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학교의 맛

비에 젖은 어깨

21.08.26

by 이준수

오후의 하늘은 하얀색 카펫을 깔아놓은 듯 무겁고 흐렸다. 그렇지만 이 카펫은 비를 뿌릴 기미가 전혀 없어서 적어도 어제보다는 마음이 훨씬 가볍다. 어제는 하교 시간에 맞춰 비가 퍼부었다. 무인도였다면 옷을 홀랑 벗고 서있기만 해도 자동 샤워가 될 빗줄기였다.


부산부터 강릉, 고성에 이르기까지 동해안을 낀 도시는 8, 9월의 비를 피할 수 없다. 늦여름부터 시작되는 태풍과 장마는 두 달 가까이 지속된다. 이 시기의 비는 적당량의 비가 고르게 내리는 것이 아니라 국지적으로 쏟아져 내린다. 시원하다면 시원하고 무시무시하다면 무시무시한 비다.


어제 오전은 빗줄기가 약했다. 우산을 쓰자니 번거롭고 접자니 간지러운 비. 우리 반 아이 중 삼분의 일은 우산을 챙겨 오지 않았다. 등교는 괜찮았으나 하교가 문제였다. 뛰어간다고 해결할 수 있는 빗줄기가 아니다. 우산이 없는 아이들은 친구들 틈에 섞여 삼삼오오 흩어졌다.


2층에서 바라보니 작은 방공호 같은 우산들이 뿌연 물방울의 세계를 떠다니고 있었다. 한 사람이 쓰는 우산도 있고, 두 사람이 쓰는 우산도 있다. 두 사람이 쓰는 우산은 비좁아서 그런지 머리만 쏙 가리고 한 쪽 어깨가 오른쪽, 왼쪽 하나씩 젖었다. 저런 비는 맞아도 좋을 비라고 생각했다. 우산 아래에 있는 얼굴이 궁금해졌다.


궁금증의 실마리는 하루가 지나서야 드러났다. 자기 자리를 청소하던 민석이가 슬그머니 내 책상 쪽으로 빗자루를 옮겼다. 본인 자리만 깔끔하게 하면 되는데 왜 내 자리까지 오는 걸까. 아침에 빼앗긴 부채와 종이칼은 이미 찾아갔으니 장난감 회수 목적은 아닐 테다. 나는 과학 오답노트 점검이 급해서 별 다른 대꾸 없이 할 일을 했다. 민석이는 어색한 포지션에 애매한 거리를 유지하며 바닥을 쓸었다.


"아, 오늘은 하민이 안 데려줘도 되겠네."


혼잣말인지, 들으라고 한 말인지 헷갈리는 말투였다. 나는 무심히 빨간 색연필로 과학 학습지를 채점했다. 그러자 또 같은 말이 나왔다.


"하민아, 오늘은 편하게 갈 수 있겠다."


꽤 주의를 끌만한 음량이었다. 숨겨진 목적이 있는 언어인 것이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민석이는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다소 부담스러운 눈빛이었고, 거리도 가까웠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물려 앉았다. 민석이는 '기회를 잡았어. 이때다!' 하는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어제 비가 와서 하민이를 집까지 데려다줬어요."


한쪽 어깨가 젖은 녀석이 바로 민석이였던 것이다. 나는 민석이가 오늘 과학 시험에서 60점을 맞았지만, 민석이가 너무 좋아서 와락 안았다. 자랑스럽다고 그랬다. 그러자 건우가 자기도 에버빌까지 정빈이 데려줬다며 슬금슬금 왔다. 건우도 안아주었다. 나는 딸만 있지만 이런 아들이 있으면 참 듬직하겠구나 하고 대리 만족했다. 11살은 선생님이 친구를 안아주면 자기 업적을 어필하고 싶어지는 나이다. 아이들이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다고 하는 건 이런 행동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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