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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Aug 10. 2016

閑暇한 며칠간의 일탈

일상의 분주함. 사람들은 여유가 없다. 그러나 만들면 생긴다.

한가한 며칠간의 일탈


진주 천리길.

이 말은 진주 출신 박재호가 1941년 작사,  작곡한

- 진주라 천리길 - 이란 노랫말에서 비롯되었고 이후 진주가 한양에서 천리나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노래가 작곡된 일제시대 때는 어떤 길을 기준으로 하였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서 진주가 천리인지 그 이상인지는 알 수는 없다. 다만 조선 팔도에는 의주로, 경흥로,

평해로, 동래로, 제주로, 강화로 등 6개의 주요 간선도로가 있었다는 것과 영남지방과 한양을 오가는 길은 조령(鳥嶺), 죽령(竹嶺), 추풍령(秋風嶺)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에 속한다. 당시 사람들은 추풍령은 우로, 조령은 중로, 죽령은 좌로라고 하였는데 특히 과거시험을 보러 한양을 가던 사람들은 중로인 새재((鳥嶺)를 가장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죽령이나 추풍령을 거치는 것보다 하루 이틀 일정을 단축할 수 있을뿐더러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가을 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에 민감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문경(聞慶)의 뜻이 ‘좋은 소식을 듣는다’라는 뜻이고, 옛 이름이었던 문희(聞喜) 역시‘기쁜 소식을 듣는다’라는 의미여서 험하고 힘들지만 굳이 새재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때 진주로 가는 길은 조령(鳥嶺) 등의 3령(三嶺)을 지나 황간, 김천, 구미, 삼가현(합천)을 거쳐야 했는데 옛 문헌에 한양에서 삼가현까지 890리 라고 하였으니 1,000리는 가볍게 넘어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 진주 천리길 -은 경부선 철도가 개설되고 신작로가 뚫렸던 일제시대를 배경하므로 아마도 부산진이나 삼랑진에서 들어가는 길이 아니었나 짐작해 본다. 그러나 2001년 대전, 통영 간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진주 천리길은 약 840리 정도로 가까워졌다. 물론 이 거리는 고속도로 시, 종점을 기준한 것이기 때문에 집에서 출발하여 최종 목적지까지 계산하면 충분히 천리에 근접하는 거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진주가 부산보다 가까운 곳인데도 불구하고 항상 대전쯤의 중간지대에서 유숙하고 가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진주에 자주 가지 않기 때문에 숙소가 불편한 탓도 있고 예전에 부산으로 돌아가던 시절의 루틴이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진주성 촉석루

대전의 지인 집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 일찍 눈곱만 떼어내고 진주로 출발하였다.

지금은 경상남도의 서남권이어서 상당수 사람들이 신라 때의 영토로 알고 있지만 신라 문무왕 이전까지는 백제의 영토에 속해 있었으며 거열성(居列城) 또는 거타(居陀)라고 불렸던 곳이다. 진주를 얘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남강은 덕유산 육십령 쪽에서 흘러온 물과 지리산 천왕봉 쪽의 물줄기가 합쳐져 시가지 중심부를 관류하고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서부 경남의 생명줄 같은 가람이다.    


사실 진주에 갈 일은 별로 없었다.

무시할 수도 없지만 지나쳐도 그리 아쉽지 않은 어중간한 규모의 시장이기 때문이다.

학교와 관련된 일을 하는 직업이긴 하지만 경상대학교와 진주 보건대학을 제외하면 다른 곳은 큰 비중이 없어 대부분 부산권이나 광주권을 중심으로 돌아보고 귀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장 일정을 잡으면 대전에서 1시간 40분~50분 거리에 위치한 진주를 가기가 솔직히 애매해진다. 또한 대구에서 출발하는 경우에도 1시간 30분은 잡아야 하고 부산권에서 출발해도 1시간 이상 소요되기 때문에 먹기도, 버리기도 애매한 마치 계륵과도 같이 어정쩡한 지역이 진주인 것이다.      

어쨌건 나는 진주 보건대학교에 볼 일이 있었고 오전 10시가 넘어 학교에 도착하였다.

이 학교는 1971년 개교한 보건계열 전문대학으로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꽤 지명도가 높은 곳이다. 학교에 출입하려면 까시락스런 정문 경비를 통과해야 하고 중간에 위치한 본관 주차장을 지키는 말뼉따귀 같고 버마재비 같은 경비원에게 또다시 다음 행선지에 대한 검문을 받아야 한다.    

진양호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라는 삼복(三伏) 중에 털털거리는 고물차를 몰고 학교를 방문했지만 내가 추구하는 목표가 달성될지는 미지수이다. 가능할 것 같아도 가능하지 않고 100% 약속을 받아도 어떤 변수에 그 약속이 틀어질지 모르는 것이 이 바닥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코 가역적 상황은 유지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하면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문제가 상존하는 곳이 바로 내가 일하는 환경인 것이다. 만나고자 하는 사람에게 정성스런 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가능할지도 가망 없을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 다시 대전으로 빠꾸 해 왔다.

진안 용담의 아침

다음날 아는 형님과 물가에 가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홀아비 냄새와 파이프 담배향이 진득하게 배어있는 이 냥반은 일반외과 의사이면서 응급의학 전문가로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지명도를 보유한 분이시다. 취향은 3차원을 넘어 4차원에 가깝지만 지식의 폭이 대단히 넓고 대인관계도 원만하여 국내외적으로 많은 인맥을 쌓고 있는 마당발 인간형에 속한다. 또한 전 세계의 재난현장은 물론, 북한에도 10여 차례나 다녀온 관련 분야의 베테랑 이시다. 평소 낚시, 스킨스쿠버, 등산 등의 야외활동을 즐기시는 이 냥반의 차량에는 온통 레저스포츠 용품이 가득 차 있어 3명 이상 탑승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낚시 정도는 언제 어디서나 가능한 준비 완료 상태이고 소형보트도 항상 차량에 탑재되어 있는, 그야말로 레저를 위한 다목적 캠프나 다름없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영원히 그럴 것 같은 이 냥반네 집은 예상대로 온갖 쓰레기와 패스트푸드 식품, 그리고 언제 적에 처박아 두었는지도 모를 고기들이 냉동실에 박제처럼 동결되어 있었다. 언제나 내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은 청소와 요리이다. 우선 냉장고를 정리하여 버릴 것은 버리고 바닥을 쓸고 닦고 요리를 해야만 한다. 평소 짭짤하고 얼큰한 음식을 좋아하는 그 냥반을 위해 되야지 고기 두루치기를 들들 볶고 박제와도 같은 쇠고기는 푸석거리지만 그럴싸한 불고기로 변환시켰다. 그리고 가지볶음을 하고 콩나물 냉국을 끓여 냉장고에 식혀 두었다. 소싯적 다년간의 자취 경험과 아무 때나 무작정 떠났던 10여 년간의 무전여행 경험이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자칭 만능 요리사(?)가 된 배경이다. 형님의 입은 함지박만큼이나 벌어졌다. 어사또 밥상기준에도 미달하는 1식 1찬~ 2찬이 대부분이었던 반찬이 5찬까지 풍성해졌기 때문이다. 막걸리 2병을 곁들인 저녁 만찬을 그런대로 성대하게 해치우고 솟아오른 뱃가죽을 쓰다듬으며 슬쩍 낚싯밥을 던졌다.      

개교 70년이 되었다는 칠보 초등학교

- 칠보에 한 번 가볼까요?

- 칠보?

- 네, 예전에 거기에서 고기를 많이 잡았었는데 고기   도 고기지만 냇가 왕버들이 예술입니다요.

- 피라미도 월척급이 잡히는데 20cm가 넘는 것이   많아요.

- 뭬야? 피라미는 12cm가 최대 크기인데?

- 제가 직접 잡은 것이 23cm 크기였습니다.

- 에이, 뻥도 어지간히 치시게.

- 참말이라니까요?  


어쨌건 우리는 그놈의 20cm가 넘는 월척급 피라미를 잡으러 칠보로 떠났다.

동행한 또 한 명의 일행은 예전 메디슨에서 MRI. CT를 개발했던 김 모 박사다.

예상시간은 1시간 30분가량이었는데 축지법을 썼는지 1시간 만에 당도하였다.

칠보 면사무소에 주차를 하고 20년 전이나 현재나 크게 변모되지 않은 칠보면 소재지 대로를 활보하였다. 밀짚모자도 사고 낚시 용품도 사고 아저씨들이 즐겨 빨아먹는 비비빅도 한 개씩 깨물어 먹었다. 마치 어느 시골로 소풍 나온 기분이 들었는데 마음은 유유자적하여 평화롭고 잠시나마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난 해방감에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인 칠보면 소재지. 전국 어디서나 이발과 낚시가게의 글씨는 똑같다

- 우선 점심부터 해결하자고.

- 어디로 갈까요?

- 이따가 저녁에는 저기 식육식당에서 먹기로 하고 점심은 간단하게 하세. 

    

우리 일행은 고향식당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주방과 홀이 훤하게 터진 곳에서 자그마한 할머니가 고기를 썰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들어가자마자 다짜고짜 음식을 주문하였다.


순박한 시골인심 그대로인 고향식당

- 밥 줘요!

- 뭐 디릴까?

- 뭐가 맛있어요?

- 즘심에는 백반이 젤 낫지 뭐.

     

일행을 쳐다보니 모두가 눈으로 동의를 표시하였다.

나는 주인 할머니에게 곰살맞게 아양을 떨었다.


- 아이고, 우리 할머니 왜 이렇게 이쁘시댜?

- 맨날 뭘 자시길래 이렇게 피부가 고울까 잉?


할머니가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천진하고 순박해 보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거의 성희롱에 가까운,

어쩌면 무례할 정도의 행동을 나도 모르게 범해 버렸다.

할머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마치 애인을 바라보듯 빤히 쳐다본 것이다.

할머니는 나의 무례를 탓하기는커녕 나를 올려다보며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내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속삭이듯 하셨다.


- 나 할머니 아녀!

- 글고 할머니라고 하면 우리 딸이 싫어항게 허지 마 잉?

- 음마? 지금 할머니 몇 짤?

- 나, 올해 예순 서이.

- 아이고 그럼 누님이시네.

- 그람 지금부터 누님이라고 부를게 잉?


할머니는 눈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을 만들며 웃으신다.

- 이따가 옥수수 삶아줄게 먹고 가.

- 공짜로 주실 랑가?

- 그려, 그리고 집에 갈 때 한 자루 사가지고 가 잉?  

    

우리는 그렇게 고향식당 할머니인지 누님인지와 가까워졌고 다음날부터 개시한다는 삼계탕도 맛보기로 한 마리 얻어먹는 횡재를 하였다.

5,000원짜리 백반 3그릇에 15,000원인데

삼계탕 한 마리와 옥수수는 물론 부침개까지 서비스받는 대박 시골인심을 세트로 경험한 것이다.

     

칠보라는 지명은 일곱가지 보물을 담고 있다는 七寶山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이 칠보산에는 신라시대 최치원을 제향 한 무성서원과 용계서원, 도봉사와 남천사, 무성리 삼층석탑, 무성리 석불입상, 백암리 남근석 등이 곳곳에 산재해 있고 너른 태인 평야를 굽어보는 위치에 있어 예로부터 영산으로 꼽혔다고 한다.       

칠보천 왕버들. 가지가 냇가까지 늘어져 있어 시원한 그늘에서 낚시를 할 수 있다

우리는 300년 이상 수령을 자랑하는 왕버드나무가 줄지어 서있는 냇가로 가서 각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낚시 포인트를 잡았다. 형님은 견지낚시를 하고 김박사는 릴로 던지고 나는 3칸 대로 월척 피리미를 겨냥하였다. 견지는 빠른 물살에서 고기를 잡는 낚시 방법이고 릴은 보다 멀고 넓은 범위의 포인트를 겨냥할 때 유용하다. 대낚시는 이것저것 아무 방법이나 통용할 수 있는 전통적이고 만능의 용도를 가지고 있어 나 같은 얼치기 낚시꾼한테는 가장 적합한 도구인 셈이다.

 

고기들한테 별 반응은 없었다.

개체수가 감소한 것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20여 년 전에 정신없이 낚아 올렸던 고기들은 죄다 피서를 가셨는지 피난을 가셨는지 입질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제일 선수 격인 형님 허리춤의 뀌엄지에 몇 마리의 고기를 매달고 있어 살짝 위안이 되기는 하였다. 자칭 강태공인 김박사는 세월만 낚는 것인지 담배 연기만 뻐꿈뻐꿈 허공에 날리고 있어 물반 고기반이라는 나의 호언장담이 무색하기만 하다.  

   

투~둑!

고기들이 낚시에 매달린 먹이를 공략하는 느낌이

그렇게 온다.

이것을 낚시꾼들은 손맛이라고 통칭한다.

사실 낚시는 순간포착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지는 게임과 같다.

어느 순간, 어느 때에 낚싯대를 채느냐에 따라 조과(釣果)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순간 반응이 굼떠 그러한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하지 못하는 C급도 안 되는 낚시꾼이다.

고기가 이미 진작 낚시 바늘을 물고 있었는데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파닥! 파닥! 몸부림을 치고

'나 잡혀부렀당께요!'라고 성질머리를 부린 후에야???!!! 하고 건져 올리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마치 떠나간 버스 꽁무니를 보고 손 흔드는 얼치기와 다름 아닌 것이다.

야구 중계를 보면 헛방맹이질을 하거나 어림 반푼도 없는 공에 스윙을 하는 선수들이 있다.

관객 입장에서 볼 때 '에궁! 저것도 선수라고 ㅉ ㅉ!!' 하는 실망과 한탄이 절로 나온다.

내가 꼭 그 짝인 것이다.      


그래도 뭐 눈이 멀었거나 멍청하거나 삶을 포기한 고기들을 가끔 낚아 올리기는 한다.

그렇다고 피라미 낚시가 만만하거나 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녀석들은 물 흐름이 완만한 곳에서는 잘 잡히지 않고 쉽게 속지도 않는 특성이 있다.

여울지거나 물살이 빠른 곳이 피라미 낚시의 일반적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나마 오랜 경험과 실수의 반복을 통해 어렵게 터득한 나만의 노하우(?)라면 노하우일 것이다.

피라미 낚시는 잡아 올리다가 떨쿼버리는 상황이 절반은 넘는다.

그것은 피라미 낚시 바늘의 미늘이 매우 적어 바늘이 꿰인 곳을 꽉! 물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몸부림을 치면 빠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낚이는 순간 잽싸게 잡아채서 원심력을 이용하여 안전지대에 떨어뜨려 놓아야 비로소 포획이 완료된다고 할 수 있다.    

한여름날의 물속 낚시. 최고의 피서방법 중 하나이다

우리가 낚시를 했던 곳은 칠보천이다.

어릴 때 사회 교과서에서 배웠던 칠보 발전소(섬진강 수력발전소)가 근경으로 보이는 곳이다.

칠보천은 섬진강 옥정호를 역류시켜 압력 수로를 만들고 그 수압을 이용하여 발전을 하고 쏟아내는 물과 주변 지천들이 합쳐져 이루어진 개천이다. 이 칠보천은 칠보와 태인, 그리고 호남평야를 적시고 김제시 죽산면에서 원평천과 합쳐지는데 이 강을 동진강이라고 부른다. 섬진강 수력 발전소는 1943년에 건설된 것으로 1944년 건설된 화천 수력발전소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발전소이며 엄청나게 큰 파이프가 산 상층부에서 아래까지 주~욱 설치되어 있어서 조형적으로도 상당히 아름답게 보인다.  


남한 최초의 유역변경식 발전소인 칠보 발전소가 보인다

이 칠보천에서 잡는 피라미는 유난히도 씨알이 굵고 힘도 세다.

여기저기에서 낚시를 많이 해봤지만 칠보천 피라미만큼 크고 힘이 센 놈들은 보지 못했다.

20년도 넘은 언제쯤이었던가!

칠보천이 범람할 정도로 엄청나게 비가 많이 오던 날 겁도 없이 나는 낚시를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낚시가게 아저씨가,

- 지금 낚시를 하면 괴기가 겁나게 잘 잡힌게 한 번 혀봐!

산란기 피라미 수컷. 혼인색으로 변모한다

라고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나를 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양반이 찍어준 곳으로 가서 낚시를 던져봤다.


맙소사!

낚싯대를 던지기가 무섭게 5개나 매달아 놓은 낚시에 전부 고기가 낚여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흔히 '손맛'이라고 하는 것은 물고기와 힘을 겨루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하찮은 피라미라 할지라도 5마리씩이나 걸리면 정말 장난 아니게 낚싯대가 휘청 거린다.

물이 많고 물살이 센 곳에는 자잘한 고기들은 휩쓸려 버리고 대부분 크고 힘 좋은 녀석들만 몰려드는데 5마리가 한꺼번에 매달리면 낭창낭창한 낚싯대는 중심을 잡기조차 힘들게 되는 것이다.      

그날 나는 정신이 없었다.

무수하게 잡아 올리는 피라미가 양동이에 가득 찰 때까지 거의 무아지경에서 낚시를 했었으니까!

그래서 그 짜릿하고 풍성했던 기억이 현재까지도 피라미 낚시에 재미를 붙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끝없이 낚여 올라오는 피라미를 잡다 잡다 지쳐 무끈한 양동이를 들고 모정으로 걸어가는데 동네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하신다.


- 아따, 많이 잡았네요 잉?

- 여그 괴기가 겁나게 많당게.


그 말들은 20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현재까지 전혀 유실되지 않고 그대로 저장되어 있는 중이다.

고기를 손질하려고 큰 대야에 쏟아 놓으니 전혀 피라미같이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고기들이 상당수 보였다.

아무리 살펴봐도 평소에 내가 알던 어종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놈들은 무슨 고기인가? 라는 의문이 들어 낚시가게 주인아저씨에게 물어보러 갔다.


- 아, 피리여, 피리랑게.

칠보천 근방에 새로 신축된 聯碧亭

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하였다.(피라미를 전라도에서는 피리라고 부른다)


- 엥? 이게 피라미라고요?

- 근데 왜 이렇게 크고 통통해요?


- 여그 피리들은 저 밑 동네에 먹을 것이

  많혀서 배 터지게 처먹응게 그려.

(전남은 말미를 '께'라고 발음하고 전북은 '게'라고 발음한다)


나는 도저히 그 말을 믿기 어려웠을뿐더러 혹시 다른 어종을 이 동네에서는 피리라고 하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버릴 수가 없었다.

모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를 끌고 오시는 노인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 할아버지 이게 무슨 고기예요?

- 그거 피리잖여, 피리도 몰러?

- 이게 진짜 피라미가 맞아요?

- 자네 어디서 왔능가? 피리를 피리라고 하제 뭐라고 하는가?

- 근데 무슨 피라미가 이렇게 커요?

- 그거야 모린디 좌우간 여그 피리는 솔찮이 커서 먹을 만 혀.


나는 그 이후로 몇 번을 더 물어본 끝에 전혀 피라미로 보이지도 않는 체구를 가진 물고기를

어쩔 수 없이 피라미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단다.

그래서 제일 큰 놈 몇 마리를 골라 다시 낚시가게로 가서 줄자를 빌려 크기를 재 보았다.

가장 큰 놈이 무려 23cm.

제일 작은놈이 19cm.

이후 나는 그 어디, 그 어떤 곳에서도 그렇게 통통하고 힘차고 큰 피라미를 잡아보지 못했다.  

   

수의학 박사 임동주가 쓴 우리나라 민물고기 대백과 사전을 찾아보면,


피라미의 학명은 Zacco Platypus.

분포는 한반도, 중국, 일본, 대만.

크기는 80mm~120mm. 최대 170mm까지 자란다고 씌어 있다.   

질보천의 17cm 월척급 피라미. 파닥거리는 통에 사진찍어주는 것도 힘들었다

그렇다면 칠보천의 피라미는 과연 어떤 돌연변이 종이길래 그토록 매머드처럼 커진 것일까?

그렇다고 생태 역학이나 서식환경을 조사할 수도 없는 일이니 내 나름대로, 또는 자기 합리화를 위한  근거를

찾아보기로 하였고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물론 당연히 엉터리 결론이자 추측성 근거이지만 그렇다고 100% 허위사실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는 칠보천, 축현천, 용호천, 정읍천, 덕천천, 원평천은 전부 큰 분지나 평야를 이루는 곳에 위치해 있고 비옥한 토양에서 생성되는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게 공급될 것이라는 나름의 이유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즉, 피라미의 주식인 각종 미생물이나 수서곤충, 또는 부착조류 등이 풍부하니 당연히 영양공급이 넉넉할 수밖에 없고 칠보천의 피라미는 그러한 서식환경 속에서 성장한 돌연변이성 크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뭐, 아님 말고......!

좌. 우. 지. 간~

그날 나는 옛날같이 겁(劫) 나게 큰 230mm나 되는 피라미를 낚지는 못했지만 170mm 정도 크기의 피라미는 잡았더랬다. 최소한 나의 뻐~엉 같은, 작은 꽁치만 한 피라미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라도 확인시켜 준 것임에는 틀림없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칠보 발전소 뒤편으로 검은 비구름이 뭉실뭉실 떠 올랐다. 보나 마나 소나기를 잔뜩 탑재한 비구름이다.

아니나 다를까 채 5분도 되지 않아서 사정없이 소낙비가 쏟아져 내렸다.

부지런히 낚싯대를 걷고 모정으로 피신하고나서 잡은 고기를 세어보니 얼추 30여 마리는 넘어 보였다.

어떤 녀석은 여전히 혈기방장 하여 팔팔하게 파닥거리고 어떤 녀석은 모로 누워 입주뎅이만 껌벅껌벅하며 사망 직전이고 어떤 승질 급한 녀석은 일찌감치 자살해 버렸는지 바닥에 누워 계시다.     

빗줄기가 사납게 볼때기를 때려대는 와중에도

우리는 300년이 넘어 보이는 왕버드나무 군락을 구경하러 갔다.

모정 바로 옆에서부터 10여 그루가 줄지어 서있으니 거기서 거기지만 말이다.


- 이게 버드나무라고?

- 그럼요. 왕버드나무입니다.

- 버드나무가 종류가 많은가 보네?

- 네, 수양버들, 능수버들, 갯버들, 용버들, 왕버들 등이 있습죠.

- 그렇게나 많나?

- 훨씬 더 많을 걸요?

300살이나 먹은 칠보천의 왕버들. 당당하고 풍성한 풍채에 새삼 경외감이 든다

급기야 모정에 앉아 스마트 폰으로 버드나무 종류를 찾아보았다.

으잉?

나도 몇 종류를 나불거리고 아는 척을 하긴 했으나 이렇게 많은 종류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왕버들, 선버들, 갯버들, 버드나무, 수양버들, 능수버들, 개키버들, 용버들, 갯버들, 눈 갯버들, 참오글잎버들, 호랑버들, 진펄 버들, 늪 버들, 눈살 버들, 큰 살버들, 들 버들, 육지 꽃 버들, 섬 버들, 강계 버들, 매자 잎 버들, 쌍 실버들, 참오글잎버들, 꽃 버들, 가는 잎 꽃 버들, 긴 잎 꽃 버들, 떡버들, 반짝버들, 선버들, 털 왕버들, 쭉 버들, 눈 갯버들, 좀 꽃 버들, 좀분 버들, 긴 매자 잎 버들, 좀 호랑버들, 여 호버들, 난쟁이 버들, 키버들, 붉은 키버들.........!!!     


무려 41종이나 된다.

이 중 어쩌면 같은 종을 다른 이름으로 표시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종이 더 있는지도 모르지만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종류에 깜짝! 놀랐다는 것은 사실 중의 사실이라는 거다.

우리는 버드나무 종류의 다양함에 새삼 놀라고 장대같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와중에서도 장군처럼 버티고 서있는 왕버들 나무들을 세어보기로 하였다.

하나, 두~울, 서이, 너이...... 도합 16그루.

태풍때문었는지 벼락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질병으로 돌아가셨는지 부러지고 고사한 나무까지 합하면 20그루는 족히 넘었던 것 같다. 근래 사람들의 수명이 대폭적으로 높아져 흔히들 100세 시대라고 하는데 이 나무들은 300년을 더 살고도 여전히 장대한 근골과 풍성하기 그지없는 줄기, 그리고 이파리들을 과시하고 있어 한편으로는 부럽기 짝이 없기도 하다. 허긴 바오바브나무는 6,000여 년을 살고도 여전히 건강하시니 무신할 말이 더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왕버들 나무들을 그냥 초목의 하나로 생각하기보다는 같은 생명체로써 존경과 경외하는 마음으로 공손하게 대하기로 하였단다.


- 아니고, 나무님들 건강들 허시쥬?

- 오늘 기분은 워떠 시대유?

- 진지는 잡솼는가유?

......!    


기골이 장대한 왕버드나무. 둘레가 7~8m가 넘는다

한낱 초목에 불과하지만 장구한 세월에도 끄떡없는 건강과 풍채를 소유하고 있는 왕버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만스러움으로 감히 자연 만물에 대해 의시딱딱 거릴 수 있을 것인가?

기껏해야 100년도 못살고 꼬꾸라지는 주제에 들......!

생명을 유지하고 그 삶을 살아가는 과정은 인간이나 초목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심지어 하루살이나 7년을 땅속에 살고 햇볕은 1년도 보지 못하는 매미까지도 말이다.

        

순식간에 하늘을 덮어버렸던 검은 구름은 남서풍에 실려서 먼 산 너머로 스르륵~ 넘어가신다.

그렇게 순식간에 퍼붓던 빗줄기도 짧은 시간에 냇물을 뻘겋게 만들어 놓고 뚝! 그쳐 버렸다.

애초 계획하기로는 쇠고기를 구워 저녁 식사를 하기로 하였는데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애매하기 그지없는 30여 마리의 피라미들 때문에 살짝 고민스러워졌다.

- 어떻게 하지?

- 뭘요?

- 이 고기들을 어떻게 할 거냐고?

- 매운탕......#$%&*ㅜㅠ....!

- 근데 어디 가서 매운탕을 끓여먹지?


솔직히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집으로 가져가자니 끓이는 것도 그렇지만 가져가는 사이에 부패할 것이 십상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 일단 점심 먹었던 식당 가서 한 번 부탁해 볼까요?

- 해줄까?

- 모르지요. 뭐, 돈 준다고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일단 우리 일행은 점심을 먹었던 식당으로 가기로 하였다.

저녁시간이라 홀과 방에 제법 많은 손님들이 앉아있었다.

나는 낮에 애교를 떨어 바쳤던 식당 누님에게 애교와 아부탄 1발을 장전하고 발사하였다.


- 아이고, 누님 또 왔시오^^

- 근데 누님 이거 매운탕 끓여 줄 수 있어요?

- 돈 디릴게......

- 피리 잡았능가?

- 네~

좋다 싫다 내색도 없이 식당 누님은 달랑 고기를 인수해 가시더니,

뚝딱! 뚝딱! 뭔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찐 옥수수 3개를 휙~ 던져주며,


- 시장할 텐디 이거 우선 먹고 있어.


옥수수는 정말, 진짜로 맛이 있었다.

윤기 나면서도 야무진 알갱이가 차지면서도 톡톡 터지는 식감이

사카린을 넣어 삶은 길거리표 옥수수 하고는 유전자부터 다른 것 같았다.

나와 감 박사는 하모니카 불 듯 알갱이를 훑어 씹어먹고,

형님은 절반으로 뚝! 부러뜨려 손톱으로 하나씩 알갱이를 따서 잡수신다.

영락없이 옛날 하나씨(할아버지를 부르는 전라도 방언)와 할머니가 잡수시는 모습이다.      

옥수수를 다 먹기도 전에 누님은 매운탕 냄비를 가져다주신다.

아~니 벌써?

불과 5분 남짓인데 무신 초특급 셰프라고 그 짧은 시간에 매운탕을 만드셨남?

이거 보나 마나 비린내에 범벅된 매운탕이 아닐까?라는 선입견이 그냥 확! 들어서

입맛이 돌기는커녕 도대체 이걸 매운탕이라고 먹어야 하나?라는 비관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 누님 이거 더 끓어야 하는 것 아닌가?


누님은 힐끗 쳐다보더니 한마디 던지신다.


- 왜 삐린내 날 것 같아서?

- ...... 네~

- 그럼 더 끓여서 먹든가.

- 피리는 오래 끓이면 고기맛이 없고 양념 맛 밖에 안낭게 적당히 끓여야 혀.

- 그래도 자작하게 더 끓여서 먹을께요.

- 알아서들 혀. 근디 내가 피리 요리를 30년을 넘게 했당게.

뭐 그러셨건 말건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다시 매운탕을 끓여대기 시작하였다.

찌그러지고 시꺼먼 불 때가 여기저기 박혀있는 납작한 양은냄비가 이내 열을 받아들이고 끓기 시작하였다. 불쌍한 피라미들은 눈도 감지 못하고 뜨거운 냄비 바닥에 줄지어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니 갑자기 변훈이 작곡한 ‘명태’가 생각이 났다.

‘명태’는 오현명이 불러서 유명해진 가곡인데 작곡 당시 ‘그것도 노래냐?라는

비아냥을 무수히 받았던 설움 많은 노래이다.

     

변훈은 1926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는데 중학교 시절부터 노래 잘하는 수재라고 인정받았고 장차 음악가로서의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완강한 집안의 반대로 연세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평생 외교관으로 살았다. 그러나 음악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 없어 대학 재학 중에 작곡과 성악을 배우고 가곡 진달래꽃, 금잔디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명태'는 대구 피난 시절 양명문에게 시를 받아 작곡하고 친구인 오현명에 의해 초연되었으나 ‘그것은 노래도 아니다’는 혹평을 받자 작곡가의 길을 접고 외교관으로 전념하게 만든 곡이기도 하다. 변훈은 1952년부터 1981년까지 약 30여 년간 외교관으로 봉직하면서도 70여 곡의 가곡을 작곡하였는데 이전의 여성적이고 애상적인 한국가곡의 흐름을 벗어나 해학적 구성과 남성적 정서를 표현하여 현재는 한국적 리얼리즘 가곡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명태     

바리톤 오현명

검푸른 바다 밑에서

떼 지어 줄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 중략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이집트의 왕처럼 미라가 되었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 중략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쫘악 쫙 찢어져 내 몸이 없어질 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우 화~화~화~하~하~하!!  


한국의 대표적 바리톤 오현명이 낮고 굵직한 목소리로 명태를 부를 때 그 해학적인 가사와 함께 묘한 비 조화 속의 조화를 느꼈던 것은 비단 나뿐만의 느낌이 아니었을 것이다.

소주 한 병에 안주라고는 명태 쪼가리와 고추장이 전부였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

아마도 이 곡의 가사는 양영문 자신의 평소 일상의 소회를 피력한 것일 게다.

그는 평소 굳이 시어(詩語)를 만들거나 찾지도 않았고 글을 윤색하려 수사적 치장을 하지도 않았다.  

느끼는 그대로 직관적으로 세상을 바라 보았고 표현들은 군더더기 없이 일필휘지로 내지르는 직선형이다.

'명태' 역시 소주 한 잔 마시고 관조적 관점에서 명태를 의인화하고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었을까?

감각적이고 추상적인 모더니즘 사조가 세상을 관통하고 있던 당시의 예술 분위기에서

투박하고 직설적인 '명태'에 곡을 붙였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시도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쌩뚱망뚱한 명태의 가사에 대해 '그것도 노래냐?'라는 세간의 혹평은 전혀 억지스럽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이 '명태'라는 가곡을 이야기 할 때 언제나 오현명과 변훈만 부각이 된다는 점이다.

물론, 흩어져 나뒹글고 있던 '명태'라는 구슬을 꿰어 어엿한 상품으로 만들어 낸 것은 변훈과 오현명이다.

그러나 사실 '명태'라는 가곡의 리얼리티와 해학성은 대부분 가사에서 얻어진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뜨거운 냄비바닥에 누워있는 피라미는 애호박과 양파에 뒤섞여 있고 대파도 한주먹 얹어져 있다.

양념을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약간의 고추장 냄새가 배어 나오고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가 뽀글뽀글 끓어오르는 방울 속에 튕겨져 나온다.


- 지금 먹어도 되는디~

                  고려 담쟁이. 요즘 야생에서 보기 힘들다

주방의 누님이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듯 한마디 하신다. 뭐, 무신 맛이나 있을려고?

솔직히 우리 셋 모두 똑같은 생각이었던 듯 심드렁한 얼굴로 매운탕을 먹기 시작하였다.

일단 막걸리 한잔씩 입가심하고 얄포롬한 피라미 살점을 떼어 안주로 삼았다.

두 분은 아무런 말씀들이 없으시고 부지런히 피라미 해체작업에 몰두하고 계신다.

나를 포함한 세 사람 모두 별로 먹잘 것도 없고 뜯을 것도 없어보이는 피라미들을 앞접시에 옮겨놓고 열심히 젓가락으로 헤집고 있었던 것이다.


- 음, 다네.

- 네?

- 고기 맛이 달다고.


김박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형님 말씀에 동감을 표하였다.     

명태와 피라미를 비교하기는 좀 그렇지만,

어쨌건 하나의 생명으로 태어나 인간의 먹거리로 목숨을 바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명태나 피라미나 동일한 팔자소관이고 더 크게 보면 우주 질서의 축에 꿰인 체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어느덧 30여 마리의 피라미는 눈을 멀겋게 뜬 대가리와 몸통의 뼈만 잔해로 남긴 채 모두 사라졌다.

처음에 매운탕을 내왔을 때 도무지 먹을 수나 있을 것인지 의심스러웠던 생각과는 달리 양은냄비의 바닥을 긁는 아쉬움을 남기고 매운탕 잔치는 끝나 버린 것이다.


- 아따 그거 생각보다 무지 맛나네?

- 허 참, 피라미 요리를 이렇게 맛있게 먹어보기는 첨인 것 같습니다.

- 이. 하. 동. 문~

칠보천 모정 옆의 왕버드나무. 수고가 20m가 넘는다

참새가 황새걸음을 쫒아가기는 애시당초 어림 반 푼도 없는 것이고 아마추어 동네 바둑이 프로 기사의 반면 구상을 어림짐작도 못하는 것과 같이  30년 경력의 프로 요리사의 경험과 손맛을 의심한 우리는 내심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역시 강호는 넓고 사람들도 많고 내공 깊은 무림 고수들도 많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 것이다.

솔직히 우리는 식당 누님한테 괜스레 미안하고 송구하고 죄송스러웠다. 밥 3 공기와 막걸리 2병밖에 주문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잇! 벼룩도 낮빤대기가 있지!

어떻게 시골 식당이라고 뻔뻔하고 추접스럽게 적당히 눙쳐서 저녁밥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일말의 양심을 쿡! 쿡! 찔러대는 3인의 공감대가 도의적, 양심적,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

거 뭐시기냐...... 보편타당함은 물론, 공정거래 질서에도 위배된다는 생각을 동시에 가졌던 것이다.


- 누님, 여기 되야지 고기 한 접시 볶아줘요.


식당 누님이 흘끗 식탁을 쳐다보더니,


- 됐어, 그만들 자셔

- 아니, 뭐 그래도......

- 뭐, 아직 배가 안찼능가?

- 그래도 먄해서리.....

- 더 먹으면 살쪄.

- 사람이나 짐승이나 적당히 먹어야 건강혀~

- 아이 그래도 막걸리 한 병 더 주시고 고기 한 접시 볶아줘요!

- 됬당게, 미안해할 것도 쌨네!

- 아니, 무신 장사를 그렇게 한다요?

- 돈 많이 벌어놓았는 갑네?

- 아, 밥 먹고 막걸리 먹고 강냉이까지 먹었으면 되얏지 뭘 더 먹을라고 그려?

- 내가 봉게 맛나게들 자시더만......!


우리는 옥신각신도 아닌 사정을 하다가 결국 식당 누님의 단호하고도

추상같은 명령을 따르기로 결의하고 말았다.

지금은 누가 베어버린 마음이 짠~했던 오동나무

사실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마워서 그랬던 것이지 솔직히 음식을 더 먹을 생각은 크게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손님의 생각까지 짚어 주던 속 깊은 생각에 내심 적잖게 감동을 하였음은 물론이다.


- 누님 여기 계산!

- 20,000원만 줘

- 네?

- 잔소리 말고 20,000원만 내고 담에 또 와 잉?

- 아이고 내가 20년 만에 왔는데 언제 또 올 수

  있겠어요?

- 사람 인연은 몰라. 내일 또 올지 모레 또 올지.


식당 누님은 세상을 달관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나는 또 한 번 그런 누님의 볼에 테러를 가하고야 말았다.


- 쪽!

- 누님 잘 먹었어요.

- 또 올게요^^


누님은 눈을 흘기면서도 곰살맞은 내 뽀뽀가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딸도 같이 웃었다.  

   

대전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조금 넘었다.

아침에 칠보로 출발한 시간이 오전 11시쯤이니 하루의 절반쯤을 칠보 나들이에 사용한 셈이다.

녹작지근한 육신을 샤워로 닦아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형님은 피곤했는지 벌써 다랑다랑 코를 골며 주무신다.

    

이튿날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샛길로 빠졌다.

언젠가 스쳐 지나갔던 어떤 곳의 잔상이 망막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곳인지 정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아서 스마트폰 지도를 보고 대충 어림잡아 강줄기를 기점으로 기억에 남아있는 장소를 찾아갔다.

충북 옥천군 군북면 석호리.

청풍정 근처. 김옥균과 함께 은거하였던 기생 명월이 투신하였던 곳이다

스마트폰으로 일단 사진 한 방 박아서 위치정보를 찾아보면 정확하게 주소가 찍혀 나온다.

참말로 편리한 세상이 아닐 수 없다.

이 동네는 대청호 상류 쪽에 위치한 두메산골인데 위성사진을 보면 고구마같이 생긴 길쭉한 지형을 강줄기가

빙~ 둘러서 가는 반도의 형태이다. 인근에 대청호가 있어서 마을 앞의 강물은 마치 호수와 같이 넓고 깊다. 사전에 인지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마을 입구에 “淸風亭”이라는 안내판이 있어서 찾아가 봤다. 산밑 강변에 자그맣게 지은 정자인데 3분의 2는 마루이고 방은 2명이 겨우 기거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김옥균과 명월이 기거하였던 청풍정.

방문은 자물쇠로 잠가놔서 구멍이 뚫린 곳으로 들여다보니 한 사람도 그리 넉넉하지는 않은 공간이다. 청풍정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정변에 실패하고 명월이라는 기생과 은거했던 곳이다. 그러나 어느 날 기생 명월이 ‘님과 함께 소일하고 있던 세월이 일생에 영화를 누린 것 같이 행복했지만, 선생이 품은 큰 뜻에 누를 끼칠까 봐 몹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라는 짧은 유서를 남기고 절벽 아래로 투신하여 생을 마감해 버렸다. 아침에 일어난 김옥균이 시체를 거두어 장사를 치른 뒤 청풍정 아래 바위 절벽에 ‘명월암’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대청호로 인해 수몰되어버렸는지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청풍정 전경. 2명이 겨우 기거할 만큼 아담한 방과 장작불을 땔 수 있도록 가마솥과 아궁이가 설치되어 있다.

사진 몇 방 박고 휘~휘 둘러서 옥천군 청산면 하서리로 왔다.

낚시 가게에서 도깨비 낚시 몇 개 사면서 주인 아주머니한테

'이쁜 아줌마'라고 추켜 줬더니 2,000원 자리를 1,500원에 가져가란다.

그러면서 우수리 500원도 깎아 주신다.

그래서 7개나 사버렸다.

좌우지간 할머니나 아가씨나 이쁘다고 하면

하나같이 좋다고 하니 그것 참 돈 한 푼도 들지 않는 천하의 명약이 아닌가 싶다.     

하서리 너른 강변 옆에 차를 주차하고 채비를 챙겨 낚시를 시작하였다.

동서로 뻐~엉 뚫린 분지에 강물이 흘러가고 물살 속의 피라미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사실 내가 하는 낚시는 낚시라기보다는 물고기와 논다고 하는 것이 보다 사실에 가깝다.

고기를 잡기보다는 주변의 생태에 관심이 더 많고 식물의 분포를 살펴보는 것이 더 흥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서리 강에 내려가 보니 모래 퇴적물이 강바닥의 80%를 차지하고 있고

그 위로 달뿌리풀이 촘촘하게 뻗어 얽혀 있다.

강물이 휘돌아 가는 곳에 모래 퇴적물이 쌓여있는데 웬 놈이 그 속에서 꼬무락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손으로 파보니 주먹만 한 펄조개다.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큰 놈은 없고 전부 작은 것들 뿐이었다.

그래서 방생해줘 버렸다.

뭐 정글의 법칙도 아니고 먹을 것이 흔하고 쌔버렸는데 불쌍한 조개 한 마리 생포해서 뭐에다 쓸 것인가!     

좌우간 물에 들어왔으니 칼이라도 뽑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낚시에 먹이를 꿰고 채를 휘둘러 도깨비 낚시 봉을 강물에 던져 넣었다.


금새 반응이 온다.

툭!

투~두~둑!

그리고는 이내 낚싯대 끝이 후둑, 후둑 흔들리는 순간 냅다 채어 끌어올렸다.

낚싯줄에 매달린 놈은 피라미다.

아직 오후 햇볕이 따가운 하늘에서 은빛을 튕겨내며 파닥 거린다.

주둥이에 꽂힌 낚시를 빼니 피가 흘러나온다.

아이고!

을매나 아플까 잉?

아까징끼라도 발라줘야 하는디......!

먹이사슬의 상위에 있는 인간이 긍휼 한 마음으로 동정을 베푸는 것은 같은 생명체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가소롭고 웃기는 동정이며 위선이 아닐까?

뭐, 그래도 나는 즐겁다.

첫수가 기분 좋게 올라왔으니까.

이후 2마리의 베스를 잡고,

10여 마리 가량의 피라미와 1마리의 참마자를 잡았다.

6,000원에 구입한 고기 보관통이 제법 소란스럽다.

혹시 육식성인 베스가 피라미들을 포식하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모두가 같은 포로 신세라서 동병상련의 심정이 발동했는지 개체수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손을 넣어보니 피라미들이 난리를 친다.


-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 무슨 권리로 어권(魚權)을 침해하는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 헌법을 비롯한 모든 법률은 인간 이외의 생명체를 어떻게 하라는 조항은 없다는 거다. 굳이 있다면 '동물보호법'이 있는데 이 법률은 주로 반려동물에 관한 사항에 국한되어 있고 그나마 사육, 유통, 관리, 보호 등이 규정되어 있을 뿐이다. 축산법은 주로 소, 돼지, 닭 등의 경제동물에 관한 사항이고 수자원 보호법은 남획과 보호어종의 보호를 위한 법률이니 피라미가 목 터지게 떠들어봐야 아무런 소용 대가리가 없는 것이다.     

해는 뉘엿 넘어가면서 먼산 끄트머리를 잡고 매달려있다.

낚싯대를 접고 물에 젖어 찔떡거리는 신발도 털어내고 강변으로 나왔다.

그리고 고기 보관통 뚜껑을 열고 '요놈들을 어떻게 처리할꼬?' 고민하기 시작했다.

산채로 집에 가져갈까? 생각하니

승질 급한 피라미는 흔들리는 차속에서 필경 자살할 확률이 높고

배고픈 배스는 그런 피라미를 모두 삼켜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배를 따서 가져가자니 이 무더운 여름에 100% 부패할 것이고 그렇다면 무고한

생명만 작살내 버리는 것이니 그 업보가 필히 지옥행 점수를 누적시키는 것 같아서 그것도 마뜩지 않다.

또 한편으로는 도깨비 낚시, 낚싯줄, 고기 보관통, 떡밥 등을 구입한 비용 23,000원과

뙤약볕에 3시간 이상을 투자한 생각을 하니 아쉬움과 함께 판단이 쉽지 않았다.  


고기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참 예쁘다.

주둥이 큰 베스만 빼고......

요놈들은 우리나라 하천에 그 개체수가 가장 많은 종이다. 특히 요즘에는 산란철이라 수놈은 혼인색을 띄어 매우 아름답게 변모한다.

이 수놈을 우리는 '불거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기 어항을 놓을 때 암놈을 몇 마리 잡아넣으면 유난히 수놈이 많이 잡히는데 일종의 미인계이자 유인책인 셈이다.  

결론은 침입자이자 폭식가인 베스를 빼고 모두 방생이다.

배스는 그렇잖아도 미운털이 잔뜩 박혀 있는 놈이고 맛도 더럽게 없는 천덕꾸러기이다.

이 놈들은 우리나라 수자원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형을 집행하였다.

물에 피라미들을 풀어주니 잠시 멍~하더니 이내 총알같이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져 간다.

낚시에 꿰인 상처가 아프긴 하겠지만 그래도 새 삶을 찾은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 bye~

- 잘 가그레이~

다시는 눈앞에 어른거리는 낚시 바늘을 먹이로 혼동하여 물지는 말아라!

사람이건 짐승이건 물고기 건 생명 자체는 소중하고 귀한 것이니까!     

낚시채비를 수습하고 시계를 보니 오후 7시가 넘었다. 충북 옥천에서 서울까지 가려면 4시간은 잡아야 한다는 계산이 섰다. 금요일이기 때문이다.

평상시 같으면 2시간 30분가량 소요되는 거리인데 금요일 오후는 최소 1시간 이상 더 잡아야 한다는 것은 경험칙의 산물이다. 5일 근무가 법률로 규정된 이후부터 주말은 사실상 금요일 오후부터 시작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방에 일을 보고 귀경하는 수도권 차량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하서리에서 옥천 IC로 방향을 잡고 돌아 나오면서 정지용 생가를 지나쳐 왔다.

어차피 늦은 밤에나 서울에 도착할 것이기 때문에 까짓 20~30분 더 지척 인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평소 유일무이하게 애청하는 정글의 법칙 방영시간을 놓치는 것이 아쉽지만

나중에 TV 다시 보기를 하면 되지 않겠는가.  

   

향수(鄕愁)는 박인수와 이동원이 불러 유명해진 정지용을 대표하는 시(詩)다.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다듬어 표현하는 그의 시어(詩語)들은 향토적이고 서정적이며 시각적이고 청각적 연상이 바로 이루어질 만큼 탁월하다. 또한 현대시의 출발이 정지용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문단의 평가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만큼 당시의 예술사조에 부합하는 정신을 담고 있다. 옥천 IC를 거쳐 경부 고속도로에 오르면서 박인수. 이동원의 향수를 찾아들었다.


향수    

정지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빼기 황소가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중략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 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서리 까마귀......!

까마귀는 흔히 재수 없는 새라고 한다.

까마귀가 울면 누군가의 집에 초상이 난다는 속설 때문이다.


아마도 사체의 냄새를 본능적으로 인지하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까마귀에 대한 또 다른 속설은 제주도 신화 ‘차사본풀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염라대왕이 인간의 수명을 적은 적패지(赤牌旨)를 까마귀를 시켜 인간 세상에 전하도록 하였는데 적패지를 잃어버린 까마귀가 기억나는 대로 아무나 불러대는 통에 죽는 순서가 뒤바뀌었고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죽어갔다. 이때부터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전설이나 속설은 사람이 지어낸 것이어서 과장되거나 어이없는 터부(taboo)로 자리잡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오랜 경험과 관찰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터부를 은연중에 두려워하고 가급적이면 그 연결고리에 얽히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까마귀. 신령스러움과 불길함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까마귀가 재수 없는 새인지 어쩐지는 알 수 없지만 먹이 습성은 잡식성이다. 다만 알을 낳고 새끼를 부화시킬 때에는 주로 동물성 먹이를 섭취한다고 한다. 이 새는 월동지로 이동할 때를 제외하면 크게 뭉치지 않는 특성이 있다. 또한 무리를 이끄는 리더도 없어 각기 능력대로 도생하는데 기껏 뭉쳐봐야 4~5마리 정도이다. 이 때문에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샛길로 빠지는 것은 내 천성인지 습관성인지 돌출성인지 모르겠다.

서리 까마귀 어쩌고 저쩌고 하다가 또 샛길로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각설......

서리는 남의 곡식이나 과일을 몰래 훔쳐먹는 것이다.

배고프던 시절에는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상호 묵인하에 무시로 행하여지던 것이 서리였다.

대상도 특정한 것이 없다.

날보리, 수박, 참외, 자두, 복숭아 등 등......

그리고 가끔 닭도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빈번하면서도 관습처럼 내려오던 서리가 푸른 날보리를 불에 구워먹는 ‘보리 망종’이다.

망종은 24절기 중 아홉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이며 벼, 보리 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를 말하는데 이 망종을 앞둔 시기가 1년 중 가장 배고픈 ‘보리고개’에 해당되는 때이다. 이 시기는 쑥이나 소나무 껍질로 식량을 대신하기도 했었고 칡뿌리를 캐서 녹말을 추출하여 떡을 해먹기도 하였다. 보리가 생산되기 전까지 먹을 수 있는 거라면 그 어떤 것도 가릴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때쯤은 아직 잎이 푸르지만 보리 알갱이 속은 꽉 차게 여물어 수확을 한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 다만 아직 미성숙한 알갱이가 부분적으로 여물지 않아 수확량이 감소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은 급해도 보리가 누렇게 숙성 될 때 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이 시기의 보리 알갱이는 부드럽고 야들야들 하여 알멩이를 씹어보면 싱그런 풋내와 함께 하얀 녹말즙이 입안에 가득찬다. 또한 약간 비릿하지만 고소한 맛이 있어 배고픈 아이들은 보리 이삭을 통째로 씹어 녹말즙을 섭취하기도 했었다.

이 때는 너나할 것 없이 남의 보리를 2~3단 베어다가 불에 구워먹었는데 이 불법적 절도는 알면서도 모른척 하는 것이 관습이었고 이심전심으로 이해하고 넘어갔으며 이러한 전통적(?)이고 관습적 절도 행위를 '보리망종'  이라고 하였다. 즉, 말랑말랑하고 통통한 날보리를 베어다가 불에 그을려 익혀 먹거나 삶아서 먹기도 하는 관습적 서리를 '보리망종'이라고 했던 것이다. 또한 농사를 많이 짓거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청해서 보리를 한짐 베어다가 동네사람들한테 내어주고 같이 보리를 구워먹는 인심을 베풀기도 했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이웃들의 배고픔을 충분히 인식하고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푸른 날보리를 한웅큼씩 활활 타는 불에 던져 놓으면 줄기와 이파리는 모두 타버리고 이삭만 남는데 이 이삭을 손으로 싹싹 비벼 토실토실한 보리 알갱이만 분리해 낸다. 이렇게 추출해낸 보리를 그냥 먹기도 하고 죽으로 끓여먹기도 하였는데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선은 배가 고파서 맛이 있었을 테지만 먹거리가 풍부한 현시점에서 먹는다고 하더라도 틀림없고, 더 할 수 없이 맛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또 확신한다.

말랑말랑하고 통통한 날보리를 불에 구우면 우선 훈제가 되고 수분이 상당 부분 제거되어서 탱글탱글하고 톡! 톡! 터지는 식감이 끝내줄뿐더러 신선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구운 보리 알갱이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짐작도 하지 못 할 별미중의 별미였음을 매우 확신차게 확인 하노라!


보리망종, 즉, 날보리를 서리해서 먹은 사람들은 증거가 사방에 남아 시치미도 뗄 수 없는 것은 물론 거짓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불에 탄 이삭을 손으로 비비고 껍질을 까서 먹어야 했기 때문에 손과 입은 물론, 얼굴과 옷에도 시꺼먼 잿가루가 범벅되어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옛날에는 대부분 흰색 무명옷을 입었기 때문에 누구나 보리서리를 금방 알아챌 수 있었던 고로 사실상 공인된 절도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날보리 서리는 굳이 숨길 필요도 없었지만 부인한다고 해서 감춰지는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어쨌건 이러한 상황은 일부 부잣집을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이 해마다 공통적으로 겪던 연례행사와 같았기 때문에 보리 2~3단 정도는 누가 베어가도 크게 탓하지를 않았고 이 관습적 절도행위를 좋은 말로 ‘보리 망종’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전북 삼례의 보리 밭

까마귀가 ‘서리’를 하진 않았을 터다.

단지 생존본능으로 먹이를 찾았을 뿐이지만 인간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서리에 해당되는 셈이다. 사실 ‘서리’는 절도하고는 개념이 다르고 일종의 장난성 절도나 관습적 절도로서 절도는 분명 하나 훈계 정도로 용인되는 풍습이나 다름없다. 물론 요즘같이 이해의 경계선이 명확하고 이기적인 사회에서는 명백히 절도에 해당되지만 말이다. 누구나 어렵고 배고프던 시절 곡식 알갱이 하나라도 귀하기 짝이 없는데 애써 가꿔 놓은 작물을 조수(鳥獸)가 쪼아 먹거나 파헤쳐 놓으면 속상하다기 보다는 당장 식솔들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서리 까마귀’는 남의 것을 쪼아 먹고 까~악! 하고 낮은 지붕 위를 날아 지나가는 빈한한 두메산골을 서정적으로 시각화하고 청각화 한 詩人의 創意일 것이다.

김제 상리의 호밀 밭

또한 고된 일상에 짚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아버지와 재만 남은 화롯불을 뒤적거리며 식구들과 이야기 꽃을 피웠던 정겨웠던 기억들은 50대 이상의 사람들이 대부분 간직하고 있는 향수이자 정서의 근원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러한 기억이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각인되어 결코 소멸되지 않는 기억소자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식재 1년차의 연밭. 잡초들은 넓은 연잎에 햋볕을 빼앗겨 2년차에는 전부 소멸되어 버린다

서울로 가는 길은 천안 부근부터 정체를 반복하였다.

상행선도 그렇지만 하행선도 만만치 않다.

저 많은 차량들의 목적지는 어디였을까?

저 사람들이 귀소 할 둥지들은 어느 곳일까?

모두가 삶을 살아가기 위한 움직임 중의 한 과정이며 운명이라는 궤에 올라탄 중생들이라는 생각에

새삼스런 연민이 우러난다.  

   

가끔 종로와 청계천, 그리고 남대문과 명동을 나가보면,

정말로 인구밀도가 세계 최고라는 것을 실감하고 또 실감한다.

좌우지간 무슨 일이건 볼 일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꼬이는 것이겠지만 어깨가 부딪치고 발이 밟히는 것은

그저 예삿일과 다름 아니다.

그런데 밤만 되면 어느 구멍 속인지 모두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도시는 흡사 거대한 개미굴과 같다는 느낌이다.

나 역시 귀소본능을 가진 비둘기같이 내 집을 찾아 들어가고 있다.

마치 개미가 페르몬을 따라 굴을 찾아가듯이.

    

2016. 07. 30.     

이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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