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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Aug 30. 2016

中國黃山旅行

     조물주의 절차탁마 황산에 오르다

五岳歸來不看山 - 오악 귀래 불간산

오악에서 돌아오면 다른 산이 산으로 보이지 않고,

黃山歸來不看岳 - 황산 귀래 불간악

황산에서 돌아오면 오악이 산으로 보이지 않는다.


황산 관광은 後山, 前山 코스가 있는데 우리가 선택한 곳은 동쪽 코스이다.


1. 後山(동쪽 코스)

운곡사-백아령-시신봉-몽필생화-청량대-후자관해-배운정-서해대협곡-비래석-광명정-오어봉-백보운제-연화봉-영객송-반산사-자광각


2. 前山(남쪽코스)

자광각-옥병케이블카-옥병루-영객송-연화봉-백보운제-오어봉-광명정- 비래석-서해대협곡-배운정-후자관해-청량대-몽필생화-시신봉-백아령- 운곡사

황산관광도


중국 황산 여행


여행은 설레임이다.

그리고 호기심이다.

또한 즐거운 상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험과도 같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음식을 먹어보고 색다른 문화와 관습, 자연과 전통을 만나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곳에 쌓인 자연과 사람의 역사에서 우러나오는 갖가지 사실과 설화, 그리고 상이한 삶의 방식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 등을 비교 관찰하는 드문 기회이기도 하다. 더불어 자신을 되돌아보고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며 같은 지구인으로서의 동질감을 느껴보는 열린 마음을 함양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중국은 고래(古來)부터 우리나라와 직, 간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나라여서 여러 가지 상관관계가 엮이는 나라이다. 따라서 중국 여행은 눈으로 보는 여행 외에 역사적 애증 관계나 문화적 연관성을 알게 모르게 느끼는 것이 동남아나 구라파 여행과는 또 다른 점일 것이다.

황산 절벽의 소나무. 크지는 않지만 100살 가깝게 나이를 먹었다고 한다

中華人民共和國

중화(中華)는 중국(中國)과 화하(華夏)의 합성어이며 세계 지리적 중심부, 또는 문화의 중심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또한 한족의 민족 정체성과 문화적 우월성이라는 요소가 함께 녹아있는 함축성이 있다. 또한 중국인들 스스로 중화민족(中華民族)이라고 자긍 하는데 이것은 문화적 자부심과 민족적 동질의식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남한 면적의 약 97배(9,596,961㎢)에 달하는 광대 무비 한 중국 영토는 청조 때 확정된 것이며 그 규모는 현재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또한 1979년 마카오의 영토 획득과 홍콩의 반환, 그리고 사실상 중국에 편입되어버린 대만까지 중국 영토라고 포괄한다면 현재의 국가규모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광대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광대한 국토와 14억 명의 인적자원을 배경한 국력은 사실상 세계 최강의 국가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주족이 세운 청조는 300여 년의 태평성대를 누리다가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몰락했지만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지하고 있는 민족 구성과 영토 경계의 기본적인 틀은 이때 대부분 만들어졌다고 한다. 1911년 쑨원(孫文)에 의한 신해혁명 이후 한족 중심으로 정권이 수립되고 마오쩌둥과 인민해방군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1949년)하였으나 국가 통치체계는 한족을 중심으로 55개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정책으로 재편되었다. 중국 인민이 채택한 중화(中華)라는 틀 안에서 자연스럽게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이 공동 구성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만리장성

이러한 결과는 中華的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91.5%에 달하는 절대다수의 한족 입장에서 안정적인 국가운영 및 국토 유지에 필수 불가결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또한 다민족 구성원이 주체가 되어 축적된 중국문화의 우월성에 대한 미래적 통찰과 혜안이 中華國家를 지향한 근본적 이유라고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얻어진  경험을 통해 한족의 자기 동질성이라는 강고한 보수적 입장에서 다민족의 화해와 통일이란 개념으로 확장시킨 것이다.     


중국의 소수민족 복식과 장식. 각기 독특한 특징과 아름다움이 있다

중국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느껴지는 감상은 광대한 국토와 자연환경, 그리고 다양한 민족들이 보유하고 있는 색다르고 독특한 문화의 경이로움과 신기함이다. 깜짝 놀랄 정도로 예측키 어려운 발상들에 의한 문화적 소산물들이 끝없이 나타나고 또 발견되기 때문이다. 종래에는 각 민족들만의 한정된 문화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특별하고 노출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갈구하는 세상에서 향후 중국의 강력한 문화 경쟁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원천적 저작권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즉, 한족 중심 정권에서 다민족 국가경영이라는 개념으로 통치 방법으로 전환한 것은 소수민족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중요한 미래 자산가치 중의 하나로 분류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추론해 본다.

     

5년 만에 다시 가 본 중국의 모습은 여전히 계층 간, 지역 간 편차가 심하고 도시의 구성과 정비에서도 부족한 면이 적지 않음을 여러 곳에서 발견하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5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발전되고 변모된 또 다른 중국의 모습들은 상당한 충격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李珍)가 재밋거리로 알려준 우스갯소리가 ‘차이나’이다. 그러나 이 우스갯소리를 단순한 농담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현재 중국의 도농 간, 지역 간 차이와 계층 간 소득격차를 중국의 영문 표기명에 빗대어 한마디로 함축한 것이나 다름없다 는 생각이다. 물론, 우리말의 ‘차이나’의 의미를 중국인들이 그대로 이해하고 공감하지는 못 할 것이다. 하지만 ‘族’의 구분을 하지 않고 중국 국민이라는 테두리에 넣고 생각해보면 대다수 사람들에게 동일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오늘날 중국 사회에 잠재된 불평등에 대한 욕구불만은 중국 정부가 해결해야 할 최대 난제 중의 하나이며 일당독재의 통치체계를 위협할 시한폭탄과 다름없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그러나 단 시일 내에 경제성장을 이룬 中國이 北歐 형태의 사회복지 제도나 소득분배 정책을 시행하기는 현실적으로 매우 지난한 문제이다. 그것은 중국의 사회 시스템이 여전히 후진적이고 강력한 계급사회로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지배층들의 기득 권을 상당 부분 양보받아야 하고 당사자들 역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사회 공헌 의식을 갖춰야 하는 전제가 필수적이지만 중국인들의 평균적 민도는 그것을 포용할 공간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돈이 가져다주는 권력과 향락의 달콤함에 아편처럼 중독되어 버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머드처럼 커진 중국의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다. 잠재된 문제가 산처럼 쌓여가지만 민초들의 의식은 하루가 다르게 깨어 나간다. 그래서 중국의 爲政者들은 두렵다. 인간이 가진 욕구의 해소가 정권의 흥망성쇠를 좌우한다는 동서고금의 역사가 주는 교훈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자금성

이러한 잠재적 사회문제에 대한 중국 정부의 예방주사는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강력한 단속과 처벌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한 후유증은 내수경제 위축으로 인한 경제성장률 저하라는 또 다른 문제에 당면하고 있다고 한다. 나라가 크니 뇌물이나 부정으로 인한 문제가 경제에 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는데 그 뇌물과 부정부패로 인하여 유발되는 물동량과 금액이 얼마나 될지 小國의 사람은 심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일행 13명은 중국의 국제 교역도시 상해 푸동 공항에 무사하게 도착하였다.

빗방울이 투~두~둑! 떨어지는 우중충한 날씨에 22인승 버스에 올라타고 5층 회전 고가도로를 주~욱 돌아 룽빠이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조선족 부부가 운영하는 중, 한식 겸용 식당이며 식당 이름 은 금수강산이란다. 음식은 중, 한 절충식 매운탕과 김치, 그리고 여러 가지 채반 요리가 나왔다. 잡식 성향인 내 식성은 별 거부감 없이 이것저것 아구아구 먹어치웠다.


그러나 일행 중 일부는 중국 특유의 향채 냄새와 기름 냄새에 역겨워하고 약간 꼬질한 상차림에 식 흥이 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각 나라, 지역마다 식재료와 양념이 다르고 오랜 세월 동안 자신들의 환경과 입맛에 맞춰 선택된 조리법이므로 당연히 인정하고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의 마늘 역시 향채에 해당하고 김치나 된장도 외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 아니던가!

남들이야 어떤 식사를 했건 나는 맛나게 점심을 먹고 22인승 리무진 버스를 타고 항주로 향하였다.


그런데 고속도로변에 끝도 없이 늘어선 주택들은 하나같이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벽돌로 지은 2~3층 건물이 대부분이었는데 예외 없이 지붕에 쇠로 만든 첨탑이 솟아 있었고 아래엔 둥글거나 6 각형 형태의 공간이 설치되어 있었다. 생경한 모습이어서 가이드 에게 물었더니 조상의 유골을 모신 일종의 납골당이란다. 처음에는 저장성 원주민들의 장례 관습인 줄 알았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1956년 모택동이 이끄는 혁명정부가 火葬을 법률로 정하고 시신을 관에 넣어 매장하는 토장 제도를 금지시켜서 자신의 집에 조상의 유골을 모시기 위한 시설이라고 하였다. 장묘문화혁명을 위한 입법 이유는 전 세계 인구 중 20%를 차지하는 중국인들이 경작할 수 있는 땅은 국토의 7%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인민을 먹여 살리기 위한 혁명정부의 중대한 결단이었다고 한다.

지붕에 납골당을 설치한 저장성 주택

당시 중국의 묘지 면적은 103,000㎢(남한 면적 99,000㎢)에 달하고 매년 확장되는 추세여서 토장 문화를 없애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밖에 없었던 혁명정부의 결단은 매우 현실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법률에 따라 중국의 지도층은 솔선수범으로 화장을 선택하였는데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자신의 유해를 화장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고 유언에 따라 유골을 비행기에서 뿌렸다고 한다.

    

중국의 연평균 사망자는 약 960 여 만 명.

이 사망자들을 중국인의 오랜 관습대로 매장하려면 매년 엄청난 면적의 경작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당시에도 심각했던 식량난을 우려한 혁명정부가 강력한 법률로 규제한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장 문화가 100% 사라진 것은 아니다. 도시는 90% 이상 법률을 따르지만 시설이 부족하거나 매장을 전통으로 고수하는 농촌에서는 여전히 토장 문화가 살아있다고 한다. 이러한 법률 제정의 근본적 배경은 중국의 위민 정책에 상당한 이유가 존재한다. 예로부터 중국 지도자들은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처럼 섬긴다(民以食爲天)'라는 이념적 통설을 중시하고 먹는 것을 기본으로 통치이념을 설정했다고 한다. 따라서 역대 통치자들 어떻게 백성들을 먹일 것인가에  골몰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먹는 것만 해결해도 태평성대라고 칭송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식량 확보는 어떤 사안보다 우선 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 천 년 중국 역사에서 백성들의 먹거리를 완전히 해결한 왕조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토장 문화 금지로 인한 남한 면적 이상의 경작지 확보는 결국 수 천 년 동안의 중국 통치자 들의 경험을 살폈기 때문이며 혁명정부의 주요한 미래설계이자 또 하나의 혁명이 었다는 생각이다. 참고로 1983년에 발행된 <중국 연감>에 의하면 1959년에서 1961년까지 3년간 진행되었던 대약진 운동이 실패함으로써 당시 한국 인구에 해당하는 2천4백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중국 지도자들의 먹거리 확보는 가장 중요한 통치수단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몰라도 중국 사람들의 먹는 것에 대한 선호와 집착은 대단히 강하다. 흔히들 한국 사람들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의·식·주 세 가지를 꼽는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식(食)을 가장 우선적으로 꼽는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먹는 것 외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일반상식으로 알려졌을 정도이다. 사실 넉넉한 부자라 할지라도 외관에 크게 치중하지 않는 것은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삶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겉치장이나 집의 모습만을 가지 고 그들의 빈부를 따지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것도 없단다. 물론 근자에는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공유나 여행의 자유화로 인한 영향으로 점차 중국인들의 식습관이나 패션 등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한 변화의 모습은 이번 여행지 중 특히 상해에서 많이 느꼈는데 난징루에서 만나는 중국인들의 표정과 패션 등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세련된 차림이 많았다. 그래서 통설은 바뀌기 마련이고 관습은 환경과 여건에 따라 바뀌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중국 고속도로 속도 표지판

상해에서 항주까지는 약 200km.

22인승 중국산 리무진 버스는 고속도로를 준 고속도로처럼 느그적 거리며 달린다. 쇽업쇼바는 녹슬었는지 망가졌는지 요철구간을 지날 때마다 삐거덕거려 뒤에 앉은 사람들의 청각과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는 속도제한 표지엔 승용차 100km, 버스 90km여서 우리나라 고속도로와 비교하면 체감상 상당히 느리게 느껴진다. 어쩄거나 중국산 고급 리무진 버스는 고속도로를 중속 90km로 느긋하게 달려간다. 길가에 무수하게 도열한 벽돌집 지붕에 얹어진 첨탑과 납골당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어받은 전통과 관습은 쉽게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또한 아무리 문화혁명을 하고 토장 문화를 법률로 규제한다고 하더라도 수 천 년을 이어온 조상 모시기 전통과 관습은 법률로 묶고 강제한다고 깡그리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나름 지루하여 음악을 들었다.

음악은 내 삶의 주요 영양소로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도록 항상 휴대하고 다닌다.

듣는 음악 장르 역시 매우 다양하다.

클래식을 중심으로 재즈, 팝, 라이트 뮤직, 댄스 뮤직, 전통음악, 어스 뮤직 등 가리는 것은 거의 없는 잡식이다. 그리고 흘러간 가요도 가끔은 듣는 편이다. 일부 사람들이 ‘뽕짝’이라고 천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음악이 가지는 장르별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종의 편견과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다. 음악이 정신적 위안과 휴식, 또는 정서의 함양 등의 목적으로 존재하지만 또 다른 일면으로는 시대상을 대변하기도 하여 당시 사람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가치관을 살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 칼라스(1923~ 1977)

노르마를 골랐다.

오페라의 영원한 프리마돈나 마리아 칼라스의 비장하고 회한에 찬 목소리가 귓속으로 울려 들어와 머리를 적시고 가슴으로 내려와 촉촉하게 스며들어 온다. '신이시여! 죄 많은 저를 용서하소서!'라고 외치고 스스로를 화형에 처하는 노르마의 슬픈 외침은 마리아 칼라스를 제외한 그 어느 누구도 역할을 대신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점령군 총독 폴리오네 역을 맡은 당대 최고의 테너 프랑코 코렐리의 호연도 노르마 성공의 한 축을 담당한다. 하지만 4옥타브를 넘나드는 마리아 칼라스의 목소리와 호소력은 그러한 당대의 테너마저도 한낱 조연에 머물게 할 정도로 독보적이다.


전율할 만큼 강력한 카리스마는 벨리니가 의도하고 요구했던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못나고 뚱뚱했던 그리스 처녀 마리아 칼라스가 너무 난해하여 아무도 연주에 도전하지 않던 노르마를 성공시키면서 노르마는 곧 마리아 칼라스이고 마리아 칼라스는 노르마라는 동의어로 인식되는 절대가치의 전설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 한 곡의 성공으로 마리아 칼라스는 오페라 역사상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프리마돈나 중의 프리마돈나로 기억되고 사후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가슴에 존재하여 끝없는 그리움을 유발하고 있다.                                                


이 노르마로 인해 마리아 칼라스는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지만 사랑에는 실패하고 결국 노르마와 같은 슬픈 운명으로 우리 곁을 떠나가고 만다.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와의 치열하고 열렬했던 사랑은 재클린 케네디라는 연적으로 인해 버림을 받고 파리 교외의 아파트에서 회한을 남긴 채 쓸쓸히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 칼라스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의 소설이며 운명적 사랑을 잃고 스스로를 화형에 처하는 노르마와 흡사하다. 사랑의 전쟁에서 패배한 마리아 칼라스의 인생은 한순간에 시들고 사그라든 꽃이 되어버린 것이다. 훗날 오나시스가 임종을 맞으면서 마지막까지 손에 꼭 쥐고 있었던 것은 마리아 칼라스가 선물했던 빨간색 머플러였다. 그리고 그가 실제로 사랑한 사람은 재키가 아니고 마리아 칼라스였다는 것이 우리를 더욱 안타깝게 한다. 오나시스는 사랑으로 재키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미합중국 퍼스트레이디라는 배경과 명예를 탐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빈센쵸 벨리니(1801-1835)

그래서 이 곡을 들으면 슬프고 가슴이 저린다.

노르마는 빈첸초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가 작곡하고 주디타 파스타(노르마)와 줄리아 그리시(아달 지사)가 초연하여 유럽에서 비교적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벨칸토 창법 중에서도 초고난도에 속하는 멜리스마 - 콜로라투라를 능숙하게 소화할 성악가가 매우 드믈었기 때문에 당시의 여성 성악가들이 벨리니가 의도한 수준까지 연주를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많은 기록들이나 정황에 비추어 보면 마리아 칼라스 이전에 진정한 의미의 성공적인 노르마 연주는 없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시의 성악적 기교로는 연주가 불가능할 정도의 난곡이었던 탓에 대부분 도전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마리아 칼라스가 연주한 이후 누구도 이 곡을 성공적으로 연주한 성악가가 없다. 그것은 마리아 칼라스의 노르마가 워낙 압도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노르마가 가진 극적인 요소를 연주할 목소리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리아 칼라스 이후 노르마 역을 소화한 소프라노들은 마리아 말리브란, 릴리 레만, 로자 폰셀,  몽세라 카바예, 조안 서덜랜드 등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마리아 칼라스의 빛나는 성채에 근접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 공인된 사실이다. 영화감독이자 오페라 연출가인 프랑코 제피렐리는 ‘노르마 역으로 칼라스는 오페라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노르마의 마리아 칼라스는 압도적이며 위대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는 그리스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뉴욕으로 이주하고 성장하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마리아 칼라스의 음악을 들으면 또 하나의 그리스 여인 나나 무수쿠리가 연상되고 연결된다. 나나 무수쿠리 역시 그리스에서 태어나고 뉴욕으로 건너와 퀸시 존스를 만난 것을 계기로 음악을 꽃피웠기 때문에 마리아 칼라스와 음악적 인생 여정이 흡사하다. 나나 무수쿠리는 우리 모두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가수이며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음반 판매 기록을 가지고 있는 전설적인 여성 가수이다. 또한 그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흠잡을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우리가 나나 무수쿠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음악과 인생이 배경 되기도 하지만 그녀의 조국 그리스와 우리나라는 반도인의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어 정서적 친근감을 알게 모르게 느끼기 때문 일 것이다.     

그리스는 유럽 문명의 발상지이지만 동과 서를 잇는 접점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동서교역의 거점이 된 곳이다. 따라서 그리스 음악에는 오리엔탈 문화가 자연스럽게 접목되어 선율과 색채에 동양적인 요소가 적잖게 함유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전체적 흐름에서 우리의 정서와 큰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또한 반도인들이 가지는 정서적 특성과 오랜 기간 외세의 침략과 간섭에 시달렸던 일종의 恨의 감정이 우리가 표출하는 음악적 아이덴티티와 상당 부분 흡사하기도 하다.     

이번 여행에 동행한 두 아줌마들은 무슨 수다거리가 그리 많은지 끊임없이 얘기하고 소곤거린다. 동시대적 사회문화를 겪어온 연령대라 당연히 올드팝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어폰을 건네주었다.

물론 나나 무스쿠리 앨범을 선택하고서......!

나나무스쿠리

한참 뒤에 컬러풀 아줌마가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린다.   - 이 사장니~임! Try to remember 아시죠?

- 아! 네, 그럼요^^     

사실 가사도 대충 외고 있다.

워낙 명곡 아니던가!

사랑타령으로 일관하는 가요에 비해 Try to Remember의 가사는 서정시에 가깝다.

지난날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감상은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Try to remember가 주는 감동은 공통적이며 정서적 공유에 제한이 없다.

그리고 먼 훗날 우리는 Try to remember the kind of September가 아니라

Try to remember the kind of March or April을 회상하고 찾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追億이라는 기억소자를 우리 모두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옛적 기억을 되살려 보면, 힘들거나 괴로웠던 일 보다도 즐겁고 유쾌한 기억이 훨씬 많이 남아 있어 흘러간 시절과 공간을 그리워하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추억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추억이라고 하는 녀석은 희한하게도 일종의 Negative 필터 역할을 하는지 그 많고 많은 사연들 중에 대부분 재미있고 아련한 기억만 걸러 남겨놓는다. 이번 황산 여행 역시 그 추억이란 놈이 어디엔가 가만히 숨어 있다가 먼 훗날 늘어진 테이프 돌아가듯 황산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西湖 관광   

  

상해에서 2시간 40분을 달려 항주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중국 10경 중 3번째에 해당한다는 西湖로 달려갔다. 일정표에는 본래 29일 오전이었는데 비가 올 것이라는 기상예보 때문에 일정을 바꾼 것이다. 어차피 짜인 일정에서 어떤 것을 먼저 보든 무신 상관이 있겠냐만은......

춘삼월이라 그런지 도로변에 수많은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있고 인파는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하지만 서호에 대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찬탄과 헌시에 배경 된 그 모습들이 상당 부분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나는 그다지 흥미가 유발되지 않았다. 그것은 인위적 단장과 조경을 좋아하지 않는 개인적인 취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단체여행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동파의 시가 기념품 상점 유리에 장식되어 있다

또한 백거이나 소동파 등의 흔적이 묻어있던 자욱들은 이미 옛날 옛적에 닳아져 버리고 오로지 무수한 인파들의 왁자지껄이는 소음만 가득하여 내심 낭만적 분위기와 회고적 감상을 기대했던 생각은 하늘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서호에 침잠되어 쌓여있는 수많은 역사와 설화에 얽힌 옛 흔적에 대한 흥미와 기대도 운무 속의 나룻배처럼 내 가슴에서 희미하게 사라져 버렸다.     

어쨌거나 우리 일행은 그 유명하다는 서호 유람에 나섰다.

서호는 원래 전당강(錢塘江)과 연결된 해안의 포구였는데, 진흙과 모래로 막히면서 육지의 인공호수로 조성된 곳이다. 유람에 할당된 공간은 대략 1 시간 남짓이다.


서호 풍경. 멀리 뇌봉탑이 보인다

전체 면적은 6.3㎢,

우리나라 평수로 따지면 약 20,000여 평 정도이다.

배를 타고 바라보는 풍경은 그저 평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중국 10경이라는 세간의 평가는 어디를, 무엇을 기준한 것이었던가!

물 또한 탁도가 높은 녹회색으로 청량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은 수 천 년의 역사와 연륜이 쌓여있는 서호의 극히 일부분만 짧은 시간에 훑어본 느낌이어서 나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일치할 것이라고는 고집하지 못한다. 다만 서호에 대한 상세한 가이드를 받지 못해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었으며 서호 경관을 이루는 고산(孤山), 백제(白堤)· 소제(蘇堤), 외호(外湖), 북리호(北里湖), 서리호(西里湖), 악호(岳湖), 남호(南湖) 등은 물론, 그 수많다던 정자와 다리 등은 거의 보지 못했거나 내력도 모른 채 지나쳐 버렸다. 단순한 물 구경과 산구경에 불과했을 뿐이다.     

역사와 문학에서 그토록 많이 언급되고 문인들의 詩想에 모티브를 제공했다던 西湖의 一見에 대한 느낌은 그렇다 치고 우리는 西湖 주변에 조성된 공원을 돌아보았다.

솔직한 느낌은 유람선을 타고 서호를 돌아본 것보다 훨씬 볼 것도 많았고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었다.

아열대에 가까운 항주의 기후 때문인지 식물 분포가 무척 다양하였고 생장환경 또한 양호하여 다양한 식물들이 식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물에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향후 이 식물분포 때문이라도 항주를 다시 한번 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것에 관심 많은 나는 누구 말대로 참 피곤하게 사는 사람임을 나 스스로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西湖는 중국 十景에 포함되는 절경지 중 3번째로 꼽히는 곳이어서 사실 기대가 매우 컸었다.

하지만 서호에 얽히고 쌓인 역사와 배경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일부의 느낌만을 근거로 서호 유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하니 솔직히 궁색하기는 하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이곳에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인정한 중국 10경 중 3 경인 서호의 참다운 가치를 찾아내 필히 공감해 볼 것이다.     

中國十景이란 ①만리장성 ②계림 산수 ③항주 서호 ④피서산장 ⑤자금성 ⑥소주 원림(정원) ⑦ 황산 ⑧장강삼협 ⑨대만 일월담 ⑩진릉병마용 이라고 한다.   


나는 비교적 중국을 많이 다녀 본 일반일 중 한 명일 것이다.

대략 수십 번을 다녀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중국 十景중 5개는 이번 여행을 포함하여 다녀왔으니 十景에서 절반을 구경한 셈이다.

그러나 남한 땅 100배에 가까운 중국 대륙에 담겨있는 그 수많은 유적과 자연과 문화를 어찌 十景만으로 대변할 수 있겠는가! 사실 나 개인이 추구하는 여행의 참 재미는 자연과 문화이 다. 따라서 거창하고 화려한 경관이나 유적도 중요하지만 수 천 만년, 수 억년에 걸쳐 쌓인 인간의 역사와 조물주가 창조한 自然 그대로를 느끼는 감동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또한 각 종족들의 주거문화나 복식, 또는 공예품이나 음식 등을 경험하는 것이 여행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 같은 관심은 같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문화와 자연을 접하고 경험하는 것이 나 자신이 추구하는 여행의 가치관과 맞물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지역은 雲南, 四川 지역이며 내가 가본 곳 중 하나가 리장(麗江)이란 곳이다. 이곳은 2번이나 다녀왔음에도 여전한 그리움과 설레임이 있다. 그 이유는 다양한 고산식물과 싱그럽기 이를 데 없는 풀과 나무들, 그리고 태곳적 자연과 소수민족 문화가 소설 속의 理想鄕처럼 살아있기 때문이다.   

리장 흑룡담. 옥룡설산에서 내려 온 물은 여강고성으로 흘러 나간다

이곳은 나시족과 이족 등 4개 소수민족의 자치구로 지정되어 있는데 세계 각국의 여행객들이 몰려들면서 점차 상업화로 물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또한 중국 어디나 그렇듯이 이곳 역시 대부분의 상권을 漢族이 장악하면서 소수민족 문화가 하나, 둘씩 사라져 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나시족의 고유 문자인 동파문자(東巴文子)인데 일종의 상형문자(象形文字)이다. 이 문자는 사전적 의미가 ‘사물(事物)을 본떠 그 사물이나 그것에

관련 있는 관념을 나타낸 문자,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 문자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매우 신기하기도 하고 마치 古代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나시족 동파문자

그러나 이 동파 문자도 헝겊에 물 스며들 듯 적셔 들어오는 한족 문화가 대세를 이루면서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문화 멸실의 사례가 되어 가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이야기가 잠시 빗나갔지만 여행을 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즐겁다’라는 수식어로 단순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방법은 수천수만 가지가 있을 터이고 또한 목적하는 객관적 사실과 관념적 사고가 각기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나와 비슷한 종족들은 여행을 포함한 모든 사물과 사실들에 대한 호기심이 많다. 따라서 뭔가를 분석하고 꺼내 확인해 보려는 일종의 지식 결핍 증후군에 빠져 있는 인간들이어서 객관성과 관념성을 동시에 충족하려는 호기심이 충만하다. 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남들이 귀찮아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남들이 술 마시고 노는 시간에도 열심히 메모하고 사고하고 인터넷을 뒤져댄다. 하지만 어쩌랴? 본래 태생이 그렇고 추구하는 가치관이 다른걸......!   

서호 유람선

서호 구경을 마치고 저녁 만찬을 하러 간단다.

그런데 내 발걸음은 도저히 일행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 이유는 서호 주변의 자연과 식물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것 쳐다보느라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버스 주차장까지 상당한 거리를 걸어가야 하는 내내 나는 사람들의 꼬랑댕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눈과 발과 손을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때도 내 눈의 초점은 어김없이 빨주노초파남보 아줌마를 찾는다.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 속에서도 그 원색적이고 화려한 표지는 유독 눈에 띄었기 때문에.    

서호 주변 공원. 식생이 양호하고 풍부하였다

항주는 나무가 참 많더라.

나는 그것이 너무 좋았다.

수 천 년의 역사와 14명의 왕과 문학과 화단의 위대한 예술가들을 배출한 항주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감춰졌거나 내재된 문화가 수십, 수백 배 많을 것이다. 또한 이곳은 다습하고 온화한 기후로 인하여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였고 경제적 풍요로움은 수많은 문인과 화가가 배출되었던 요인이다. 또 하나, 항주는 예로부터 미인의 고장으로 유명한 곳이고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인 서시(西施)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산과 강, 그리고 바다를 인접한 비옥한 땅에서 생산되는 각종 산물이 풍부하여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었다는 점과 항주 名産 龍井茶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중국의 전설적인 네 명의 미인은 양귀비, 초선, 황소군, 서시를 꼽는다.

그러나 4대 미인 모두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여인들로서 부풀리기 좋아하는 중국인들이 만든 일종의 우상화라는 설도 있다. 서시는 비쩍 마른 가냘픈 몸매였다고 하며 양귀비는 오늘날 기준으로는 비만에 가까운 풍만한 육체였다고 하니 미인의 기준도 시대에 따라 다르고 권력이 가지는 힘과 비례하여 평가되는 것은 아닐까?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항주의 미인 서시

참고로 중국 4대 미녀에 관련된 전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침어(浸魚)는 춘추시대 월나라의 미인 서시(西施)를 지칭한 것으로, 서시가 호수에 얼굴을 비추니 물고기들이 넋을 잃고 헤엄치는 것을 잊어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단다. 뭐, 물고기가 물속에 가라앉아봤자 다시 헤엄치면 그만일 테지만......?

낙안(落雁)은 한나라의 왕소군(王昭君)을 지칭하며, 기러기가 하늘을 날아가다 왕소군을 보고 날갯짓하는 것을 잊어 추락하여 붙여졌다고 하는데 이것도 화살이나 벼락을 맞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날아오르면 그만일 테고......!

폐월(閉月)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여인 초선(貂蟬)을 지칭하며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고 하며 수화(羞花)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주인공이기도 한 당나라의 미인 양귀비(楊貴妃)의 별칭으로 '꽃들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는 내용이다.

......!


傳說은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니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지만 과장의 정도를 넘어 거의 우상화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항주는 중국 7대 고도(100년 이상 성도로 유지된 도시)이고 중국인들이 평소 지상낙원으로 선망하였다고 하며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 내려온다.

     

- 하늘에 천당이 있다면 땅에는 항주, 소주가 있다 -

     

그래도 西湖를 다녀가면서 蘇東坡는 기억해야겠기에 그의 詩 한수를 첨부한다.  

   

水光曄 晴方好/물빛이 빛나고 맑으니 마침 좋고

山色空濠雨亦奇/비 오는 모습과 어우러진 산색이 또한 기이하네.

浴把西湖比西子/서호를 서시에게 비교한다면

淡粧濃抹總相宣/옅은 화장이나 짙은 화장이나 모두 아름답구나.

    

송성가무쇼 (宋城歌舞表演)


세계 3대 쇼란다.

무엇 때문에 세계 3대 쇼로 꼽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사람들은 엄청나게 몰려들고 관람석 열기도 뜨겁다. 또한 공연 중간쯤 한국 관광객들을 위한 서비스인지 장구 군무도 나온다. 내용은 중국 위인 설화를 바탕으로 군무와 서커스를 결합한 복합적 무대 연출이다. 밑에서 솟아 나오는 부상 무대와 공중에서 내려오는 하강 장치를 이용해 스케일이 큰 무대가 전개되었는데 300여 명에 달하는 배우들이 연기한단다.

송성가무쇼

한마디로 요란하다.

그리고 중국스럽다.

열광하는 관중도 많았지만 나는 한편의 게임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아 감동은커녕 지루해서 뒈질 뻔했다.

그러한 취향은 역시나 순전히 나의 개인적 성향이자 성격 탓인지도 모른다. 원래부터 번잡하고 왁자지껄하고 과장된 것을 싫어해서 사람의 원초적 감정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클럽이나 공연장을 별로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오랫동안 서양 고전음악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흔히 클래식 음악이라고 통칭하는 서양 고전 음악은 그 시초의 발단이 구약성서의 ‘시편’이었고 근래까지 기독교 철학이 근원적 요소로 작용한다. 그래서 바로크, 고전, 낭만파, 국민음악 파는 물론, 20세기에 이르는 근, 현대음악까지 기독교적 요소는 여전히 함유량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 음악을 장기간 들어왔던 사람들은 대부분 ‘쇼’ 형식의 무대공연을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본시 음악의 근본적 개념은 악음(樂音)에 한정되므로 소음(騷音)에 가까운 쇼의 효과음은 오랜 시간 악음(樂音)으로 길들여진 청각이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음악의 태동은 발생적으로 문예(文藝)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그 형태는 시(詩)로부터 연유하고 있다. 시(詩)는 정신생활이나 자연, 사회의 여러 현상에서 느낀 감동 및 생각을 운율을 지닌 간결한 언어로 나타낸 문학 형태인데 시(詩)를 읊으면 자연스럽게 운율이 생기고 리듬이 생성된다. 그것을 다양한 형태로 읊거나 표현하는 방식이 음악으로 발전하였고 생활도구나 기타 사물로 만들어진 소리 나는 기구가 발전한 것이 악기이다. 이것이 사람의 목소리와 결합하기도 하고 악기끼리 합주하여 생성된 것이 오늘날의 음악 형태인 것이다.  

                                베토벤(1770~1828)                                                      

송성가무쇼는 번쩍거리는 조명과 화려한 의상 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던 하나의 해프닝과 다름없었다는 소회이다. 특히 요란뻑적지근한 무대시설과 번쩍거리는 조명은 그렇다고 쳐도 음향시설과 운용은 완전히 꽝!이었다. 스피커의 배치를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저음이 과도하게 난발하였고 각종 효과음과 벽에 부딪쳐 난반사된 소리들이 충돌하고 섞여서 귀를 매우 피곤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수준의 문제이다.

한 번의 공연에서 1억 원씩 벌어들이고 세계 3대 쇼라는 자부심이라면 음향시설을 대폭 개선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순전히 공연 책임자의 무지이거나 무식의 소치일 것이다. 한마디로 그렇다.


또한 주인공이라는 악비장군을 우리가 알아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을뿐더러 더군다나 줄거리도 모르는데 무슨 흥미가 유발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공연 도중에 나와 버렸다.

그 어떤 흥미나 의미를 느낄 수 없는 공연을 보고 듣느니 차라리 주변 풍경이나 찍는 것이 훨씬 실속 있는 행위라는 생각에서.


극장 밖으로 나오니 흡사 싸구려 약장수 굿판에서 해방된 느낌이다. 또한 수 천 명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갖 잡탕 냄새에서 벗어나니 들이키는 공기부터가 신선하여 기분부터가 상쾌하다. 주변은 온통 크고 작은 홍등과 조명으로 휘황찬란하다. 사실 매번 중국에 올 때마다 의아스러웠던 것 중 하나는 고질적인 에너지 부족 국가인 중국의 도시 어디를 가나 모두 야간 조명이 휘황찬란하게 밤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계림도 그렇고 상해도 그렇고 북경도 그렇고 항주 역시 그렇다.

이것도 하나의 문화인가 싶었다.

송성가무쇼 극장 밖 야경

여행 첫날의 일정은 항주 NADE FREEDOM HOTEL(納德自由酒店)에서 묵었다.

호텔은 5성급이라고 하나 그리 정갈하거나 시설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여행 첫날의 여독은 그러한 불만은 잠시 잠깐일 뿐이고 오로지 따뜻한 차와 아늑한 잠자리만 간절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이번 여행기간 동안의 룸메이트는 같은 동네, 같은 아파트, 같은 동, 같은 라인에 사는 이웃사촌인 김사장이다. 또한 이번 여행의 인솔자이며 유능한 가이드이기도 하다. 이 사람하고는 전생과 현생에 무슨 인연이 엮어졌는지 낮이나 밤이나 맨날 만나고 붙어서 지낸다. 또한 김사장의 고향에 농가주택까지 있어 그야말로 이웃사촌의 개념을 넘어버린 사이이다. 그래서 우리 둘 사이는 서로가 허물이 없다. 또한 서로 시간이 있을 때에는 시시때때로 만나 차도 마시고 밥도 같이 먹는 막역지간이다.

송성가무쇼 극장앞 찻집. 분위기가 고즈넉해 보였다.

항상 긍정적이고 활동적이며 모든 일을 즉결처분해 버리는 김사장에 비해 나는 조금 느리고 한 번 더 생각하는 신중한 성격이다. 그래서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많이 하는지도 모른다. 공유하는 취미가 있다면 그것은 차 마시는 것과 음악 감상이다. 우리는 예외 없이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음악을 틀고 차를 끓였다. 물론 하루의 여독을 따뜻한 물로 헹구어 내고 나서 말이다. 그리고 룸 카펫에 찻상을 차리고 일행들을 불러 차를 나누어 마셨다.

사실 이 친구랑 차를 마시는 일은 매일매일 필수적인 일상에 속한다.

어떤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만나면 서로 茶부터 끓이는 일이 버릇처럼 굳어져 버린 것이다.     



청하방 관광    

 

남송 때의 잡화 거리를 복원한 것이라고 하는데 중국 재래시장 특유의 건물과 색채가 인상적이다. 시장 규모는 중국답게 크고 넓었고 매우 다양한 잡화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다만 관광 시장화된 탓인지 문화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잡화시장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하기사 적은 돈으로 눈 맛, 손맛, 입맛을 즐기는 용도로 개설된 소품 시장인데 고풍스럽고 고급스러운 예술작품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과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우산 전문점 루왕싱지. 인테리어 효과가 만점이다

시장은 동서남북 사방으로 길이 뚫려 흩어진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면 상당한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왜냐하면 워낙 많은 사람들이 혼재되어 있어 까딱하면 시장 속의 미아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가이드의 협박이 항상 머리에 머물기 때문에 어이없으면서도 내심 조심스러운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갈 때는 5장 6부인데 돌아올 때 숫자가 안 맞을 수 있으니 잘 챙기고 다녀야 한다’는 것이 가이드의 장난스러운 협박이다.

글쎄, 우리가 별주부전의 토끼라도 되는 것인지......!   

청하방 잡화시장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지만 코스 여행이 가지는 장점은 대상 지역의 주요 부분을 짧은 시간 내에 돌아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적은 비용으로 엑기스 관광을 즐길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최대의 단점이자 한계인 점찍는 여행일 수밖에 없어 여행의 참다운 즐거움을 만끽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여행사가 짜 놓은 프로그램을 정해진 시간 내에 돌아봐야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주마간산식 여행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동행인들의 포즈 촬영, 스냅 촬영은 물론 내 관심 대상을 촬영하다 보면 계속해서 사람들을 놓치기 일쑤여서 당황한 적이 한번 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바다의 등대처럼 광채를 빛내준 사람은 바로 빨주노초파남보 아줌마였다. 비교적 큰 키에 밝은 주황색 상의에 노란색 바지, 그리고 하얀 부츠는 눈깔을 위아래도 굴려보고 망원으로 늘려보면 어디선가 여지없이 그 광채는 솟아나고 있어서 일행을 찾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셨기 때문이다.

에구, 고맙시당^^



梅家村 방문

     

점심 식사 후 항주의 명산 룽징차(龍井茶) 재배단지인 매가촌을 방문하였다.

룽징차(龍井茶)는 철관음, 벽라춘 등과 함께 자타가 인정하는 중국의 대표적 綠茶이다.

저쟝(浙江) . 항저우(杭州]) . 시후(西湖)일대에서 생산되는 녹차로써 1200여 년의역사를 가졌다.

이 차는 선명한 초록색 잎과 진한 향기, 달콤한 맛, 아름다운 모양으로 유명하다.

'용정'은 원래 시후 옹가산(翁家山) 서북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지만, 용정차는 그 생산지에 따라 서호용정(西湖龍井)과 전당용정(錢塘龍井), 월주용정(越州龍井)으로 나뉜다. 서호용정 외의 두 가지는 일반적으로 절강용정(浙江龍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 이 코스는 여행사 쇼핑코스로 예정되어 있어서 매장을 방문하기는 했지만 구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러번 중국을 방문한 사람이 많기도 했지만 차를 판매하는 판매원이 구매 욕구를 일으킬 만한 요소를 전혀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차밭의 규모이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골짜기 양편으로 차밭이 이어져 있었는데 거의 40~60도에 가까운 경사지까지 차를 재배하고 있었다.

채엽된 용정차 차청

또한 시기적으로 한창 새잎이 솟아 나올 시기여서 그런지 차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채엽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黃山市로 출발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인 황산으로 출발하였다.

거리는 200km가량이지만 시간은 2시간 30분이 소요된단다.

고속도로 길 양편으로 보이는 풍경은 차밭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흡사 계단식 논을 연상케 한다. 자연을 극복하고 이용하는 사람들의 지혜와 오랜 역사의 한 단면이 그곳에 있었다. 진록색 차밭에 원뿔형 대나무 삿갓을 쓰고 앉아서 차를 채취하는 모습은 이국적이면서도 전원적 아름다움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광경이기도 했다. 끝없이 이어진 녹차밭에 수십, 수백 명의 채엽 일꾼 원뿔형 삿갓만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이어진는 녹차밭. 계단식 논처럼 비탈길을 비~잉 둘러가며 차를 재배한다

차나무를 집중적으로 재배하는 길고 긴 골짜기를 梅家村이라고 하는데 1,200여 년의 역사가 이어져 오면서 이 계곡은 대부분 차와 관련된 찻집, 음식점, 숙박업소, 별장 등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특히 숲 속에 자리한 음식점들 앞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적지 않게 주차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이곳에서 차와 음식, 또는 술을 마시며 며칠씩 즐기고 간다고 한다.

    

저장성에서 안휘성으로 넘어오면서 차의 경작 형태가 서서히 차이가 나는 것이 보였다.

저장성 차밭은 재배라는 생각이 명확할 정도로 잘 가꾸어져 있는데 반해서 안휘성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 갈수록 점차 듬성듬성하였고 일부는 거의 야생차 밭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짐작컨대 항주의 위도(북위 30도)와 서호의 습도가 용정차를 최고의 품질로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면 산간지대인 안휘성의 차는 비교가치에서 떨어져 경제성이 크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나의 짧고 어설픈 지식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안휘성에서 생산되는 ‘기문 홍차’는 세계 3대 홍차로 손꼽히는 명차이기 때문이다. 경험적으로 인도의 다즐링, 스리랑카의 우바, 안휘성의‘기문 홍차’ 중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잘 맞는 홍차는 ‘기문 홍차’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향이 강한 다즐링이나 우바보다 담백하고 카페인이 적은 ‘기문 홍차’가 개인적으로 가장 마시기 좋았기 때문이다.   


안휘성으로 접어들면서 바뀌는 풍광은 운무가 많은 저장성과 많은 차이가 있다.

우선 하늘의 색깔과 구름이 다르고 농경지의 작물도 달랐다. 길옆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유채밭은 노란띠를 한 줄로 이어 놓은 것 같아 아줌마들은 환호하다 못해 거의 발광 수준이다. 상해에서 항주로 올 때 보았던 납골탑이 달린 벽돌집과는 달리 안휘성의 농가주택들은 대부분 흰색으로 칠한 벽과 검은색 지붕으로 통일되다시피 하였고 형태와 크기가 흡사할 정도로 비슷비슷하였다.   

안휘성의 유채밭. 흡사 잘익은 벼논같이 보인다

벽을 흰색으로 칠하는 것은 안휘성 사람들의 오랜 관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산간지방에서 추구할 수 있는 최대의 목표치가 관리나 학자였기 때문에 종이와 같은 흰색으로 벽을 칠하고 자식들의 출세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관습이나 기원은 농지보다 산지가 많았던 우리나라 영남지방이 서당을 많이 설치하여 교육을 중시한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상도 문둥이는 바로 그 많은 書堂에 다니던 ‘文童’이 비하적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니던가!     

안휘성 주택의 벽은 예외없이 흰색으로 통일되어 있다.

안휘성의 마을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보이는 풍광은 이국적이면서도 아름다웠다.

마치 프랑스 남부 농촌 어디가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차를 세우고 사진 몇 방 박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달리는 도로는 고속도로이고 도로가 한적한 덕분에 22인승 중국산 리무진 버스는 100km를 넘게 과속으로 달리고 있어 아쉬움만 가득하였다.


그래도 스마트 폰으로 몇 방 찍어 보았다.

역시나!

모두 흔들려서 마치 벌크 효과로 찍은 사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위대함을 발견하고 필요는 방법을 낳는 법.

스마트 폰을 버스의 진동에 맞춰 차창에 바짝 부착하고 1초에 3~4회 정도로 연사 하니 10장 중 1~2장은 그나마 포커스와 구도가 맞는 사진을 건질 수 있었다. 여기에 어쩔 수 없이 프레임에 들어와 버린 도로와 가드레일을 잘라내니 마치 길쭉한 파노라마 사진처럼 크롭 된다.

산간지대인 안휘성의 풍광은 맑고 아름다웠다

그나마 이게 어디인가!

마치 구하지 못할 것을 쟁취한 것처럼 알량한 사진 몇 장이 나를 행복케 한다.

세상사의 행, 불행의 척도는 대부분 상대성 비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개똥철학이 머리를 스치고 이것 또한 삶의 교훈과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황산시 청대 옛거리의 고풍스런 상점 건물

6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우리는 황산시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석식(夕食) 이전 명청(明淸) 때의 옛 시장거리인 청대 옛 거리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항주의 청하방보다 건물들이 고풍스러웠고 판매하는 상품도 비교적 수준이 높았다.

그러나 딱히 구매하고 싶은 물건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다만 지역 특산물인 벼루와 붓 몇 개는 물욕이 일어났지만 내 맘에 드는 것은 상당한 값을 치러야 할 듯싶고 기념품 성격 외에는 사용할 용도 역시 마땅치 않아서 그냥 입맛만 다시고 돌아서고 말았다. 그래도 여자들은 한국에 비해 저렴한 머플러에 관심이 몰린다. 한 개에 3,000원가량인 머플러는 크게 부담도 되지 않을뿐더러 여행기념 선물로 사용할 용도인지 여러 개씩 구매하는 것 같았다.


이 시장에서 본 것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거대한 나무를 통으로 잘라 만든 대형 탁자이다.

얼추 10m 가까이 되어 보였고 무게는 1t 이상 나가지 않을까 싶었다.

중국 여행을 하면서 간혹 느끼는 바이지만 우리의 가옥구조나 사무실, 또는 매장에서는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은 엄청난 크기의 탁자나 조각물들을 보게 된다. 그것이 대륙적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중국인들의 과시욕의 발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의 엄청난 크기의 물건들을 만들어 내는 모습은 분명히 진기한 구경거리임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어마무시한 크기의 통나무 탁자. 껌을 짝짝 씹고있는 점원 아가씨 모습이 귀여웠다

우리 일행은 각기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기념사진 몇 방 박고 맛보기 음식도 얻어먹으면서 황산 재래시장의 독특한 건물들과 장식물들을 구경하였다.

어찌 보면 이러한 구경도 관광의 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프로그램 속에서 돌아가는 부속품 같은 삶에서 벗어난 자유인으로서 누리는 작은 행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청대 옛 거리 뒷골목

저녁 식사는 황산시의 일류급 중식당 취상 고리에서 먹었다.

3층에 예약된 룸으로 들어가면서 보이는 식당은 단순히 식당 수준이 아니고 중국 최고의 레스토랑이었다.

벽면과 바닥이 모두 대리석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실내 인테리어도 세련되고 정갈하였다. 예전에 가보았던 중국 식당의 일반적 분위기와 냄새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종업원들 또한 깔끔한 복장과 친절한 서비스로 잘 교육되어 있어서 나날이 발전하는 중국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음식은 중국식당 특유의 회전식 테이블에 순서에 따라 올려진다. 하지만 음식 이름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예전에 먹어 본 것도 있었지만 새롭게 맛을 보는 요리도 많다.

황산시 고급 레스토랑 취상고리. 시설과 음식맛 모두 최상이었다

여기에 한국에서 짊어지고 온 김치와 미나리, 돌나물 초고추장 무침이 추가되니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상찬이다. 사실 항주나 황산시는 거의 아열대성 기후에 가까워 각종 야채와 과일이 굉장히 풍부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오로지 김사장 만의 과잉(?) 서비스 정신은 기어이 한국산 미나리, 돌나물은 물론, 방풍나물까지 공수해 와서 식탁에 올려 준다. 그것도 식당 주방에 직접 들어가 데치고 무치기까지 해서 말이다. 아마도 대한민국 여행 가이드 중 전 세계에 김치와 고춧가루, 라면, 소주, 야채는 물론, 전기솥까지 짊어지고 다니는 인간은 오직 김사장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여담이지만 한국에서 2~3일에 한 번꼴로 돌려대던 변 공장을 중국에서는 매일 가동해야만 했으니 가뜩이나 환경오염이 심한 중국에 한국산 대장균 폭탄을 쏟아 놓고 온 셈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날 저녁 만찬 역시 뱃대지가 터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할 정도로 과식에 과식을 강요받았다.

사람마다 뱃골이 다른 법인데 김사장은 수 십 평이 넘는 자기 위장 속을 기준하여 음식을 장만하는지 가는 곳마다 풍성하고 푸짐하다 못해 낭비에 가깝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이렇게 푸짐+α 식단은 김사장만의 서비스 철학에 기인된 바 크다고 할 수 있으며 보릿고개라는 빈곤 시대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는 한국사람들에게는 상당한 강점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한국에서 공수한 김치와 미나리 돌나물 등을 비롯하여 이름도 모를 진수성찬에 뱃가죽이 늘어질 정도로 처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누구 말대로 중국 여행으로 인한 체중 증가는 누구의 책임이 될 것인가?


황산시 숙소는 Country Garden Phoenix Hotel-Huangshan이다.

로비에 들어서서 보이는 내부는 비교적 고급스러웠고 첫날 묵었던 항주의 호텔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하고 호화롭다. 로비 오른쪽 아치형 복도는 바티칸 성당 로지아의 벽화와 동일한 형태이고 그림까지 라파엘로의 것을 모사하였다. 프런트 옆쪽 벽면은 영국의 풍경화가 윌러엄 터너의 그림을 모사, 장식하였는데 고급스럽고 우아한 르네상스 시대와 근대 유럽의 장식과 분위기를 연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바티칸 성당 로지아의 벽화를 그대로 모방한 호텔 복도

룸 또한 정갈하였고 각종 가구나 비품 역시 5성급 호텔에 걸맞은 품질을 갖추고 있었다.

요즘 중국의 신축 호텔들은 모두가 경쟁적으로 고급화를 추구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인한 소득 수준 향상과 맞물려 당연한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황산 등정     


전날 저녁에 만난 황산 가이드(박경철)는 봄철 관광철이어서 등반객이 많이 몰리니 ‘일찍 출발해야 한다’라고 도움말을 준다. 그리고 29일 등반 때 비가 많이 와서 등산객들이 흠뻑 젖었다고 하는데 운 좋게도 우리가 등반하는 날은 날씨가 맑다고 하니 그것도 하나의 여행복이 아닐까?

호텔 조반을 대충 챙겨 먹고 황산을 향해 떠났다.

출발 시간은 오전 7시.

사실 황산은 오래전부터 선망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사람이나 지역이나 인연이 닿아야 만나고 가보는 것 아니겠는가!

그동안 여러 차례 기회가 있었으나 개인적인 사정과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지금에서야 황산에 내 발자국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운곡사 입구 버스 승차장

우리 일행을 태운 22인승 리무진 버스는 대략 30분을 달려 황산 등산로 중 한 곳인 운곡사 입구에 도착하였다. 입구는 이미 등산객들로 길고 긴 장사진이다. 우리는 ㄹ자 철제 통로를 따라 한 걸음씩 밀려들어갔다. 여기서 또다시 버스를 타고 케이블카 타는 곳까지 올라가야 한다. 버스를 타고 올라가면서 보이는 산 아래쪽에는 왕대나무가 竹海를 이룰 정도로 밀식해 있었고 흡사 옛날 한계령 굽이길 돌아가듯 갈지자 도로를 한참 올라가서야 비로소 케이블카 승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또다시 밀리듯 2개의 계단 통로를 꾸역꾸역 올라가야 한다. 촘촘한 행렬은 옆 사람의 체취까지 고스란히 공유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빈틈이 없다. 그런데 어디에서 흘러나오는지 평생 맡아본 적이 없는 요상기괴한 냄새가 내 콧구녕을 자극해 댄다. 지독한 악취에 코가 뭉그러져 빠져버릴 정도이다. 워낙 사람이 많아 어디에서 발생된 냄새인지는 한참 뒤에야 파악이 되었다.

진원지는 바로 내 앞의 가죽점퍼 입은 짱깨 녀석이다.

악취는 가히 살인적이다.

이 냄새를 확보하여 최루탄을 만들면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新物質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짐작컨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몸을 씻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도저히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희한 뻑적지근한 냄새인데 내 후각 신경과 냄새 감별능력으로는 무슨 물질로부터 발생하는 냄새인지 100% 판별 불가능이다. 그런데...? 가족이 있다. 딸로 보인다. 도대체 저 냄새 폭탄이 아이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리고 그 짱깨의 마누라는 누구일지도 궁금해진다. 아마도 유유상종 아니었으면 강제로 도장 찍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유추된다.

후~어~이~!    


우리는 오전 10시가 다 되어서야 2대가 동시 운행되는 8인승 케이블카에 겨우 탑승할 수 있었다.

사람이 워낙 밀리다 보니 주변 살필 여유도 없이 케이블카에 올라타기 바쁘다.

그리고 그냥 슈~웅! 올라간다. 2,808m 길이의 케이블카는 약 8분간 올라가는데 차창 밖으로 천도봉, 연화봉, 선인표해 등을 감상할 수 있다. 황산에 익숙한 가이드는 여기 보라! 저기 보라! 양쪽을 가리키지만 너무 허겁지겁 올라온 터라 무슨 말을 해도 금방 초점이 잡히질 않는다.     

백아령 케이블카 승차장

그러나 어둠에 눈이 적응하듯 금세 우리는 황산의 웅좌에 눈을 빼앗겨 버렸다.

감탄, 또 감탄이다!

모두가 암봉으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은 하나 같이 독자적 조형미를 갖추고 있었고 봄기운을 먹은 연노란색 소나무 이파리들은 부드럽고 살랑거리는 모습으로 강대한 산의 골격과 조화를 이룬다.


一見의 所感은 역시! 역시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봉우리 골짜기에 황산 5대 기경 중 하나인 소나무들이 마치 잘 그려진 수묵담채 산수화처럼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산야에서 흔하게 보았던 적송, 해송, 곰솔과는 형태가 달라 보인다.

수피는 해송과 비슷하고 이파리는 적송과 비슷하다.

그리고 모든 나무가 직립이다.

우리나라 소나무 중 적송은 직립하기도 하지만 틀어지고 휘어져서 조형적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그러나 황산의 소나무는 모두가 그냥 일직선으로 주~욱 뻗어있다.

그리고 마치 층층나무처럼 가지가 층층으로 보인다.

또한 거대한 암봉들의 곡선과 소나무의 직선이 대비되어 간결한 조형미가 저절로 꾸며진다.

서양 사람들이 황산을 보고 나서야 동양의 산수화를 이해하였다고 하는 것을 나 역시 100% 수긍할 수밖에 없다.

황산 연화봉이 보인다

황산을 다녀오고 나서 알게 된 사실.

황산 소나무는 황산의 자연환경에 의한 특이한 변화를 이루어 독립된 품종특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오호! 어쩐지~!   

직립한 황산 소나무. 독립된 품종으로 진화되었다고 한다

황산의 암봉들과 소나무를 바라보면서 문득 겸재(謙齋) 정선(鄭善, 1676~1759)의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최고의 걸작)가 연상되었다.

그러한 느낌은 인왕산이나 황산 모두 암봉과 소나무라는 공통점이 존재하고 억겁의 세월 동안 자연이 깎고 다듬어 놓은 완성된 조형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산을 보면서 갑자기 우리나라 회화사에 관한 생각이 연결되었다.

그것은 아마도 황산의 풍경이 산수화로 연상되고 중국의 산수화 기법이 우리나라에 전해져서 한국 산수화의 근본이 되었으며 겸재 정선을 전후하여 조선시대 회화의 평가기준을 달리하기 때문이라는 릴레이가 철컥! 붙어버렸기 때문이다.

인황제색도(국보 제216호)

그래서 생각이 연결된 김에 그동안 나름의 의문을 가졌던 문제를 정리해 보자는 갑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사실 나는 중국의 여러 곳을 다녀보면서 몇 가지 의문과 내 나름의 해석을 동시에 얻은 것이 있다. 그것은 책으로 봤던 繪畵史와는 다른, 몇 가지 면에서 의문점이 생겼다는 것이고 중국의 산야를 이곳 저곳 다녀 보면서 비로소 의문에 대한 일말의 해답을 찾았다는 것이다.

물론 철저하게 나만의 주관적 생각이기는 하지만......  


겸재 정선이 眞景山水畵, 또는 實景山水畵 기법을 개발하기 이전에는 중국의 觀念山水畵 기법을 그대로 수용, 답습하는 이른바 사대주의적 화법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그 표상적 작품이 안견의 몽유도원도라고 한다. 안견은 15세기 때 사람이고 겸재는 17세기~18세기에 걸쳐 살았으니 회화기법의 차이는 매우 당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즉, 몽유도원도에서 나타나는 산수는 도저히 인간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관념적 경치이고 상상의 풍경이라는 것이며 실존하지 않은 가상을 그린 것이라는 것이다. 몽유도원도에 대한 유래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에 도원에서 노닐었던 광경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리게 한 것이기 때문에 도원적이거나 몽환적인 그림의 전개는 매우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인왕산과 흡사한 모양새다

물론 여기서 안견의 그림 얘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몽유도원도를 비롯한 겸재 이전의 화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표현기법이 과연 관념적인 것이었는지 아니면 중국적 실경산수화 기법인지는 단정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중국 각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각양각색의 자연풍경을 보면서 생긴 의문점이다.

실제로 중국을 가보면 우리의 일반적 상상을 뛰어넘는 기이한 형태의 자연이 곳곳에 다수 존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도 매우, 엄청나게 다양한 형태로 말이다.

계림.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카르스트 지대이다

따라서 중국 산수화에 나타나는 자연의 형태가 단정적으로 관념적이라고 못 박을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또한 중국 회화에서 나타나는 기산과 기물을 꼭 관념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수긍하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울이나 부산이나 똑같은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광활 무비 한 중국 각지의 자연과 환경은 도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풍부하기 때문이다.

곤명 土林

따라서 우리나라는 그러한 형태의 다양한 자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 산수화에 나타나는 기이한 형태의 풍경들이 實在한다고 믿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문제이다. 따라서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을 가지고 상상에 의한 관념적 사고라고 단정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화가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풍경들을 그렸다는 관념산수의 개념적 정의가 정확한 것인지 나름의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는 미술 평론가도 아니고 화가도 아니다. 다만 일반상식으로 접했던 여러 미술서적의 내용과 실제 눈으로 확인한 사실 사이에서 그 정의의 차이에 대한 의문을 느꼈을 뿐이라는 거다.  


운무 자욱한 황산.  잘 그려진 수묵담채 산수화나 다름없다

각설하고, 케이블카에서 내린 곳은 백아령이고 해발 1,667m쯤이라고 하니 주봉인 연화봉 까지는 200m 정도 거리이다. 그러나 연화봉은 현재 휴식년에 들어가 당분간은 등정할 수 없단다.

황산의 옛 이름은 이산이었다고 하며 당나라 때 현재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후이저우 4개 현에 걸쳐있고 둘레는 250km이다.

이곳에는 2개의 호수, 3개의 폭포, 24개의 계류, 해발 1,000m가 넘는 72개의 봉우리가 있다.

산 중심부에 3대 주봉인 연화봉(蓮華峰, 1860m)· 광명정(光明頂,1840m)·천도봉(天都峰,

1810m)이 솟아 있고 지질은 고생대의 편마암· 사암·점판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케이블카에서 내려 몇 장의 사진으로 황산 갈증을 일부나마 씻어내고 중식이 예정된

북해빈관을 향해 산행을 시작했다.     

시신봉까지는 약 50분 거리라고 한다.

수많은 계단이 끝없이 설치되어 이어진다.

중국의 여행지를 가보면 어디를 가나 돌과 비슷한 재질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편리함이 있다.

황산 역시 그러한 재질의 계단이거나 바위를 깎고 구멍을 뚫어 등산로를 만들어 놓았다.

산의 통행은 철저하게 계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계단을 벗어나면 위험천만한 낭떠러지이고 설사 걸어갈 수 있다 하더라도 경사가 심하여 굴러 떨어질 위험이 상존한다. 이렇게 계단 통행로를 설치한 또 다른 이유는 등산객의 안전 도모와 자연보호를 위한 나름의 방법으로 이해할만했다. 황산에는 엄청난 무게를 목대로 메고 짐을 옮겨주는 목도꾼도 있고 2명이 한 조로 사람을 태우고 산을 오르내리는 인력거꾼들도 있다. 이들은 황산의 3개 호텔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물자를 산 밑에서 운반한다고 하며 모든 폐기물과 쓰레기의 처리도 모두 이들의 몫이란다.

환경보호를 위해 도로를 설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량이나 운반 도구가 할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의 운반을 이들이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황산의 목도꾼. 평균 40kg 이상 짐을 나른다

그래서 황산에서는 모든 물가가 약 2배 이상 비싸다.

당연한 결과이다. 우리나라의 설악산이나 지리산도 그러니까!

목도꾼이나 인력거꾼들을 보면서 느껴지는 점은 그 작은 체구로 어떻게 그런 무게를 메고 옮기는지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한 사람이 메고 옮기는 무게는 보통 40kg~60kg 이란다. 그것도 평지가 아닌 엄청난 높이의 험준한 산을......

어찌 보면 중국이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며 동시에 중국의 계층별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극한의 인내력과 끈기를 발휘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직업일 수밖에 없고 우리 기준으로 보면 완벽한 3D 직업군에 속한다.

이들은 하루 최대 4번까지 짐을 운반할 수 있다고 하며 요금은 한 번에 20,000원이고 20%의 세금을 납부해야 한단다.  


철각 김사장은 지치는 기색도 없이 설렁설렁 잘도 올라간다.

매일 2시간씩 산을 탄다는 이명호씨도 단단한 걸음걸이가 여유롭기까지 하다.

둥그런 몸통의 소유자 김태준씨 역시 황산의 길고 긴 오르막 계단을 특유의 느긋함으로 올라가신다.

그러나 우리 팀의 막내 격인 조영옥씨는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나보고 손을 잡아 보란다.

그런데 손이 의외로 차갑다.

이것은 혈액순환의 문제이다.

갑작스러운 격한 운동으로 심장의 펌프질은 강력해지는데 반해서 말초혈관까지 혈액 전달이 늦어져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손이 차가워진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영옥 씨의 상태는 정상을 되찾았다. 심장에서 출발한 혈액이 늦게나마 온 몸에 골고루 배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산의 5대 기경!

기암, 기송, 운해, 설경, 온천이라고 한다.

그러나 봄철 여행이라 설경은 제철이 아니었고 기대했던 운해도 없었다.

또한 온천도 하지 못했다.

다만 맑은 날씨로 인해 눈에 보이는 대부분을 시야에 넣을 수 있어서 100점은 아니더라도 70점은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운해가 깔리면 구름의 이동에 따른 경치 변화와 신령스러움을 느낄 수 있을 터이지만 깊은 골짜기나 준봉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얻는 만큼 잃는 것도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진리이자 교훈이기도 하다.

물론 어느 상황이 더 좋은 것인지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겠지만.....

    

황산은 네팔의 안나푸르나, 뉴질랜드의 밀포드 트랙 등과 함께 세계 3대 트래킹 코스로 꼽히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3시간 등반코스를 단 8분 만에 축지법(케이블카)으로 날아왔으니 굳이 트랙킹이라고 할 수도 없는 신선놀음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두부처럼 물러 터진 허리와 장딴지가 그것마저도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만약 다음에 다시 황산에 오게 될 기회가 있다면 필히 준비해야 할 사항이 체력 보강이라는 생각이다. 예전에 일주일 평균 25km~30km를 러닝 할 때 관악산이나 장가계 정도는 가벼운 산책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분 좋은 피곤함으로 올라갔던 기억이다. 그 오살 놈의 무릎만 다치지 않았어도 지금의 내 다리 근육과 심폐기능은 지금보다 훨씬 강건해져 있었을 터인데......ㅉ

나이 탓일까?

황산의 계단 위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허벅지의 근육이 새삼 세월을 절감케 한다.  


이 글을 쓰면서도 황산의 어디 어디를 돌아다녔을까?라는 기억은 명확하게 잡히지가 않는다.

다만 운곡사 입구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백아령에 내려서 시신봉을 거쳐 북해 호텔에서 중식 먹고 비래석 한 번 만져본 다음 서해 대협곡으로 빠져나가는 코스라는 대략적인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다. 사실 황산에 올라가서 무슨 봉, 무슨 봉이라고 얘기는 하는데 그딴 것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보통 7일 정도 소요된다는 황산 코스별 등산을 불과 4~5시간 내에 훑어야 하기 때문에 잠깐씩 쉴 때 빼고는 대부분 사진 박기 바빠서 보다 여유롭게 경치를 감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내가 찍고 싶은 경치 외에 일행들 사진도 찍어줘야 하기 때문에 노상 꽁무니 따라가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 세계 3대 트랙킹 코스라는 황산을 제대로 느끼고 감상할 수 있었겠는가! 가이드 역시 바쁜 시간 때문에 이 곳 저곳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재론하지만 단체여행의 한계이자 어쩔 수 없는 여건이었음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렇게 점찍듯이 훑고 지나갔음에도 황산이 주는 감동은 쉽게 삭제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대치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황산이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래석

또 하나 너무 유명하고 많이 알려져서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비래석(飛來石)!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냥 돌덩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높이 12m에 600t에 달하는 바위가 어찌 그곳에 2억 3천만 년이 지나도록 굴러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을까? 하는 신기함과 자연에서 나타나는 예측 불가능한 현상에 대한 일종의 불가사의를 실감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飛來石.

이름 그대로 풀어보면 ‘하늘을 날아서 온 돌’이다.

비래석에 대한 유래는 이렇단다.

서인도 스님 혜리가 어느 날 황산에 올라와서 이 돌을 보고 - 석가님이 수련하던 중천축국 영취산이 어찌 이리로 날아왔을꼬? -라고 감탄하고 비래석(飛來石)이라고 명명하였고 건너편에 영은사 (신령이 숨어 있는 사찰이라는 뜻이라고 함)를 창건하고 450개의 석불을 모셔 비래석을 지켰다고 한다.

왜냐하면 날아온 돌이기에 또다시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자연물은 언젠가는 소멸하는 법!

2억 3천만 년을 버텨온 비래석도 언젠가는 작은 모래알로 분화되어 사라질 것이다.

바다가 융기되어 황산이 생겼듯이 언제 또다시 황산이 바다로 변해버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자연변화가 생길지는 오직 神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참고로 영은사는 그 유명한 소림사보다 100여 년 전에 창건된 고찰이다.  

서해대협곡 계단.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모노레일 철로가 나온다

비래석을 지나고 나면 황산 여행의 대미인 서해 대협곡이다.

1979년 덩샤오핑이 직접 살펴보고 개발을 지시하여 9년에 걸친 설계와 12년의 공사 끝에 2001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무려 14만 여개의 계단을 설치하고 호텔을 짓고 모노레일과 케이블카 등의 운송수단을 설치 건설하는 종합플랜이다.


自然은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그러한 플랜을 실행하지 않았다면 黃山이 아무리 天下第一名山이라 한들 감히 올라갈 꿈이라도 꿀 수 있었겠는가! 사실 우리는 연화봉이 휴식년에 들어가서 백보 운제(百步雲梯)는 가보지도 못했다.

또한 신선이 거닐었다는 보선교(步仙橋)도 건너보지 못했고 살 떨리는 천인단애(천길 낭떠러지)계단의 아찔함도 경험하지 못하였다. 그냥 황산 트랙킹의 한 코스이긴 하지만 가장 쉽고 빠르게 오갈 수 있는 삭도(케이블카)

트랙킹을 했을 뿐이다. 만일 천 길 낭떠러지 절벽을 뱀 허리 감듯 돌아가는 천인단애 계단이나 보선교를 갔더라면 정말 스릴 만점이었겠지만 어떤 분을 위해 우황청심환 한 배낭은 지고 와야 했을 것이다. 그분은 보선교가 아니라 3m도 되지 않는 소교를 건너면서도 음악도 없이 덜~덜 떨어대는 개다리 춤을 신나게 추셨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기암과 절벽과 건장한 골격이 느껴지는 골짜구니를 돌고 돌아 오르고 내리고 서해대협곡을 섭렵(?)했다.

둘레 250km에 달하는 중국 최고의 명산인 황산!

무엇이 우리 모두를 감탄하고 감동하게 했을까?

말 몇 마디로 정의 하기는 불가능이다.

그저 자연의 위대함, 조화로움, 조형적 완벽함에 유구무언일 뿐이다.

세상에는 부지기수의 산이 있고 크건 적든 산에 올라 느끼는 조감적 시야는 시각적 평안함 과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준다. 사실 어느 산을 올라가도 나름의 경치와 조형성은 존재한다.

그것이 산 자체일 수도 있고 풀과 꽃과 나무일 수도 있다.

또한 산에서 바라보는 강과 들과 하늘일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자체적인 조형성보다는 주변과 어울려져서 나타나거나 국소적, 제한적이기 때문에 좋기는 해도 감동까진 이어지지는 않는다. 물론 우리가 자랑하는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또는 북녘에 위치한 백두산, 금강산, 칠보산 등의 명산들은 황산과는 또 다른 나름의 독특한 환경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황산과의 대별은 각기 개인적 취향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결론적으로 황산은 산 자체가 조물주의 위대한 조형물이며 영겁의 시간 동안 비, 바람과 태양과 역사가 만들어 놓은 절차탁마(切磋琢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코끼리 다리만 긁적거리고 온 것이긴 하지만서두.


광활한 중국 천지는 듣도 보도 못한 희한한 일들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나고 자연 또한 우리의 일반적 상상력을 벗어나는 절경(絶景), 가경(佳景), 기경(奇景)이 무수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황산은 絶景에 속하며 또한 佳景이며 奇景의 變化가 있다.

이러한 황산의 모습을 중국 明代의 여행 가이자 지리학자였던 서하객(徐霞客)의 표현을 빌려 옮겨본다.

    

五岳歸來不看山, (오악귀래불간산)

오악에서 돌아오면 다른 산이 산으로 보이지 않고,

黃山歸來不看岳." (황산귀래불간악)

황산에서 돌아오면 오악이 산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악(五岳)'이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5대 명산으로

태산(太山), 화산(華山), 형산(衡山) ,

항산(恒山), 숭산(嵩山) 을 일컫는다.

즉, 자타가 인정하는 천하의 5대 명산이라 한 들 황산에 비교할 수 없고 그 존재감이 약해진다는 뜻이다.

불과 14자에 불과하지만 황산의 절대미와 조형을 이토록 명확하고 명료하게 함축한 그의 지식이 부럽기만 하다.

산신령님이 어디선가 나타날 듯 하다

우리는 주 여행 목적지인 황산을 대충(?) 돌아보고 하산을 위해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서북향 쪽 산에는 그토록 많던 소나무가 듬성듬성하고 모두 잡목이나 관목류로 빽빽하다.

역시 소나무는 그 고고한 자태만큼이나 춥고 어두운 곳을 싫어하는 것 같다. 식생(植生) 변화에 따른 식물들의 전쟁은 환경 적응에 강한 놈만 살아남는다는 평범하면서도 당연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인간이나 식물이나 살아가는 전쟁은 모두 다 똑같다는 생각이다.    

황산 북서방향 하산길에는 잡목만 무성할 뿐 소나무는 한그루도 없었다

하산하는 태평 케이블카는 52인승이다.

아무래도 엄청난 견인력을 발휘해야 하는 승강용보다는 중력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하강용이 승객을 많이 태울 수 있을 것 같다는 내 나름의 생각이다. 내려가는 케이블카는 그야말로 초만원이다. 세어보진 않았지만 정원을 한참 초과하지 않았을까? 우려할 정도로 북새통이다. 케이블카의 승차 소감은 한마디로 롤러코스트와 같은 느낌이었다. 중간중간에 설치된 철주를 지날 때마다 살짝 올라탔다가 직하하는 듯한 슬라이딩의 스릴을 만끽한다. 그럴 때마다 터지는 여자들의 비명과 환호가 실내를 온통 소음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태평 케이블카

만일 이러한 케이블카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난코스를 엄청난 시간과 힘을 소비하며 등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 아니던가!

기계문명의 발달에 새삼 감사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등산의 참다움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땡땡한 종아리와 뻑적지근한 허벅지를 이끌고 여행사 옵션 코스인 상품 매장을 들렀다.

그러나 단 한 명의 구입자도 없어 괜스레 가이드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저녁밥은 황산시에서 대충 때우고 항주로 출발하였다.

밤길을 달리는 버스 승객들은 등산의 피로와 저녁밥의 식곤증으로 모두가 자울자울 졸음에 빠져들고 있었다.


숙소는 첫날 묵었던 NADE FREEDOM HOTEL(納德自由酒店)이다.

노곤한 몸을 따뜻한 샤워와 차로 우려내고 음악으로 몸을 릴랙스하게 풀어본다.  

올 때의 설렘은 잠깐 동안이더라!

어느새 여행 막바지에 다다라 서서히 현실세계 적응 모드로 들어간다.

머릿속에는 한국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이 자동 정렬되듯 나열되기 시작한다.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니 항주의 야경이 멀리까지 보인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후~ 내뿜어 본다.

희고 푸른 연기가 시커먼 하늘로 흩어져 사라져 가고

도시 불빛에 물든 회색 구름은 먼 산 너머로 머흘~머흘~ 넘어서 간다.

이 순간, 이 시간은 내 삶의 어디쯤을 지나가고 있는 것일까?

有限할 수밖에 없는 내 생명의 모래시계는 산 넘어가는 구름처럼 어데론가 흘러 내려가고만 있었다.   


 상해관광   

  

상해의 관광코스는 난징루, 예원, 상해임시정부청사, 그리고 동방명주탑 전망대, 황포강 야경 감상이다.

사실 대도시는 큰 흥미가 없다. 다만 그 도시를 품고 있는 자연과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박물관, 또는 미술관 등은 주요 관심 대상이다. 물론 순전히 개인적 취향일 뿐이다.

예원

예원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냥 주~욱 둘러보고 지나칠 뿐이다.

하지만 참 웃기는 일이기도 하다.

예원(豫園)은 반윤단(潘允端)이 아버지 반은(潘恩)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조성한 중국 동남부의 대표적인 정원이자 건축물이다. 그러나 예원을 방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렴한 물건을 파는 잡화상가로 변질된 상가에서 싸구려 물건 몇 개 사고 예원 관광은 끝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원 잡화상가

물론 400여 년의 역사와 孝心이 담긴 예원(豫園)과 원림(園林)의 훼손을 방치한 중국 정부의 관리 소홀을 탓할 수밖에 없겠지만 走馬間山식으로 가이드하는 여행사의 무의식도 한몫한다는 생각이다.

1956년~1960년 사이 중국 정부가 예원의 원형을 찾기 위해 대대적으로 보수하였지만 이미 수많은 奇石과 奇物, 또는 수목이 반출, 훼손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예원의 본모습을 회복하기는 사실상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예원(豫園)의 '豫'는 "평안하고 기쁘다"는 의미로서 아버지 潘恩을 위한 潘允端의 지극한 효심을 엿볼 수 있다.   


점심은 연변금송채반점이라는 곳에서 먹었다.

북한식 온면인데 맛이 국적을 상실했더라.

분명한 사실은 북한식도 아니고 중국식도 아니다.

소위 짬뽕식이고 좋게 말하면 퓨전음식이다.

맛없는 온면을 먹었다는 것 외에 아무런 인상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중식 후 일정은 두패로 갈라졌다.

한패는 아이쇼핑, 한패는 상해임시정부 방문이다.

나는 내 취향답게 당연히 상해임시정부를 선택했다.

어쨌건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서 상해임시정부청사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건물은 난징루와 한 블록 거리를 두고 위치해 있었다. 붉은 조적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이다. 뭔가는 모를 연대감과 막연한 감사함이 가슴 한구석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族이 가지는 혈연성, 유대성, 유전적 동질성을 느끼면 희한한 감정이 솟구쳐 오르고 애국심이나 애족 의식이 자연스럽게 생성되는가 보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참 희한한 나라이다. 파벌싸움이 강하기로는 세계적인 수준을 넘어선다.

그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씨족 국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전인수식 당파싸움은 이제 차라리 전통이자 관습이 되어 버렸다.

왜 그럴까? 참으로 지긋지긋하다고 느끼지만 자신들도 모르게 어느 쪽인가는 ‘패거리’가 되어 一 群의 집단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것 역시 씨족사회의 유산이자 오랜 전통이며 관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상해임시정부 건물

내 나름의 생각은 이렇다.

우리나라는 씨족 국가로 출발한 나라이다.

그런데 그 씨족이라는 것이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고 가족은 곧 같은 식구이므로 영속적인 연결선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당연히 내 가족, 내 식구는 소중 할뿐더러 그 가족과 이해관계가 상충되는 또 다른 집단(가족)이 생기면 강력한 대응의식이나 보호의식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그것이 점차 넓혀져서 지연(地緣)이 되면 보다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세력싸움으로 변화한다.

그러한 예는 고구려, 신라, 백제가 그렇고 호남과 영남이 그렇다.


아마도 나중에 통일이 되면 크게 남한 출신과 북한 출신으로 패거리가 형성될 것이고 또다시 각 지역으로 분파될 것이다. 점쟁이는 아니지만 훠~언! 하게 보인다. 수 천 년 역사의 예를 볼 때 그랬고 현재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이렇게 씨족적 의식과 파벌싸움으로 한반도의 역사가 쌓여 나가지만 그 씨족이라는 동질성을 확인할 기회는 수없이 많고 또한 상호 인식한다. 예를 들어 ‘한국사람만큼 애국심이 강한 민족도 없다’라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그 애국심이라는 근저를 찾아가 들어가 보면 결국 ‘씨족 유대성의 발로’라는 결론에 도달된다.

그러한 예는 우리 역사에서 무수하게 찾아볼 수 있다.

평소에는 작은 이해관계에도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싸우다가도 외침을 당하거나 국난이 발생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대응하고 싸워 나간다. 그래서 우리 한반도, 한민족이 그 숱한 외침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여태까지 건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해 임시정부를 방문할 때도 똑같은 씨족적, 혈연적, 민족적 동질의식이 자연 발생적으로 솟아 나온다.

벽에 수많은 항일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실내를 돌아보고 중국인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벽에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고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웠던 수많은 사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당연히 기념사진을 찍고 싶었다. 왜냐하면 전기한 바와 같이 씨족적 유대감이 자동으로 생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 흔적을 훗날 누구에게 인가 꼭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촬영 금지 란다. 그러나 몰래몰래 몇 커트 박았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우리 일행 모두 기꺼운 마음으로 기부금을 냈다.

김구 주석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우리 모두 씨족적 유대감과 민족적 연대감으로 헌금을 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 씨족과 민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애쓴 선조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컸을 것이라고 사료된다. 그리고 항일이라는 공유 의식으로 번화하는 상해 난징루에 건물과 역사를 보존, 유지해 주는 중국 정부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남겨 두었다.   

상해 난징루 오미관 레스토랑. 맛과 시설이 매우 훌륭하다

저녁 만찬은 난징루 구시가(舊市街) 주택을 개량한 중식당 오미관이다. 시설도 매우 훌륭하고 음식도 정갈하다. 큰 접시에 수북하게 썰어온 김치가 새삼스럽게 맛나 보인다. 음식도 중국 고유의 맛과 향을 살리면서도 특유의 향채 냄새로 인한 거부감은 들지 않도록 퓨전화 되어 있었다. 보통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지 아닌지는 일행 중 제일 연장자의 입과 손을 보면 금방 식별이 가능했다. 냄새가 맞지 않으면 눈이 감기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인상이 찌푸려지기 때문이다. 이후부터 그 음식은 동종의 입맛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사실상 배제되는 왕따 음식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날 마지막 일정은 황포강 야경 감상이다.

淸代末부터 국제교역도시로 성장한 상해는 중국에서 가장 개방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혼재하는 곳이다. 건물 역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조차지역에

따라 건축양식이 상이한 것들이 많다.

황포강 야경

그러나 황포강 지하를 건너 푸동지구를 가면 완전히 다른 맨해튼식 고층건물들로 밀집되어 있다. 현재 신축 중인 123층 건물이 완공되면 동방명주탑을 밀어내고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듯하다. 유람선에 올라가니 강바람이 제법 쌀쌀하다. 모두 준 동절기에 해당하는 옷을 껴입고 갔는데 가장 연장자인 조씨 할머니만 홑옷 차림이다. 여분의 내 바람막이를 입으시라고 내어주니 한사코 손을 흔드신다.

에궁, 그래도 여자라고...^^     


동방명주탑

상해 사람들이 어머니의 강으로 부르는 황포강은 길이 160km에 달하는 양쯔강 하류를 말한다.

1만 톤급 선박이 다닐 수 있도록 대규모 준설공사를 하여 강과 인접한 지역에 물자를 실어 나르고 장강삼협댐까지 크루즈 여행이 가능한 관광로이기도 하다.

요금이 장난 아니게 비싸다는 것이 걱정이긴 하지만 언젠가 꼭 한 번 여행하고 싶은 코스이다.

    

유람선에 올라 바라보는 푸동의 야경은 인위적이지만 환상적이다.

마치 Contemporary Art를 보는 듯하다.

사실 현대미술이란 것도 어떻게 보면 별것도 아니다.

다만 어떤 대상을 정밀하게 그리거나 색채에 변화를 주거나 빛의 양감에 따른 사물의 변화를 표현한 방법들과는 달리 다원적 요소와 소재를 복합적으로 섞어놓았거나 의미를 부여한 미술 언어일 뿐이다.

단순하게 보면 그렇다.

황포강 야경 역시 물과 배와 곡선으로 휘어 돌아가는 강 끝의 선들이 하나의 기본적 구도로 잡혀있고 여기에 어둠이라는 무대 효과와 직사각 형태인 건물에서 각양각색의 불을 밝히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여기에 어둠이 깊어질수록 짙어지는 하늘과 물빛, 그리고 조명에 비치는 사물들의 변화가 보는 사람들에게 복합적인 감상을 갖게 한다. 단순 야경 감상자가 다르고 연인들끼리 다르고 시인과 화가가 보는 느낌이 다르다.

또한 각자 사고와 직업, 또는 현실에 당면하는 상황에 따라 받아들이는 감정과 미적 기준이 다를 것이다. 따라서 황포 야경을 Contemporary Art 같다고 궤변 하는 내 시각도 다양한 느낌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란다.   


사실 아무 형태나 사물을 가지고 미술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술 언어는 사회적, 철학적, 문화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적이고 일반적인 도시미가 조명의 색상과 형태에 따라 또 다른 모습을 연출하고 주변 사물들의 면과 선에 의해서 직관적이고 아름답게 변모하게 되는 것 역시 하나의 미술이라고 인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야경은 중국 어느 도시를 가나 존재하는데 그중에서도 상해 황포강 야경이 가장 범위가 넓고 화려하다.

일종의 유행인지 관습인지 아니면 도시 홍보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악귀를 쫒고 복을 부르는 홍등(紅燈)을 밝히는 관습이 그대로 이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다.

Howard Johnson Hotel 객실

마지막 날의 호텔은 Howard Johnson Hotel이다. 여행 중의 과식에 질린 사람들이 간단한 식사를 원한다. 그래서인지 점심은 황포강가의 유명한 만두집을 갔다. 뭐, 미국 언론에까지 소개된 세계적인 평판과 명성이 자자한 곳이란다.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았다. 식당 매니저가 상당한 패셔니스트 같아 보인다. 노란색으로 염색한 턱수염을 단정하게 손질하고 검은색 슈트와 조끼까지 잘 차려입었다.     

우리는 대략 4~5 종류의 만두를 먹은 것 같다.

그러나 모두 쥐 알 만한 것들이어서 그동안 위장 평수를 넓혀놓은 과식의 영향으로 전혀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그러나 누구도 말을 하지 못한다.

음식 양을 줄이자고 수차례 항의(?)했기 땜시로.....!

딘타이펑 만두. 맛은 있었다

음~ 맛도 없는 기내식이 생각나는 것은 왜 일까?

더럽게 비싼 황포강변 커피로 입안 행구고 공항 주변 향란이네 가게로 곡물을 가지러 갔다.

가이드 얘기로는 참깨를 모두 세어놓았다고 하는데 개수가 맞는지는 확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조와 콩까지 구입했기 때문에 세어 보려면 10년 뒤에나 한국으로 돌아올 것 같아서 깨끗이 포기해 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람 마음속은 헤아릴 수 없어서 그것까지는 뭐라고 말할 수 없다.

혹시 시간 날 때 세어보는 사람도 있을랑가는 모르겠지만서리......


제주도 서남방을 지나 서해를 날아온 MU5051기는 무사히 인천공항에 우리들을 내려놓았다.

11번 BAGGAGE STORAGE에서 각자 중국에서 밀수한 곡물 보따리와 캐리어를 챙기고 손 한 번씩 잡아보고 빠이~ 빠이~다.

언제 인연 닿으면 또 봐유 들!^^

그렇게 우리 일행의 중국 황산 여행은 끝났다.

이제 각자 자신들의 삶터에서 현실과 부딪쳐야 한다.     

여행기간 내내 활발하고 능동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안내한 천만명 중에 하나도 고르기 쉽지 않은 김싸장님

수고 했어유^^

요즘 내 주소지가 멍청도라서 유~가 붙는 걸 이해하여 주세유^^

see you again!

짜이지엔!

또 만나유~우^^

감사해 You^^


中 國 旅 行 後記

     

기행문을 쓰는 것은 참 녹록지 않은 일이다. 과정과 배경을 모두 기억해야 하고 개인적 느낌과 동행인들의 생각도 캐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낯선 환경과 사람, 그리고 각종 관습 및 지역에 깔린 역사도 함께 끄집어내야 한다.

더불어 사진도 찍어야 하고 메모도 해야 한다.

머리통 속의 기억소자를 가혹하게 부려먹지 않으면 징검다리 기행문이 되기 십상이다.

또한 관련 학자가 아닌 고로 써놓고 보면 숫한 오류가 튀어나온다.

이러한 모든 것을 꿰어 맞추고 문장과 맞춤법까지 검토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요즈음에는 스마트폰이라는 것이 있어서 시간 날 때마다 끄적거리면 자동으로 컴퓨터와 동기화되어 연동된다.

그것을 모아 문장을 이어 맞추어 나가면서 그나마 많은 시간이 절약되었다.

다만 노안을 혹사 한탓에 안과 병원만 여러 차례 다녀왔다는 사실......ㅉ!     

어쨌건 기행문을 쓰는 것을 남들이 보면 참 할 일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업 작가가 아닌 바에야 죽치고 글을 쓸 시간은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남들이 잘 때나 쉴 때 내 손가락과 눈깔, 그리고 머리통을 부려먹기 때문에 어딘가는 파손되어 얼마간의 불편은 감수해야만 한다.


또 하나, 남들이 소홀이 하거나 인식 못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공부하는 재미이다.

계획된 답사 형식의 여행이 아닌 불과 며칠 동안의 단체 여행에서 여행지에 대한 기억과 각종 사안에 대한 내용을 세세하게 기억하거나 파악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여행 중 망막에 맺혔던 몇몇 가지를 제외하면 소소한 것들은 짧은 시간 내에 모두 날아가 버리고 아무 의미도 없는 단순 구경에 불과했다는 결과만 남게 된다.

리장 나시해의 여강말

그러나 기행문을 쓰게 되면 하나하나씩 기억을 되살리게 되고 여기저기 흩어졌던 조각들을 주워 모으다 보면 어느샌가 주~욱 연결된 스토리가 구성된다.

그래서 장기간 동안 그 스토리가 유지되어 같은 비용이라도 훨씬 밀도 있는 여행이 되는 셈이다.

이것도 순전히 나와 비슷한 종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이라는 것도 당연하다.


또 하나,

도대체 여행이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비싼 돈과 시간을 소비해가며 여행을 다니는가

물론 각 개인의 추구하는 목적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 질 것이기 때문에 ‘이렇다’라고 단정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행을 하는 목적은‘보는 즐거움’‘만나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이 주류를 이루고 그 즐거움 속에 내재된 사실과 배경, 그리고 역사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그래서 힘들어도 기꺼이 기행문을 쓴다.

나름의 자족감도 한몫한다는 것 또한 부인하지 못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것을 남에게 알려주는 것도 즐겁다.

그래서 그 재미를 공유하는 것 역시 값어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참된 여행은 ‘行雲流水와 같아야 한다’라고 하더라.

그러나 현실적으로 구름과 물이 흘러가듯 여행할 수 있는 사람은 道家人 밖에 없지 않을까?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횡으로 연결된 사슬에 얽히거나 꿰어져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리라. 현대인에게 있어서 여행은 무거운 인생과 고단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일종의 휴식이자 일탈이며 제한된 자유를 즐기는 시간이다. 다만 그 제한적이고 한시적인 시간 동안 무엇을 어떻게 즐기고 또 무엇을 얻을 것인가는 각자 개인의 성격과 추구하는 가치관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여행 떠나기 전에 보았던 왕벚나무 꽃망울은 불과 4~5일 사이에 만개하고 바닥에 하얀 점처럼 화편들을 뿌려놓았다. 앞산 나무들도 물 빨아올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급속하게 이파리들을 피워 올린다.     

봄이 실종되어 버리고 초여름으로 직행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계절의 변화 속도가 빠르다.

항상 그렇듯이 여행기간 밀린 일들이 순차적으로 다가온다. 어떤 것은 겹쳐서 쌓여있다.

4박 5일의 짧은 공백이었지만 할 일은 황산(?)처럼 밀려든다.  생업도 돌봐야 하고 시골 농가 밭도 갈아엎고 거름도 주고 파종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글도 쓴다.

뭐 싸고 뭐 볼 시간도 없다.

청대 옛거리 붓 상점. 중국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을 소비하는 나는 내 나름대로 즐겁다. 왜냐하면 뭔가 얻어지고 남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내 머리빡 뇌세포에 황산에 대한 미주알고주알이라도 기억될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지독한 신생 물질을 발산하던 그 짱깨 녀석도, 황산에서 졸고 있던 공안 녀석도,

청대 옛 거리 시장에서 암팡진 모습으로 앉아있던 강아지도 말이다.


이 여행을 기획하고 안내하였던 친구 김사장의 명복을 빈다.

너무나도 활달하고 건강하고 능동적이었던 이 친구는 2016년 5월 1일 세상과 이별하고 말았다. 불과 5개월 전 ‘이형 왜 옆구리에 뭐가 걸리적거리지?’라고 묻길래 ‘그쪽은 간이 늘어져 있는데 병원 가서 검진해봐’라고 무심히 대답했는데 불과 4개월 남짓만에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 버렸다. 이 글을 쓰면서도 맨날 그립고 아쉽고 가슴 저리고 금방 어디선가 ‘이형’하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 아마도 하늘나라에서도 그 특유의 붙임성과 활발함으로 여전히 천국을 활보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한번 그의 명복을 빌어마지 않는다.     


                                        2016년 8월 마지막날 관악산 밑자락에 사는 이정석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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