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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들이 학원에 가는 이유

격월간 잡지 민들레 7-8월 호 <열린 마당>

by 이준수

학원 세계에 입문하다


우리 부부는 초등 교사다. ‘부모가 초등학교 교사인데 아이를 학원에 보내야 되나?’ 이런 생각으로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여덟 살이 된 아이가 올해 처음으로 미술학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유치원 때 친한 친구가 미술학원에 다닌다고 했을 때도 아무 반응이 없던 아이였다. 다니고 싶다는데 굳이 안 보낼 이유는 없어서 알겠노라 대답했다. 올해는 내가 육아휴직이라 가계 수입이 줄어들긴 했지만, 한 군데 학원비쯤은 괜찮다.


포털 창에 지도를 켜놓고 동네 미술학원을 검색했다. 우리 아파트 맞은편 학원가 블록에 미술학원 세 곳이 운영 중이었다. 그리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 미술학원이 세 군데나 있어 신기했다. 예체능 수요가 그렇게나 많단 말인가. 나는 곧 고민에 빠졌다. 학원은 ‘음식점 평점’ 같이 인터넷 후기가 없어서 어떤 곳이 나은지 비교하기가 어려웠다.


아내 아이디로 지역 맘카페에 들어가 키워드 ‘미술학원’ 입력했다. 학업에 관한 이런저런 걱정 글은 많았으나 우리 동네 미술학원 세 곳을 비교하며 고민하는 사람은 없었다. 친분을 쌓은 동네 학부형들이 있다면 직접 물어보기라도 하겠지만 작년에 이사 온 나는 물어볼 인맥도 없었다. 내성적이고 독립적인 성격 탓에 다른 학부모들과 친해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시간이 넉넉한 휴직자의 이점을 살려 학원 세 곳을 방문해보기로 했다. 아이와 함께 가서 학원 분위기도 보고 선생님의 지도 방식 등을 파악하면 선택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학원에 전화를 걸어 상담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한 곳에서는 ‘저희가 입시 위주 수업을 하는 학원이어서요, 1학년 어린이라면 다른 미술학원이 더 맞으실 수도 있어요’라고 정중하게 제안했다. 원장님들끼리 알고 지내는 사이 같았다.


학원가의 시스템을 전혀 모르고 있던 나로서는 꽤 신선하게 느껴졌다. 미술학원이라고 해도 우리처럼 아이가 표현하기를 좋아해서 보내는 집이 있을 것이며, 당장 대학 입시가 급한 사례도 있을 것이다. 학원마다 중점적으로 관리하는 분야와 원생의 나이대가 있는 것이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추천해준 학원에 다시 문의했다.


체험수업 일정을 잡고 방문해보니, 과연 원생 대부분이 초등학생이었다. 다양한 회화, 조소, 콜라주 활동을 주로 하되 입시를 위한 별도의 프로그램은 없었다. 아이도 좋아하고, 나도 마음에 들어서 바로 등록했다. 시간대는 4시부터 5시 타임 하나가 남아있었다. 그 자리도 내가 늦게 문의한 탓에 겨우 남아있다고 했다. 나는 몰랐는데, 새 학기 무렵이면 보통 2월 초에 예약이 다 끝난다는 설명을 들었다. 운이 좋았던 셈이다. 어차피 우리 아이는 다른 학원에 다니지 않으므로 시간은 상관없었다. 주 3회 한 시간 수업에 월 수강료 13만 원을 결제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학원 세계에 발을 디뎠다. 나도 아내도 아이도 만족스러웠다. 초등교사인 우리 부부는 독서와 기초 수학 위주로 가정에서도 충분히 교육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홈스쿨링까지는 아니어도 ‘학원까지 갈 필요는 없지’ 하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맞벌이 시절에는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퇴근 후 아이 공부를 짜증 내지 않고 봐주기가 힘들었다. 직업 교사로 교단에 설 때와 직업이 교사인 아빠는 너무나도 달랐다.


아이가 미술 활동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나서 교실에서 하던 수업을 집에서 하거나, 아이에게 아트 키트를 구해주기도 했지만 한계가 뚜렷했다. 친근한 부모와 권위 있는 선생님은 양립하기 어려웠다. 분위기를 잡으려고 엄하게 하면 아이도 당황하고 나도 어색해서 사이만 나빠졌다. 차라리 ‘교사 부부의 자녀라도 학원에 갈 수 있다’라고 인정하고 나자 마음이 편했다. 그간 ‘학원 거부 신념’을 별 근거도 없이 무리하게 고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에 등록한 후 아이의 일상에 규칙성이 생겼다. 오후 1시 20분에 하교한 후 집에서 잠깐 쉬거나 도서관에 갔다가 4시에 미술학원을 간다. 주 3회 수업이니 그리 빡빡한 일정은 아니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같은 반 친구들은 학원을 서너 개씩 다니기도 하고, 방문 학습지도 여러 과목을 한다고 했다. 도대체 일정 조절을 어떻게 하는 걸까. 머리로 대략 그림을 그려보려 해도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엄친아, 엄친딸들이 이런 방식으로 길러지는 것인가. 나는 육아휴직 중이라고 해도 도저히 과도한 학원 일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차근차근 접근하기로 했다. 일단 미술학원 한 군데를 보내보면 아이의 체력이 부치는지, 다른 사교육을 더 받아도 되는지 감이 올 것이다. 일종의 긴장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왠지 낯선 대륙에 발을 디딘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하교하는 아이를 기다리다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돌봄 공백과 픽업 서비스


나는 아이의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 정문으로 간다. 아이 혼자서 집까지 걸어와도 되지만, 아직 휴대전화가 없고 좀 불안하기도 해서 내가 매번 마중을 나간다. 1학년은 오후 1시 20분에 끝난다. 학교에 머무는 시간이 짧다. 아침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잠시 집안일 한 뒤 점심 식사를 마치면 바로 하교 시간이다.


학교 정문은 하교 10분 전부터 학부모들로 붐빈다. 아는 얼굴은 없다. 개중 몇몇 사람들은 서로 친분이 있는지 머리를 맞대고 소곤거리고 있다. 나는 육아휴직 중이라고 해도 친교를 목적으로 하는 학부모 모임에 끼고픈 마음은 별로 없어서 멀찌감치 떨어져 선다. 그래도 혼자만 호젓하게 서 있을 수는 없다. 공간에 비해 사람이 너무 많다. 학부모 사이에 서 있노라면 마치 내가 자리를 잘못 잡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난 12년간 나는 교실에서 학생을 집으로 보내는 담임 노릇만 했다. 학생이 교실에서 나가고 나면 학교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 다만 다들 바쁘게 살겠거니 추측했을 뿐이다. 그런데 오후 1시 20분에 아이를 기다리는 학부모가 생각보다 무척 많았다. 열 명 중 한 명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로 보였다.


혼자서 움직이는 아이는 드물었다. 혼자서 움직이더라도 휴대전화로 자신의 행선지를 알리는 등 보호자와 끊임없이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능숙한 동작이었다. 여러 번 연습했을 것이다. 출산율이 낮고, 아이를 낳더라도 한두 명이 대부분이므로 돌봄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나 또한 학교에 적응하는 큰아이를 챙기기 위해 1년간 육아휴직을 신청했으니까.


아이와 만나서 집으로 오던 중 미술학원 선생님을 만났다.


“아버님, 안녕하세요?”


나는 꾸벅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미술학원 선생님도 1학년 자녀가 있나 보다 추측하고 지나쳤다. 그렇게 며칠을 인사하며 보냈는데, 어딘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통상적인 부모와 자식의 상봉 장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 달간 관찰한 바에 따르면 자녀가 부모를 발견하고 보이는 반응은 크게 세 가지다. 엄마, 아빠,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 소리쳐 부르기, 손을 흔들며 뛰어와서 안기기, 가방을 벗어서 맡기기.


그런데 미술학원 선생님 주변에 서 있던(자녀라고 생각했던) 아이는 한 번도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사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한 번 의혹이 생기자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은근슬쩍 지나가는 말로 인사를 먼저 건네보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이 기다리시나 봐요?”

“네, 2시 타임 애들 픽업하러 왔어요.”


너무 편안하게 나오는 대답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구나! 학원에서 아이를 데리러 올 수도 있는 것이었어!’


미술 선생님 말씀을 듣고 나서 픽업 서비스의 실체를 확인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태권도장 이름이 적힌 트레이닝 셔츠를 입고 있는 사범님, 손짓으로 아이들을 학원 승합차로 안내하는 영어학원 선생님도 있었다. 교문 밖에 세워진 노란 승합차만 해도 서너 대는 되었다.


모두 다른 학원 차량이었다. 아이들은 익숙한 듯 학원 선생님께 인사를 건네고 차량에 오르거나 친구를 기다렸다. 어떤 학원에서는 아이들을 2열 종대로 줄 세워 손 고리 같은 걸 잡게 해 이동했다. 예전에 아이가 어린이집 다닐 무렵에 본 적이 있는 아이템인데 초등학교에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태권도 팀은 씩씩하게 기합을 넣으며 환영 세레모니를 하고 출발했다. 도복을 갖춰 입은 무리가 우렁찬 소리를 내니 제법 눈길을 끌었다. 아마 그런 패기 비슷한 것을 아이에게 심어주고 싶어서 도장에 보내는 사람도 있으리라. 어쨌든 교문 주변에 대기하는 사람의 사분의 일은 부모가 아니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내가 12년간 담임을 하면서 조사한 바로는 학급의 절반 이상이 맞벌이 가정이었다. 어떤 해는 거의 80% 가까이 되었다. 맞벌이 가정은 1시 전후로 하교하는 저학년 자녀를 데려오기 어렵다. 운이 좋아 조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일반적이지는 않다. 대략 퇴근 시간을 오후 여섯 시로 가정한다면 1시부터 6시까지 다섯 시간가량 돌봄 공백이 발생한다. 부모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채 붕 뜨게 되는 것이다.


학교의 돌봄교실 수용 가능 인원은 학부모 수요에 비해 매우 적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학부모는 불안감을 느낀다. 뉴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흉흉한 소식이 들려온다. 아이가 언제든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수 있다는 불안을 학원이 ‘픽업 서비스’로 덜어주는 것이다.


마을이 아이를 키운다는 말의 현대적 의미


나는 최근에야 학교 주변의 그 두터운 학원가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지 구조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기 전에는 학원가 주변을 지날 때마다 원장님의 생계 걱정을 했다. 도시 곳곳에 훌륭한 설비와 장서를 갖춘 도서관이 있고, 서점에 가면 문제집과 학습지를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다. 이렇게 공부하기 좋은 조건인데 뭐하러 비싼 원비를 지불해가며 학원에 보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학원이 학력 강화 용도가 아니라 돌봄의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새로운 해석이 가능했다.


적어도 초등학생 단계에서는 돌봄 수요가 존재하는 한 학원은 문 닫을 일이 없다. 만일 학원이 학습을 위한 공간이기만 하다면 ‘국수사과영’으로 대표되는 주지 교과 학원만 융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이 초등학교 인근 건물의 학원을 보면 발레, 피아노, 미술, 태권도 학원이 여럿이다. 초등 자녀를 학원에 보내는 이유에는 학습 이외의 다른 요소가 있다는 의미다. 나만 하더라도 아이가 미술학원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입시와 상관 없는 분야라 거부감이 덜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입시 레이스에 강제로 올라타게 될 테니, 어릴 때라도 다양한 분야를 접해보고 적성과 흥미를 찾으면 좋겠다. 내년에 복직하게 되면 미술학원이 돌봄 역할도 하게 될 것이다. 내게 학원은 그 정도 의미만 되어도 충분하다.


얼마 전, 딸아이가 미술학원에 가기 전 포켓몬 띠부씰 스티커 여섯 개를 주머니에 넣었다. 왜 스티커를 챙기냐고 물어보니 미술학원 선생님 두 분께 세 개씩 드린다고 했다. 품절 대란 속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획득한 귀중한 스티커였다. 주말 저녁에 편의점 앞에서 두 시간을 기다려 얻기도 했던 것이다. 아이에게 “선생님께서 정말 좋아하시겠다”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아이와 미술 선생님이 따뜻하고 다정한 관계를 맺기를 바란다. 돌봄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는 무릇 그래야 하니까.


담임을 하면서 학부모 상담을 해보면, 자녀가 교과 부진에 해당하지 않는 이상 성적에 안달복달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반면 교우 관계는 원만한지, 아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것을 힘들어하는지 알고 싶어하는 부모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물론 내가 소도시에서만 근무를 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초등학교 3~4학년까지는 학부모들이 학업 부담을 강하게 느끼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학업에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 굳이 학원을 보내는 이유가 의문이었는데, 보육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보니 어느 정도 풀렸다.


혹자는 ‘어린이들은 뛰어노는 게 최고다, 학원 보내지 말고 그냥 자유롭게 내버려 두라’고 속 편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양육 환경은 과거와 다르다. 딱히 정해진 계획 없이 골목이나 놀이터에 어슬렁어슬렁 나가 동네 친구와 해가 지도록 놀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나도 아이들이 안전하고 느긋한 오후를 보내며 인생의 즐거운 한때를 보내길 바란다. 그러려면 충분한 돌봄의 여건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학원에 몰리는 풍경의 이면에는 불완전한 돌봄이 있다.


돌봄교실을 희망하는 사람은 많지만 한부모 가정, 저소득 가정에 우선 순위가 주어지므로 다수의 맞벌이 가정은 기회를 얻기 힘들다. 정치권에서는 언제나 학교의 돌봄 시간과 수용 인원을 늘린다고 유권자를 설득한다. 그러나 학교 내부에서는 돌봄교실의 지자체 이관을 둘러싸고 고용불안, 업무과중 등의 이유로 돌봄전담사, 교사 간 대립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아이를 키우는데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 넓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돌봄은 학생이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복지의 핵심 요소다. 맞벌이 가정이 다수인 상황에서 부모에게만 오롯이 양육의 부담을 지울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은 사적으로 돈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아이의 방과후 돌봄을 해결할 수 없는 가정이 많다. 학원에 보내지 않고도 원하는 만큼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학부모는 양육의 부담을 덜게 될 것이다.


나는 돌봄의 문제를 학교 내의 이해관계자 갈등으로 묶어둘 것이 아니라, 여러 부처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달려드는 중요한 사안으로 여기길 바란다. 돌봄의 확대는 정치적인 조율이 필요한 사안이다. 초등학교 내 돌봄교실은 법적 근거 없이 교육부 고시로 운영되고 있으며, 다함께 돌봄센터는 아동복지법, 청소년 방과후활동 지원센터는 청소년기본법에 근거하고 있다. 현재의 돌봄은 업무를 담당하는 주체와 근거로 하고 있는 법도 제각각이며 실무를 추진하는 사람도 불만이 가득하다.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처럼 보이지만 풀어야 할 방향은 간단하다. 더 풍부한 재원을 투입하고, 더 많은 인력을 뽑아서 돌봄 서비스의 양을 늘리고 질을 강화하는 것이다. 아이를 돌보고 성장시키는 일에 우리 사회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마을이 아이를 키운다’는 말의 현대적 의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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