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식은 이마를 탁 소리 나게 짚었다. 광규 투약의뢰서를 또 깜빡했다. 약은 책가방 앞주머니에 들어있지만, 광규는 먹지 못할 것이다. 광규 담임은 투약의뢰서가 없으면 약을 챙겨주지 않는다.
‘1학년 애들 겨우 열다섯 명 데리고 있으면서 좀 유도리있게 하면 안 되나?’
하여간 선생들은 융통성이 없어, 상식은 한숨을 내쉬었다. 광규 감기가 길어지면 고생은 결국 본인이 하게 될 것이다. 쉬는 날 오전부터 소아과에 쫓아다녀야 한다. 요즘은 소아과가 별로 없어서 조금만 늦어도 조기 접수 마감이다.
아휴, 그놈의 투약의뢰서만 아니었어도 진즉 다 나았겠다.
문득 담임의 행태가 괘씸하게 여겨져서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짝!
등짝에서 가벼운 충격이 일었다.
“오 경위, 너 안 좋은 일 있냐? 뭔 표정이 그렇게 험악해?”
김 반장이 느물느물 웃으며 상식의 어깨를 주물렀다.
“아, 반장님. 별일 아닙니다.”
차마 애 담임이 좀 짜증 나서,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상식은 예의 비위를 맞추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너 주말에 여의도 한 번 가줄 수 있냐?”
“죄송합니다. 비번입니다.”
“나도 알지, 그런데 와이프가 요번 주말에도 집에 안 들어오면 방 빼라고 하도 성화라서 말이야. 상식아, 제발 부탁이다. 응?”
반장은 두 손을 모아 상식 앞에 들이댔다.
광규 소아과도 가야 하는데, 인사 평가도 코앞이다.
상식은 말문이 막혀, 반장을 바라보았다. 노 민즈 노, 반장은 침묵을 승낙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경찰에서는 명확한 거부 의사가 없으면 예스인 것이다.
“역시 오 경위야. 내가 연말에 평가 잘 써줄게. 토요일 국회 앞 광장으로 출장 올려.”
상식은 혈압이 상승하는 것을 초 단위로 느낄 수 있었다. 주말 집회라… 지긋지긋한 시위대와 사투를 벌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관자놀이 주위가 지끈거렸다.
예전 집회 근무에서 상식은 소주병에 왼쪽 등허리를 찍혔다. 점심 도시락 반주로 소주를 마시던 시위대 중 일부가 20대 여성을 희롱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법대로라면 공무집행 방해에 폭행죄로 감방에 넣어야 했지만, 소란스러운 실랑이 중에 벌어진 일이라 유야무야 넘어갔다. 치료비도 제대로 지원받지 못했고, 상식은 사비로 한의원을 다니며 침을 맞았다.
그런 상식에게 오 반장은 멀쩡한 반대쪽 등허리까지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는 셈이었다.
이번 주말에 소아과 진료를 받지 못하면 광규의 감기는 일주일 더 갈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상식은 키보드를 콱콱 소리 나도록 두드려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공지사항 게시판에는 각종 양식이 탑재되어 있었다. 교외체험학습 신청서와 보고서, 결석계를 지나 겨우 투약의뢰서 양식을 찾을 수 있었다.
투약의뢰서 게시글에는 병설 유아학교 및 1학년 2반에서만 사용하는 양식이라고 적혀있었다.
상식은 투약의뢰서를 내려받았다. 별것도 아닌 양식을 직접 확인하자 또 열이 뻗쳐서, 스무 장이나 인쇄해 버렸다.
미리 월화수목금 날짜별로 투약의뢰서를 다 써서 넣어둘 것이다. 설마 미리 썼다고 안 받아주거나 하지는 않겠지.
분노로 삐뚤빼뚤해진 글자와 숫자가 투약의뢰서의 빈칸을 채워갔다. 반장은 아까부터 수상한 짓을 벌이는 상식을 곁눈질로 확인했으나, 내버려 두었다.
*
“충성! 오 계장님, 오늘 비번 아니십니까?”
“안 그래도 날 더워서 열받는데, 너 나 갈구냐?”
토요일은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태양이 쏟아지는 날씨가 예정되어 있었다. 아직 아홉 시도 안 지났는데, 땀이 줄줄 흘렀다.
박 순경이 손바닥으로 부채를 만들어 상식의 얼굴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네 땀이나 닦어 인마. 오늘 집회에 얼마나 온다냐?”
“한 삼십만 온다던데요…”
“비공식 말고 경찰 통계로.”
“그래도 이십만은 될 거예요.”
박 순경의 팔락거리는 손바닥이 상식에게 붙잡혔다.
“교사들 모이는 거 아니었어? 6차 집회까지는 이삼만 왔다고 보고되어 있던데.”
“그게 이틀 뒤가 49재라나, 그 있잖아요. 경찰 학부모 갑질로 사망한 서울 교사 사건.”
“얼씨구, 그거 추모한다고 삼십만이 와? 전국 초중고 교사 다 합해서 오십만인데.”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주말이었다. 상식은 뜨악한 얼굴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많은 인원을 무슨 수로 통제하냐. 근데 오늘 근무 나온 애들은 뭐 이리 여유만만이야. 저 풀린 미소는 뭐고.
“근데 경찰이 별로 할 게 없슴다. 선생님들이 알아서 다 해요.”
상식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박 순경이 말을 받았다.
“제가 요새 결혼 준비하느라 돈도 모을 겸 주말 특근 계속 자원하고 있거든요. 근데 완전 꿀이에요. 꿀 근무.”
새끼가 빠져 가지고, 상식이 꿀밤을 먹이자 박 순경은 정말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계장님, 진짜 농담 아니라고요. 제가 오 주째 선생님들 집회 현장 나오고 있는데 할 게 없어요. 시위 끝나면 쓰레기 하나 안 굴러 다니고요, 정해진 시간에 딱 맞춰서 바로 끝. 정말이라니까요.”
교사 집회라고 하면 되지, 뭔 놈의 선생님들 집회.
상식은 한마디 쏘아주려다 말았다. 군기를 잡기에는 박 순경이 너무 진지해 보였다.
「선생님들, 구역 별로 앉으실게요!」
집회 주최 측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으니 대학생인지 사회인인지 헷갈린다. 아마 저 사람도 교사겠지.
“여기는 오 계장. 집회 인원 입장 시작. 각자 위치 지키도록.”
예 알겠습니다, 무전기가 잡음을 섞어가며 말을 쏟아냈다.
멀리서 버스가 도착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교사들이 물방울처럼 내렸다. 오늘의 드레스 코드는 블랙인 모양이었다. 하긴 추모식이 핵심이니.
교사들은 한 사람씩 또옥 또옥 간격을 맞추듯 차분한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었다. 상식은 학창 시절 학급 임원들의 수련회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질서유지인 인솔에 맞춰 이동하실게요.」
귀여운 깃발을 든 지역별 교사들이 각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울산은 돌고래, 대전은 꿈돌이다. 지역의 특산물이나 상징을 따서 만든 핸드 메이드 소품이었다. 수학여행 인솔하며 만들 법한 꼼꼼한 솜씨였다.
상식도 광규 유치원 공개 수업에서 손인형을 본 적이 있다. 새삼 집회 참가자가 교사라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검은 옷의 사람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움직였다. 여의도의 빈 땅이 조금씩 검은 물방울로 뒤덮여가고 있었다.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으나 남을 해하지 않는 물길.
팔짱을 끼고 관망한다, 상식은 결코 소극적인 성격이 아니었으나 오늘만큼은 적극성이 수그러드는 느낌을 완전히 지울 수 없었다.
일단 교사들이 자체 질서유지인을 배치하는 시스템은 경찰 입장에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른 시위대도 좀 보고 배워야 한다.
보통 집회 초반에는 경찰과 시위대 간 기싸움을 하느라 서로 긴장하는 타이밍이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찰 기동대 측도, 다른 서에서 나온 분들도 표정을 풀고 다소 관대하게 임하는 분위기다.
뭐지? 이 느슨한 공기는.
유쾌하거나 익숙한 감정은 아니었으나 실제로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이나 상황이 없었기에 상식은 특별한 조처를 할 수 없었다.
8 구역 근처에서 소음 관련 민원이 한 건 발생한 것 말고는 잠잠하다.
「교사와 학생이 모두 안전한 학교를 만들어 주십시오!」
앳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렀다. 웃으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상식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려고 했다. 사람 잡아먹을 것 같은 살벌한 아저씨들만 보다가 고운 용모의 젊은이를 마주하니 청춘이라는 건 참 좋구나, 하며 얄궂은 감상이 들었다.
신규 교사의 목소리에는 위엄이 없다. 듣는 이를 떨게 하는 기세도 없다. 그렇지만 누가 들어도 일반인 같은, 비 집회 전문가인 교사의 목소리는 그것을 바라보는 참관자에게 동의와 이해를 구하기에 충분했다.
무대 위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교사를 보고 있으면 고도로 절제된 감정의 벽 뒤로 절박함이 배어 나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후 4시에 가까워지자 버스는 수를 세기 힘들 만큼 늘어났다. 국회 앞 광장으로는 교사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었다. 넘치는 참가자들은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여의도 광장과 가로수 밑 그늘을 채웠다.
「아이의 기분이 나쁘다고 교사가 직위해제를 당하는 아동학대법을 개정해 주십시오」
「교실에서 제대로 가르치고 싶습니다. 신고당할 것이 두려워 소극적으로 변해가는 무영혼 교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경찰 밥을 십 년 넘게 먹으며, 이런저런 집회판을 돌아다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집회에서 나오는 구호를 평가하게 된다.
어떤 집회는 절절하고, 어떤 집회에서는 구역질이 나온다. 그렇지만 교사들의 집회는 뭐랄까 이상했다. 목구멍에 걸리는 것이 없는 공기 청정기 바람 같은 구호랄까.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하며 밋밋한 말들의 연속. 경찰은 도둑을 잡습니다, 신호 위반 단속을 합니다, 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고작 이런 말들을 전하고자 전국 각지에서 자비로 참석했단 말인가. 교육부에서는 강력 징계를 경고했다. 경찰 조직은 같은 조직원을 협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육부와 학교는 어딘가 별개의 그룹으로 묶여있는 듯한 낌새가 짙다. 비교적 순종적인 교사 집단이 징계를 각오하고 거리에 나왔다. 무언가 끔찍하고, 뒤틀린 것이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단일 직군 소속자의 과반이 자발적으로 모일 수는 없다.
상식은 점차 말수가 줄어들었다. 박 순경이 던지는 시답잖은 농담에도 대꾸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쉼 없이 밀려드는 검은 물방울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검은 점이 되어 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둘 늘어나던 검은 점은 어느새 거대한 카펫으로 변했다. 상식이 선 자리에서 보면 짙은 검은색 실들이 끝없이 늘어나며 무한의 카펫을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고 많으십니다. 4 구역 질서유지인이에요. 시원하게 드시면서 하세요.”
“아…! 예예.”
거구의 남성이 불쑥 건넨 얼음물에 상식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아까 사람들을 이끌던 질서유지인이었다. 거대한 덩치가 인상에 남았다.
“저도 성남에서 초등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번에 운 좋게 질서유지인에 당첨되어서요.”
허허허, 수줍게 웃는 모습을 보니 첫인상과 달리 엄청나게 덩치가 큰 6학년 남자아이쯤으로 보였다. 나이는 사십 대 중반으로 추정되지만, 표정에 숨길 수 없는 장난기 같은 것이 어려있었다. 어린이를 오래 상대하는 사람에게는 지울 수 없는 각인처럼 어린이의 표정이 남는다.
엄격한 듯, 짓궂은 듯 복잡하게 뒤섞인 그 묘한 분위기는 학교가 교사에게 강제로 새겨놓은 문신 같은 것이었다.
“집회 근무 나와서 얼음물도 다 받아 보네요.”
“매번 경찰 분들이 잘 도와주셔서 진행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이고, 뭘요. 날도 더운데 선생님들이 고생이시지요. 사실 저도 1학년 학부모입니다.”
학부모 상담 기간에 교실을 방문한 것 마냥, 상식은 공손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두 손까지 모았다.
“경찰이시면 험한 사건들 많이 접하시니까 아이 학교생활 걱정되고 그러시지요?”
털보 선생은 자기 반 학부모를 대하듯 술술 질문을 던졌다.
“아뇨아뇨. 오늘 선생님들께서 질서 정연하게 계신 모습 보니까 걱정이 싹 가십니다.”
하하하, 상식은 과장해서 웃고 말았다.
민원인을 만나면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너스레다. 요즘은 민원인에게 적당히 맞춰주지 않으면 골치 아프다.
경찰서까지 찾아와 복도에 드러눕고, 소리를 지른다.
내가 낸 피 같은 세금으로 너희들 월급 주는 거야아아!!!
어쩌면 교사들도 나와 동일한 처지의 사람일지 모른다, 민원 처리반.
상식의 팔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저야말로 학폭 담당하면서, 저희 학교와 연결된 경찰관 분께 신세를 자주 졌습니다. 정말 신경 많이 써주셨거든요.”
털보는 대뜸 고개를 푹 숙였다. 상식도 반사적으로 허리를 굽혔다.
상식은 문득 ‘감정이 격앙된 민원인에게는 먼저 진심 어린 사과를 하라’는 민원 응대 매뉴얼이 떠올랐다.
그 매뉴얼은 당장 폐지수거함에 던져 버려야 한다.
악성 민원은 사회라는 정교한 기계에 낀 찌꺼기다. 학교와 경찰이라는 정밀한 기어에는 언제나 찌꺼기가 끼어 있다. 교사와 경찰은 매일 온갖 종류의 찌꺼기와 사투 중이다.
겉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악하고, 더러운 싸움은 실무자의 희생과 인내를 제물 삼아 지속되어 왔다. 교사가 삼십만이나 모인 지금의 이 사태는 기계가 고장 났음을 알려주는 유력한 신호다.
찌꺼기의 양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나고, 질도 유래 없이 조악해져서 도저히 기계를 멈추지 않고서는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뵙겠습니다.”
상식은 곰 같은 털보 질서유지인이 건넨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혼자만 물을 마시고 있으니 어디선가 다른 질서유지인이 와서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박 순경에게 얼음물을 건넸다.
꾸벅 인사하며 물을 건네받은 박 순경은 손으로 차양을 쳤다. 뒤꿈치를 들고, 목을 쭉 뺀 꼴이 기린 같았다.
“히야, 어떻게 수십 만 명이 이렇게 줄을 맞추냐. 돈 주고 하라 해도 못 하겠다.”
차가운 물을 얻어 마신 박 순경 방식의 감사 표시였다.
상식은 담배 타임을 갖고 싶었으나, 반듯해서 반으로 접으면 부서질 것 같은 선생님들 앞에서 불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다. 교사는 어쨌건 어려운 존재였다.
「벼랑 끝에 내몰린 교사들을 보호하라.」
「우리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선생님 특유의 아마추어 집회 느낌은 세계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프로페셔널해지지 않는 편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
이곳에는 사나운 깃발도 없고, 맹렬한 육탄전도 없다. 추모를 위한 하얀 국화꽃 향기만 진하게 나돈다. 아무 생각 없이 보면 무엇 때문에 삼십만 명이나 왔을까 싶을 정도로 담담한 얼굴이다.
상식은 비슷한 얼굴을 콜센터 직원의 집회에서 보았다. 감정 노동자는 감정 컨트롤에 능하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중간중간 교사들이 기획하고 연습한 노래 공연이 벌어졌다. 슬픈 곡조의 멜로디다. 안 그래도 우는 사람이 많은데, 더 많은 사람들이 끅끅 눈물을 흘린다.
「자신 있게 가르치고 싶습니다. 무조건 면책해달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무대 위에 서는 사람들은 계속 교체되었으나, 마이크에 빨려 들어가는 목소리는 한결같았다.
당연한 것들의 요구. 임금을 높여달라거나 복지제도를 확충해 달라는 발언은 영 퍼센트다. 한 시간 전과 같은 내용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는 아바타 종족처럼 선생님들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은 동료의 비극을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인다.
묻지 마 흉기 난동범에게 실탄을 갈겼다가 폐에 구멍을 낸 선배가 있었다. 그는 과잉대응으로 몰려 수천만 원의 합의금을 지불했다. 강력 대응으로 경찰의 힘을 보여주라는 경찰청장의 사자후는 정치쇼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선 경찰의 민사 소송은 청장이 대신해주지 않는다. 담임 선생님이 학부모에게 시달리는 상황도 유사한 맥락이겠지.
상식은 먹먹한 심정으로 교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경찰 기동대 애들 600명도 멍하니 듣고 있다.
여기 모인 교사들은 우리와 싸우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들 피부로 공감하고 있다.
어차피 오늘은 방패를 들 일도, 힘겨루기를 할 일도 없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주최 측에 집회 종료시간은 알려주고, 돌발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투약 지도를 의무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일부 학부모는 아이의 영양제와 이비인후과 약을 챙겨주지 않았다며 밤 열 시가 넘도록 수 십 통의 메시지를 보내왔습니다.」
무심히 무대를 바라보던 상식은 너무 놀라 나자빠질 뻔했다.
설마 광규의 담임인가?
상식은 대형 화면에 클로즈업된 교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오십대로 보이는 고참 여교사였다.
휴우, 절로 큰 숨이 새어 나왔다. 광규의 담임은 결혼도 안 한 새내기다.
심호흡을 서너 번 하고서야 상식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초등학생은 스스로 약을 먹을 수 있는 존재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상식도 어릴 때 엄마가 챙겨 준 약을 먹기 위해 손바닥에 볼펜으로 써 놓았던 것 같다.
시간 맞춰 못 먹으면 오상식의 책임. 칠칠치 못하다며 등짝을 맞았다.
과거의 어린이는 오늘날의 어린이에 비해, 제 나이보다 서너 살 많은 사람에게 부과되는 책임을 졌다. 모두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어린이.
투약의뢰서가 유치원과 1학년 2반에서만 쓰이는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오상식 본인 때문에 양식을 사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는 생각에 이르자 어제 광규 가방에 쑤셔 넣은 일주일 치 투약의뢰서가 죄악의 증거가 되어 머릿속을 날아다녔다.
부모의 일은 부모가 하자, 알아서 척척척 스스로 학부모.
“오 계장님, 집회 종료 삼십 분 전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박 순경이 시뻘겋게 탄 팔뚝을 올리며 거수경례를 붙였다.
석 달 뒤에 장가갈 놈이 얼굴만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라 허옇고, 사지는 시커멓다.
집회 시간을 지키는 시위는 없다. 술이 들어가고, 감정이 커지고, 행동은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집회는 곧잘 전쟁으로 비화한다. 미리미리 전선을 잡아두는 편이 맞다. 경험적으로는.
“집회 종료 30분 전입니다. 나가실 때 쓰레기 정리하고 가실게요. 질서 지켜 이동해 주세요.”
그렇지만 예외는 존재한다.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선생님들은 쓰레기를 주웠다. 삼십만 명이 쓰레기통을 비우고, 유인물을 분류했다. 당사자에게 실례되는 표현이지만, 최첨단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 같았다.
경찰도 혀를 내두르며 청소를 도왔다. 여의도는 광활한 교실이 되었다.
“계장님, 꼭 바둑돌 같지 않습니까? 누가 엄청나게 고민해서 한 수 두고, 또 한 수 두고 해서 만든 포석 같아요.”
“아까 건물 옥상 팀에서도 그러더라. 너무 질서를 잘 지켜서 당혹스럽다고.”
“이런 사람들도 있어야 대한민국이 굴러가죠. 맨날 이런 집회만 했으면 좋겠네.”
“넌 결혼 준비나 잘해. 주말에 푼돈 번다고 데이트 빼먹지 말고.”
집회의 교과서, 집회의 표본은 경찰과 교사의 상호 인사로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
광규는 약을 먹고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가 한결 깨끗하다.
상식은 가방에서 투약의뢰서를 꺼냈다. 다섯 장의 종이는 저주받은 금단의 쪽지처럼 글씨가 엉망이었다. 획은 제멋대로 놀아나고, 크기도 들쑥날쑥했다. 심지어 목요일자 종이에는 오상식이 오생식이라고 적혀있었다. 어제는 정말이지 뇌가 생식기에 달려 있었나 보다.
상식은 투약의뢰서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휴지 하나 없이 말끔해진 집회장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집회가 시작되기 전보다, 끝난 후가 더 깨끗했다. 여러 번 다른 문장을 고민해 보았지만, 이상한 집회라는 단어 이외에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광규 담임 선생님께 사죄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나 혼자만의 죄의식일 수도 있다. 그래도 죄책감을 씻어내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상식은 냉장고에서 박카스를 꺼내 광규 가방에 넣었다. 포스트잇에 짤막한 메모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 토요일 여의도 집회에 저도 경찰 질서유지인 자격으로 나가 있었습니다. 늘 고생 많으십니다.
박카스 병이 차가워 표면에 물방울이 맺혔다. 상식은 포스트잇이 떨어지지 않도록 테이프를 붙여 덧댔다. 어쩐지 하루 만에 교사와 같은 팀이 된 기분이 들었다.
*
상식은 퇴근하자마자 광규의 가방을 확인했다. 가방 앞섶이 불룩했다. 어른 손바닥 크기의 둥근 모양이다.
설마 전달되지 못한 것인가.
불안이 스쳤다. 역시나 주머니에는 박카스가 들어있었다. 대신 상식의 포스트잇이 붙어있던 자리에 살구색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 학부모님의 격려와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평가권자로서 김영란법에 따라 보내주신 음료를 받지 못하는 점을 사과드립니다. 광규는 학교생활 잘하고 있습니다. 칭찬 많이 해주세요.
상식은 마지막에 찍힌 검은 온점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