 별로라는 이야기다.
흐음, 그럼 평범한 아파트나 주택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시시콜콜한 생활 소음까지 전달되는 아파트는 극히 드물 테니까.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지며 가슴이 답답하다.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으나 외국인 노동자와 이웃하며 지내는 곳은 사람들이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지역일 것이다.
D는 얼마나 스트레스받았을까. 아동센터 마치고 집에 가면 일곱 시가 넘은 저녁나절. 그즈음이면 외국인도 퇴근해서 쉬고 있을 텐데 리코더 영상을 찍어서 올려야 한다. 중간에 실수라도 하면 몇 번이고 다시 찍어야 한다. D는 심란하다. 내일이면 선생님이 또 다그치겠지. 넌 왜 이렇게 간단한 숙제를 안 하느냐고. 실은 못하는 건데.
녹화를 끝낸 D가 한 손에 폰을 들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쌤, 저 데이터 없는데요." "으... 응. 교실 와이파이 잡아줄게."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혀가 파르르 떨렸다. 마침내 임무를 완수한 D는 신난 다람쥐 같은 표정을 하고서 방방 뛰었다.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런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걸까. 나도 덩달아 뛰고 싶어 진다.
에고, 나는 겉으로 보이는 밝은 기운만 보고 D의 속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옛날처럼 경제력 조사 따위 같은 걸 하지 않으니, 이런 계제에 슬쩍 아이의 배경을 짐작하게 된다. 나는 다짐한다. 가급적 학교에서 모든 걸 끝내고 숙제는 적게 내야지, 하고. 숙제는 학교 외부 변수가 개입하게 되어 있다. 직간접적으로 부모님과 집, 학원, 집안 분위기가 녹아들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불리하다. 나는 그 몫을 줄이고 싶다.
그나저나 숙제 없으면 아이들은 참 좋아하겠네. 담임도 성질 죽여가며 검사할 필요 없고. 그런데 공부 훈련이 필요한데 안 하는 녀석들도 분명 늘어나겠지. 장단을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다. 기뻐해야 하나, 안타까워 해야 하나. 세상 일은 알면 알수록 쉽지 않다. 그런데 리코더 소리를 못 견디는 외국인은 이 사정을 상상이나 할까?그 사람 잘못은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