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반 선생님이 나무로 만든 코스터를 준 적이 있다. 기존에 가진 코스터가 꽤 여럿이지었만, 연필과 마찬가지로 다다익선의 마음으로 감사히 받았다. 커피와 차를 자주 마시는 사람에게 컵의 바른 위치는 꽤나 중요한 문제다. 코스터는 컵이 특정 장소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일종의 지표로서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덕분에 나는 어디에다 컵을 두어야 하나, 고민하는 일 없이 편안하게 컵을 코스터 위에 둔다. 험난한 직장생활을 버텨 나가려면 훌륭한 코스터와 같은 조력자가 필요하다.
코스터는 원형이며 높이는 새끼 손톱 정도이다. 직경은 표준형 머그잔보다 2cm 정도 더 커서 어지간한 컵을 모두 수용할 수 있다. 디자인은 극히 심플해서 장식이 일체 없고, 바니시 마감이나 코팅도 역시 되어 있지 않다. 수수하게 닳은 표면이 친밀감을 주는 물건이다. 나는 꾸임 없는 목재 코스터가 퍽 마음에 들었다. 평화롭던 나의 코스터 생활에 균열이 간 건 오늘 쉬는 시간이었다.
나는 단지 학년 연구실에 둥글레차를 마시러 갔을 뿐이다. 따끈하게 열이 오른 머그잔을 양손으로 쥐고 교실에 돌아온 순간 내 코스터를 손에 든 하민이가 보였다. 하민이는 코스터 바닥에 레이저 각인으로 새겨진 문구를 또박또박 읽었다.
"제, 정, 신, 은, 건, 강, 에, 매, 우, 해, 롭, 다."
깜빡하고 있었다. 이 코스터가 유명 '취미 유튜버의 한정판 굿즈'였다는 사실을. 음, '항상 정신을 챙기며 살자.'를 강조하는 선생으로서 몹시 무안했다. 직업적 멘트와 애용하는 도구의 메시지 사이의 괴리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 것인가.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하민이는 코스터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했다.
"와! 다 같이 미치자. 안 그러면 해롭대."
하민아 그러지 말아 줘, 너도 어른이 되면 이해하게 될 거야. 때로는 제정신이 더 해롭다는 걸. 하지만 지금은 제정신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해. 그래야만 해. 믿었던 너마저 제정신의 세계를 이탈한다면 선생님은 교실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거야.
퇴근길에 나는 무척 맥주가 마시고 싶어서 말표 흑맥주를 샀다. 네 발로 달려가며 차게 식힌 흑맥주를 들이키고 싶다. 흠, 제정신은 해롭다니까. 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