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던 장면이 서로 연결되는 순간이 있다. 내게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문장과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좋고 맑으면 맑은 대로 좋고 추우면 추운 대로 좋고 또 더우면 더운 대로 좋아요."라는 법륜 스님의 말이 그랬다. 처음에 둘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북극과 남극처럼.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의 구절을 처음 들었을 때는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구절쯤으로 치부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나.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훈련받은 삶의 방식은 구별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었다. 오답을 거르고 정답 고르기, 다른 사람 보다 뭐든지 더 잘해서 선발에서 뽑히기. 극단적인 경쟁을 치르는 한국의 보편적인 성장 과정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공부를 잘하는 것,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세상살이의 우위에 서기 위한 준비과정이라 배웠다. 복지가 충분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반드시 홀로서기가 되어야 한다고 교육받았고, 그렇게 믿었다. 무엇을 위한 우위인지, 과연 삶의 우열을 경제력으로 가릴 수나 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일 년마다 학년이 올라가듯 삶은 컨베이어 벨트처럼 앞으로만 갔다. 능숙하게 분별할수록 평가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원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나와 완전히 분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상대를 적으로 간주해야만 미워할 수 있다. 원수는 분별심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만든 '가상의 존재'다. 내가 원수라고 여기는 사람도 누군가에게는 사랑스러운 연인일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 종의 에고는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내 욕심대로 세상이 돌아가기를 바라며, 내 방식대로 인정받길 원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나의 에고가 지향하는 바에 부합하지 않으면 누구든 '원수'가 될 수 있다. 사유가 무엇이 되었든, 나의 에고가 원수로 상정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좋고 맑으면 맑은 대로 좋고 추우면 추운 대로 좋고 또 더우면 더운 대로 좋아요."
<지금 여기 깨어있기>에 나오는 법륜 스님의 말이다. 이 문장을 읽는데 "원수를 사랑하라"가 떠올랐다. 둘은 완전히 같은 말처럼 느껴졌다. 분별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예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사이에는 시공간의 간극을 뛰어넘는 유사성이 존재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행위다. 적어도 나는 깊은 사랑을 그렇게 해석한다. 약하고 모자란 구석이 있어도 통째로 환영하는 것이다. 좋고 나쁨의 차원을 초월한 수용이다. 원수를 사랑하라의 '사랑'은 받아들임이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좋고, 맑으면 맑은 추운 대로 좋은 마음의 '좋음' 또한 받아들임이다. 이 모든 이해가 갑자기 훅 들어왔다. 조건이 무엇이건 간에 괜찮다는 담담한 마음, 짧은 찰나였지만 생각이 우주처럼 펑 팽창했다가 수축했다. 밀도 높은 평화가 몇 분 지속되었다.
분별하는 능력은 매우 한정적인 영역에서 유용한 도구다. 시험을 치르고,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데 유리한 능력이다. 투쟁에서 이기기에는 적합한 도구이나 행복과는 별 상관이 없다. 나는 '받아들임'의 충격적인 힘을 깨닫고 오래도록 '받아들임의 평화' 상태에 있고 싶어졌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나의 에고는 시시각각 분별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귀로 듣자마자, 눈으로 보자마자 판단한다. 이것은 좋다, 이것은 싫다, 이것은 옳다, 이것은 그르다. 똑똑한 척은 혼자서 다 한다. 사랑과 인정을 갈구하며, 성공한 사람이라는 감각을 추구하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리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이 녀석은 통제하기 까다로운 변덕쟁이다.
에고의 힘이 약한 축복을 타고 난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러지 못하다. 나는 비교적 호오가 명확한 편이다. 매너가 바르고 사려 깊은 사람을 좋아하고, 폭력적이며 거친 사람을 꺼린다. 아파트 엘리베이터만 타도 편안하게 느껴지는 이웃과 어딘가 긴장감이 드는 이웃을 구분한다. 밖으로 티 내지 않으려 무진 애쓰며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속으로는 구분을 한다. 이 과정은 즉각적이고 자동화되어 있어 막을 길이 없다.
부정적인 에너지가 감도는 사람과는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피해 다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인연도 있다. '친구는 가까이하고, 적은 더 가까이 하라'는 조언도 있듯 싫은 사람에게 적당히 잘 맞춰주려 노력한다. 갈등을 빚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싫음'으로 분류된 감정이 어두운 느낌을 자아낸다. 에고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을 비난하고, 벌어지지도 않은 '최악의 이벤트'를 상상한다. 에고의 허깨비 농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나빠진다.
어떻게 하면 있는 그대로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사소한 사건에 흔들리지 않고 고요한 마음을 지속시킬 수는 없을까. 한동안 두 질문이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산책을 하거나 명상에 몰입하면 괜찮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분별하는 마음을 조절하기 수월치 않았다.
원수를 사랑하기란 이리도 힘들구나.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계시를 담은 강력한 힌트였다. 말 그대로 원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현재 나에게 원수는 없다. 하지만 아주 마일드한 형태의 원수는 있다.
가령 지난 주말의 나는 무리하게 칼치기로 끼어든 검은색 카니발에게 욕을 해버렸다. 운전자의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지만 차 안에서 나만 들리게 저주를 내리고 말았다. '급하게 가야만 하는 사정이 있겠거니'하며 넘기면 되는데 욱하는 심사를 참지 못했다. 나쁜 충동은 불쾌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입 밖에 나온 언어는 유쾌하지 않은 진동수로 떨리며 모두의 컨디션을 떨어트린다.
"검은색 카니발 차주님 사랑합니다. 귀한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실험 삼아 진심을 담아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심장이 뜨끈해지며 마음의 온도가 변했다. '그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이렇게 다짐하는 것보다 더욱 강한 기운이 사랑한다는 말에 포함되어 있었다. 도로에서 느꼈던 미운 감정이 뜨거운 버터처럼 녹아버렸다. 사랑에는 엄청난 힘이 있었다. 일단 사랑하고 나자 평화의 기쁨이 잔잔하게 밀려왔다. 여름날 바다 같은 사랑, 봄날 바다 같은 평화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그것은 표면적 언어가 아니라 우주적 힘을 내포한 주문이다. 우선 사랑하고 나면 12월은 12월이어서 좋고, 1월은 1월이어서 좋은 삶이 펼쳐진다. 받아들인다는 건 정말로 근사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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