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카톡 프로필이나 저자 소개를 보다가 가끔 눈살을 찌푸린다. 바른 생각, 바른 행동, 바른 정신 등 바르게 무얼 지향한다는 메시지가 전면에 드러난 경우다. 그 사람의 바름은 무엇일까. 대게 바름을 내세운 사람들은 그 바름을 강압적인 방식으로 실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리고 어떤 확신에서 비롯된 완고한 행동양식은 주변 사람을 피곤하고 불행하게 만들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비록 '바른'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지라도.
하지만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모순적이다. 직업 교사이기 때문이다. 개인주의자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 되면 곤란해질 때가 많다. 가령 수업 시간에 p군이 마스크를 잠시 내리고 물을 마신다. 나는 물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수업 중 마스크를 벗으면 안 된다고 가르친다. 지금은 코로나 유행 시즌이다. 물을 마시고 싶으면 쉬는 시간에 따로 사람들이 없는 장소에서 마셔야 한다고 일러준다.
P군은 느릿느릿 물통을 닫는다. 하지만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이다. 나는 당사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 공동생활에서의 규칙 따위를 차근차근 설명한다. 결국 여러 사람이 함께 생활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지켜야 할 예의 혹은 규칙이 있고 이것이 '바른 삶'이다, 로 흐르는 이야기다. P군은 논리 정연한 교사의 언변에 압도되어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담임이라는 역할을 맡고 있기에 어쩔 수 없다고는 해도, 나는 습관적으로 '바른 삶'을 옹호하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복도에서 달리는 아이와 화단의 옥수수를 꺾는 아이에게도. 만일 내가 직업적 잔소리(정확하게는 생활지도)를 늘어놓지 않으면 교실은 곧 아수라장이 된다. 다수의 민원이 발생하고, 학생과 나의 생활 만족도가 하락한다.
결국 나는 프로필에 '바른생활 사나이' 같은 멘트만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실제 삶은 꽤 바른 무엇을 지향하는 형태로 흘러간다. 좋든 싫든 나는 그렇게 살아진다. 타인의 삶에 끼어들고 싶지 않은 내 천성에 비추어 보면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한 운명 같다. 반면 직업관에 비추어 보면 교사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기도 하다.
흐음, 자연인으로서의 나와 교사로서의 나의 차이를 어떻게 하면 좋나. 그 둘은 선대칭 도형처럼 분명한 거리가 있다. 매번 이 문제를 의식하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므로 나는 자아를 두 개로 나눈다(물론 내면적으로). 잔소리를 하며 교사 역할을 하는 나와 그걸 뒤에서 지켜보는 나로. 분열적으로 보이겠지만 익숙해지면 무척 편리하다. 잔소리를 마음 편히 할 수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학교에서 생존하려면 필요하니까 하는 거야, 하고 선긋기가 가능하다.
지친 퇴근길, 나는 종종 단골 책방 카페 구석 자리에 앉아 커피를 홀짝인다. 가게 입구를 등지고 앉은 나는 잔소리할 사람 한 명도 없는 고요한 풍경 속에서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의식을 치른다. 카페에서 나온 자연인은 담배 피우는 이름 모를 청소년 곁을 유유히 스쳐 간다. 아니 스쳐가려 노력한다. 내 눈동자는 '혹시 우리 학교 출신 아니야?'하고 직업적으로 돌아간다. 담배는 몸에 나쁜데, 하고 발걸음이 속력을 늦춘다. 나의 어색한 동작에 흡연자는 '뭐야? 당신' 하는 표정으로 나를 흘긋 본다. 처음 보는 얼굴,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다리에 힘을 빡 주고 제 갈길을 간다.
어쩌면 내가 눈살을 찌푸렸던 카카오톡 프로필 '바르게 살자'의 주인공들도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게 아닐까. 인생은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니, 바르게 살자를 외치는 이들도 바르게 살지 못할 수 있다. 주차장 귀퉁이에서 담배 피우는 고등학생도 바르게 잘 살고 싶겠지. 그렇게 보면 우리는 모두 얄궂은 운명의 소유자들이다. 서로 안쓰러워는 못할 망정 프로필만 보고 눈살 찌푸리지는 말아야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