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에 돈 좀 쓰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코로나19로 어려우니 복지포인트를 가급적 빨리 소진하라는 부탁이었는데, 3월 말까지 60% 이상 1학기 내로 완전 소진을 목표로 내걸고 있었다. 소비 심리가 얼어붙었으니 제때 월급 나오는 사람이 써주는 게 맞겠다 싶어 이것저것 미리 샀다.
8월에 바꿀 예정이었던 주니어 카시트, 10L짜리 에어 프라이어, 반년치 홍삼을 삼일 간격으로 사 제꼈다. 좁은 집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어차피 구입 예정 목록에 있었지 않느냐며 윽박질렀다. 처음에 지급받은 89만 5천 원은 그린란드 빙하가 녹는 속도로 30만 3천 원이 되었다. 로또 1등 됐는데 왜 거지꼴 나지?라는 의문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자본주의 천국에서 돈 쓰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쉽다.
요즘 그레타 툰베리 책을 읽고 있는데 선진국의 소비문화가 지구의 기후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대목이 나온다. 나는 그레타에게 공감하면서도 복지포인트를 남용하는 쇼퍼 홀릭의 즐거움에 빠졌다. 구매확정 버튼을 누를 때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대의를 손가락에 새기며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그렇게 자아를 분열시킨 결과 목표했던 포인트 60% 소진을 초과 달성했다.
복지 포인트를 쓰고 났더니 만 7세 미만 아동에게 돌봄 쿠폰이 나온다고 했다. 보건복지부 장관은 코로나19로 위축된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아동양육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붙였다. 나는 집에 4살, 6살 아이가 있어 각각 40만 원씩 80만 원을 받는다. 심지어 매달 25일에 나오는 기존 아동 수당 10만 원과 중복 수령이 가능하다고 했다.
지난 2월, 연말정산 건으로 80만 원을 뱉으며 튀어나온 주둥이가 들어가버렸다. 나는 뽑기 운이 없어서 복권이나 요행 내기 따위에 일절 참여하지 않는데 갑자기 돈이 굴러오니 어지러웠다. 그러나 진짜 센 한 방은 따로 있었다. 긴급재난지원금 얘기가 나와도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아내가 육아휴직 2년을 마치고 올해 복직했기에 해당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4인 가구, 직장가입자 기준으로 건강보험료 23만 7천652원 이하.
반전이 일어났다. 3월 급여 명세서를 받았는데 내 건보료가 140,320원 아내가 96,710원으로 합계 237,030원이었다. 622원 차이로 긴급재난지원금 수령 대상이 된다는 의미였다. 의심쩍어 검색해보니, 아내가 작년에 육아휴직을 해서 그렇다고 했다. 건보료 계산 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재난지원금 지원 기준이 작년이고 우리 집이 어찌어찌 문 닫으며 지원금을 받는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꼼수를 부려 탈세하고, 복지 지원금을 타 먹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세금 내는 게 아깝지 않으려면 나랏돈이 적확하게 제때 잘 쓰여야 한다. 그런데 요즘 내가 온갖 그물을 피해 꿀을 빨아먹는 천덕꾸러기가 된 기분이다.
외식 잘 안 하는데 오늘은 교촌치킨 가서 라이스 세트 사 먹어야겠다. 내일은 서호 책방에서 책사고. 동네에 돈을 풀어야 한다. 툰베리야 미안한데 적당히 많이 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