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는 학교를 감옥의 감시처벌 구조로 분석한다. 건물로 비유하면 벤담이 말한 일망 감시시설, 판옵티콘이다. 주위는 원형의 건물로 에워싸여 있고, 그 중심에는 탑이 있다. 죄수들은 독방에 갇힌 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다. 그러나 자신을 감시하는 간수를 볼 수 없다. 반면 중앙탑의 간수는 정체를 숨긴 채 독방에서 생활하는 죄수를 관찰한다. 다른 독방과 교류할 수 없는 죄수들은 고립된 존재다.
감시의 1차 목적은 죄수의 신체와 정신을 통제하는 것이다. 죄수들은 발가벗겨진 기분으로 자신의 행동을 조절한다. CCTV가 내려보는데 물건을 훔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방식으로 죄수는 감시자가 원하는 행동양식과 규율을 내재화한다. 질서 정연한 개인이 된다.
감옥을 학교로, 공장으로, 병원으로, 가정으로 옮겨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 나는 푸코를 읽고 절반만 끄덕였다. 스님에 가까운 헤어스타일을 3년 내내 유지해야 했던 고교시절과 결석하면 야단 나는 줄 알았던 옛날 집이 떠올랐다. 학교가 감옥과 닮긴 했어도 시를 돌려 읽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이야기했던 곳도 역시 교실이었다. 음악 수업이 아니었다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영영 몰랐을 것이다. 영세 자영업자의 아들이었던 나는 기꺼이 사슬에 묶인 채 꿈을 꾸었다. 세상의 진실이 녹아있는 달콤한 꿈.
학생에서 교사로 역할이 바뀐 지금, 나는 저울의 균형추를 조절한다. 간수와 예술가 사이에서 외줄을 탄다. 나는 교과서를 챙겼는지 감시하면서, 연극배우처럼 책상과 의자 위를 나다닌다. 속박과 굴종의 언어를 뱉으면서, 자유와 자존을 노래한다. 둘 사이 긴장과 이완이 춤추듯 이어진다.
그러나 온라인 수업은 내게 채찍과 감옥 열쇠를 강요한다. 오전 아홉 시에 출석 체크만 하고 수업을 듣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누가 게시물을 읽었고, 수업 영상을 몇 퍼센트 시청했는지 뻔히 통계로 나오는데 발뺌을 하고, 입을 다물고, 잠적한다. 부모님께 말씀을 드려 양해를 구해 보아도 거짓으로 응대한다. 나는 증거 화면을 캡처해두고 했니 안 했니 부끄러운 대화를 이어나간다.
여기가 코로나19 없는 다른 세계였다면 이런 간수 짓을 하지 않았을 텐데. 예술가의 몸짓으로 한 번이라도 더 웃었을 텐데. 그래도 간수가 되지 않으면 아이가 홀로 내버려지기에 눈을 크게 뜨고 감시한다. 부모님께 전화를 돌리고, 1:1 채팅으로 과제를 확인하고, 부담스러운 문자를 보낸다. 당분간 간수 노릇은 지속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