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학교의 맛

고양이처럼 걷기

21.09.02

by 이준수

인간에게는 두 다리가 달려 있다. 걷거나 뛰는 건 본능에 가깝다. 나는 두 딸들이 첫 걸음을 뗐을 때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네가 걷다니 인간이 되었구나,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선 모습은 사뭇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감동이 분노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걷기라는 기능을 터득한 아기는 곧 어린이가 되어 통통 달기기 시작한다. 아마도 수만 년간 드넓은 대지를 박차 달리던 습성이 유전자 안에 각인되어 있으리라. 안타깝게도 우리 가족이 사는 곳은 명주 평야가 아니라 아파트 13층이다.


"저기요! 너무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어요."


아랫집에서 올라온 적도 있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매트를 깔아본들, 본격적으로 뛰고 구르는 인간의 뒤꿈치를 완전히 방어할 수는 없다. 그저 어르고 협박하며 버틴다. 현재 우리 집의 임시 가훈은 고양이처럼 걷기다. 나는 이 가훈이 꽤나 유용해서 급훈으로 쓸까도 생각 중이다.


나는 보통 8시 40분 쯤 교실에 도착한다. 1층에서 올라와 2층에 당도하는 순간 거대한 타악기처럼 건물이 진동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다다다다다, 퉁탕퉁탕, 쿵쾅쿵쾅. 아이의 체형과 보행 스타일에 따라 다른 소리가 난다. 선생님이 당도하기 전의 교실은 실험적인 사운드를 추구하는 현대음악 연습생의 스튜디오다. 불협화음과 무작위적 소음, 원시적 춤사위. 그리고 격렬한 달리기.


'어째서 어린이는 중력을 거부하는가.'


십 수년 째 교사를 하고 있지만, 난해한 의문을 떨쳐내기 어렵다. 아이들의 뒤꿈치에는 로켓 부스터가 달려있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피곤한 어른과 달리, 이 로켓은 항시 발사 대기 중이며 한 번 불 붙으면 쉽사리 꺼지지 않는다. 아이들 눈에 선생님은 위대한 로켓 추진에 찬물을 끼얹는 존재일 것이다.


"채승아 쫌!"

"하늘이 걸어야지."

"건우야 살살."

"태윤아 들어와."

"원용이 그만."


사실 나도 학생이 하교하고 몸이 찌뿌둥 하면 텅 빈 교실에서 팔벌려 뛰기 스무 번을 하곤 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이 있을 때는 옆반 눈치도 보이고, 교장 선생님 순시도 신경 쓰이고 해서 고양이처럼 걷기를 가르친다. 로켓은 그렇게 강제로 고양이가 된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는 어린이의 뒷통수에는 어딘가 원통하고 시무룩한 감정이 묻어 있다.


"집에서 못 뛰니까 학교에서 뛰는 거예요."


원용이의 항변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으려는 자의 진심이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흠, 어떻게 이리 당당한가. 어린이가 뛰는 건 당연하다, 와 같은 믿음이 확고히 가슴 속에 자리매김하고 있다.


교사의 권위를 앞세워 혼내기도 힘들다. 뛰고 싶은 본능을 잘못되었다고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는 없다.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는 원론적인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도 있지만, 조금 치사한 대응이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생각보다 뛸 시간이 없고, 예상보다 뛸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애들이 적당히 뛰다가 데시벨이 특정 수준을 넘는다 싶은 경우에만 개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입 밖에 꺼내면 애들이 미쳐 날 뛸 것이기에 속으로만 생각했다. 불현듯 교사 3년 차에 초과근무 끝나고 저녁 일곱 시인가 그 쯤에 어두컴컴한 복도를 전력 질주한 기억이 난다. 꿍꽝꿍꽝 재밌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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