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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수 Dec 23. 2021

집을 향한 여행(상)

의외로 사람은 자기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잘 모른다. 어떤 일이 터져서 내게 어떤 감정이나 사고가 들이닥쳐야 비로소 '나는 이런 인간이었군.' 하고 뒤늦게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안정의 굴레를 쫓으며 일을 할 것으로 믿었던 나는 한 가지 계기로 긴장의 끈이 팍 풀어지며 휴직원을 냈다. 그건 바로 자가 아파트 소유(주택융자금이 목을 캑캑 조르고 있지만)였다. 든든한 나의 집. 주책인 줄 알면서도 어렵게 마련한 첫 자가 주택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방 소도시인 강릉에 아파트 한 채 마련해 놓고 무슨 호들갑을 떠느냐고 수도권 사람들은 측은하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 집은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금자리다. 가격이 서울만큼 경기도만큼 오르지 않아도, 지하철이 다니지 않아도 등기권리증에 우리 부부의 이름이 박혀있는 한 나는 그곳에서 마음을 푹 놓고 쉴 수 있다.   


나는 우리(아내와 나 공동소유) 명의로 된 아파트 한 채가 절실했다. 겉으로는 세속의 돈놀이에 무덤덤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양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나도 '집을 쫓는 대한민국인'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가문'에서 집을 꽂아주는(세금까지 대납해서) 대단한 집안 출신 몇몇을 제외하면 대한민국인은 강제로 집 구하기 게임에 참가하게 된다. 나는 제대로 된 러닝 슈즈 한 켤레 없이 트랙에 떨어졌다. 어떻게 뛰어야 효율적으로 호흡하는 것인지, 팔은 몇 도로 굽히고, 보폭은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훈련받은 건 없다. 사지 멀쩡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는 있다는 원시적 사실에 기초하여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나는 결혼 후 7년 반을 임대 아파트에 살았다. 2014년 초 22평짜리 구형 임대아파트에(복도가 매우 길다. 오십 미터 전력 질주도 가능하다. 베란다도 무지하게 넓고 크다.) 입주했을 때 나의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20층 중 2층에 위치한 신혼집은 단언컨대 고향을 떠나온 이후 최고의 집이었다. 가장 거대하고, 쾌적한 공간! 세상에, 거실이 있다니. 갓 결혼한 스물여덟의 나는 처음으로 가진 나만의 거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신혼집은 최초의 '반전세(무려 보증금 3500에 월세 3만원!) ' 집이기도 했다. 무슨 말인고 하면 그때까지 항상 '월세'를 내며 살았다는 의미다.      


서민 출신 자식들이 으레 그렇듯 나는 자산 운용이나, 부의 흐름을 논하는 대화에 참여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부모님도 뭘 가진 게 있어야 돈을 어떻게 굴릴지, 자산 처분을 어떻게 할지 궁리를 할 것 아닌가. 월세와 전세 개념 구분도 없이 대학생이 된 나는 어머니가 잡아주신 하숙집에서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보증금 500에 월 40만 원. 보증금은 물론, 월세도 부모님 계좌에서 나갔다. 나는 거주지 고민을 하지 않았다. 하숙집 아주머니의 음식도 괜찮았다. 그렇지만 건물이 낡고, 식사를 자주 거르게 된다는 이유로 일 년 만에 나는 신축 원룸(겉보기엔 그럴싸 하지만 겨울에는 단열이 안 되어 이빨이 시린 냉골방)으로 옮겼다. 보증금 및 월세는 하숙과 마찬가지로 부모님이 냈다. 


춘천교대 근처에는 강원대, 교대 학생 및 사회 초년 직장인들을 위한 원룸이 많았다. 원룸은 월세 아니면 전세였다. 대학교 2학년, 그러니까 2006년 초반 무렵의 춘천에서는 2000만 원 정도만 있어도 꽤 널찍하고, 멀끔한 원룸에 전세로 들어갈 수 있었다. 돈만 있다면 무조건 전세가 유리하다. 하지만 나는 전세 매물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눈에 필터를 씌운 것처럼 나는 월세만 죽어라 들여다 팠다. 애초 집은 내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도와줄 수 있는 범위에서 선택하는 것이기에 전세라는 항목을 의식적으로 지워 버린 것이다. 아쉬움은 남는다. 조금만 계산을 해보면 월세로 생돈을 지불하는 게 얼마나 아까운지 알 수 있다. 월세 25만 원이면 1년에 300만 원이다. 그 집에서 3년을 살았으니 3년 월세만 900만 원이 들어갔고 보증금 500만 원은 그냥 묻혀있었다. 만일 보증금 500에 대출 1500을 보태 전세를 살았다면 년 9% 대출 금리를 잡아도(신용도가 낮은 자영업자의 이율) 이자가 405만 원 밖에 하지 않는다. 그만큼 우리 집에 목돈이 씨알도 없었던 것이다. 


열악한 자금 사정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나와 두 학년 터울인 여동생이 고3이 되기 직전 겨울방학부터 미대 진학을 준비하기 되었기 때문이다. 저소득층 학력 우수 학생 지원 장학금으로 3년 간 고등학교를 공짜로 다닌 나와 달리 미대 입시는 투자가 필수로 동반되는 분야였다. 남들은 초등학교, 중학교부터 대비하는 미대 입시를 고2 겨울방학에 하다니 굉장한 리스크가 따르는 결정이었지만 동생의 재능을 믿었던 우리 가족은 지원을 하기로 했다. 장 만 원 한 장이 다급한 형편에 나의 전셋방을 얻어 주느라 이천 만 원을 덜컥 내어 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대학을 졸업하게 될 때까지 부모님이 내준 월세로 편안히 잘 살았다. 하지만 살 떨리게 부의 힘을 인지하게 되면서 가난의 비굴함을 몸소 체험했다. 동기들 중 집이 '쫌 사는' 애들은 거의 대부분 전세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월세를 더 의아하게 여기는 듯했다(일말의 가난 비하 감정없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느낌으로). 동아리에서 알게된 분당 출신 한 여자애는 아예 부영아파트 작은 평수를 통째로 빌려 지냈다. 평생 아파트에서 거주해본 적이 없던 나는 대학생이 아파트에 혼자 살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돈이 얼마나 썩어나면 아파트를 단독으로!). 그 친구는 약간 쑥쓰럽다는 듯이(브랜드가 부영이어서 별로라는 뉘앙스로) '나 부영 살아.' 라고 했지만, 나는 훗날 그 쑥쓰러운 브랜드의 아파트를 신혼집으로 쓰게 된다(막상 살아보니 리버뷰에 좋기만 하더라).


춘천교대는 강원도치고는 서울과 그리 멀지 않아 학생의 과반이 수도권 출신이었다. 내가 대학을 다녔던 2005-2008년은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이 집권했던 시기로 수도권의 집값이 미친 듯이 오르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의 자산 가치 상승으로 신난 동기들이 "억! 억!" 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전세는 아예 쳐다보지도 못했던 기억이 나서 얼굴이 시뻘게졌다. 아직 젊으니까 앞으로의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만 생각하면 되는데, 자꾸 집안을 비교하게 되고 열심히 일하는 부모님이 작게 보였다. 그간 내가 읽은 책에서는 부의 풍족함을 내보이지 않는 태도가 겸손의 미덕이라 배웠는데 시대는 이미 변해있었다. 부유하다는 건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처럼 기능했다. 가난은 청빈이나 소박함을 의미하지 않고, 수치스러운 부분으로 여겨졌다. 


'나는 왜 돈이 없을까, 우리 집은 왜 돈이 없을까, 앞으로 나는 어떻게 될까, 앞으로 우리 집은 어떻게 될까.'


시커먼 불안의 그림자가 내면으로 훅 끼어들었다. 나는 돈을 갈구했고, 돈이 포근하게 감싸 주는 안정감에 목말랐다. 나의 미성년은 부동산 세계에 눈 뜬 순간 끝났다. 공부만 하면 되는 호시절은 철저하게 과거의 유산이 되었다. 학생은 높은 성적과 상위권에 이름이 실려있는 것만으로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 반면, 어른의 세계에서는 돈이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아무리 공부를 잘 해도 실질적으로 돈과 연결되지 않으면 불안하다. 경제력은 안정감의 구성요소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건 기성 세계의 룰이며 내가 거부한다고 해서 회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적어도 여유로운 유년기와 거리가 멀었던 내게는 그렇다.      


교대만 가면 모든 게 안정적인 삶, 일변로를 걸을 줄만 알았는데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부족했다. 무엇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부족하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불완전하다는 실감이 족쇄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결국, 첫 인사발령 후 구한 강릉 포남동 원룸도 부모님이 보증금을 내주었다. 월세만 내게로 넘어왔다.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도대체 언제쯤 느긋한 인생을 살게 되는 걸까. 깨나른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안정은 여전히 저 멀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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