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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Dec 25. 2016

       가을 엘레지

이 가을의 끝을 잡고 겨울로 들어간다. 그리고 또 새봄을 기다린다

이 가을도 끝을 맞았다.

어느덧.......이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엊그제 봄꽃을 본 것 같고 여전히 지난여름의 그 지독했던 더위를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데 매년 이 시기쯤은 뭔가 모를 우울한 감상의 골짜기에서 항상 허우적거린다.

이제는 그럴 때도 지났건만,

언제까지 그럴 것인가......

아마도 내가 가진 사고와 정서, 그리고 삶에 대한 가치관이 변환되지 않는 한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지속될는지도 모른다.

드물게 노래를 불러야 할 때가 있으면 나도 모르게 늘어지고 슬픈 노래만 골라진다.

가끔 피아노를 뚱~땅 거리면 그 소리마저 유난히 애상적으로 들린다고 딸내미가 핀잔을 준다.

육신은 늙어가도 감성은 여전히 철딱서니 없는 사춘기의 영역에 머물러져 있는 것일까!

창밖에 가을비가 내린다.

늦가을의 추적거리는 비는 유난히도 처량스럽다.

잿빛 하늘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과 빗물에 적셔져 널브러진 낙엽들이 새삼스레 처량해 보인다. 이미 진작부터 나뭇잎을 떨궈냈던 가지에는 이파리 몇 조각만 달랑  매달려 있다. 축축하고 스산한 기분은 마치 기형도의 시를 읽은 것처럼 우중충하게 젖어 들어 간다.


게다가 나라까지 온통 뒤집혀 난리통이다.

전국에서 촛불이 불타오르고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북악산 주인을 질타해댄다.

세종대왕님과 이순신 장군님이 오랜만에 백성들을 모아놓고 치국의 교훈을 설파하시는 듯하다.

이런저런 온갖 수상하고 추잡한 소문은 설왕설래하다가 사실과도 같다고 하더라! 어떤 男한테 무꾸리당하더니 어떤 女한테 또 돌림을 당했다더라!

국민의 뚝뚝 떨어지는 피와 같은 혈세도 그 도적女에게 順順히 實하게 안겨 줬다더라!


그것도 모자라 부자들 등을 치고 회유하여 간도 꺼내먹었다더라!

같이 노나먹었는지 후일을 기약한 밀약이 있었는지는 오로지 神만이 아실 거라고 하더라!

충견 3마리를 18년 동안 애지중지 키웠더니 그사이 여우가 되어 지금은 도술까지 부린다더라!

40년 전부터 맛난 먹이로 길들였던 충견은 아홉 개의 꼬리가 달린 기춘 여시로 변신하여

조고(趙高)와 이사(李斯)가 얼굴 붉히고 도망갈 정도라고 하더라!

병신년 12월 어느날 역사의 현장에 내 생각과 흔적을 남기기 위해 참석했다. 
흔히들 촛불민심이라고 하더라. 땅거죽을 뚫고 나오는 봄날의 풀잎같이 민초들의 거대한 함성은 아무도 막을수 없다 하더라

세월이 하 수상한 날,

생떼같은 청춘들이 떨어진 화편처럼 날아가 버릴 때에도 존귀하신 그 공주님은 주름 골짜기를 메우시고 연속극 보시고 분첩 바르시는 것이 워낙 중대사라

5,000만 명 중 304명은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셨나 보더라! 토해낸 피와 눈물이 흐르고 넘쳐 대한민국 강산은 온통 붉은 비탄으로 덮여 버렸단다.

......!

이것이야말로 시일야통탄대곡(是日也痛歎大哭)아니더냐!

......!

이래저래 이 가을은 우울하고 서글프고 어이도 없다. 이 여자의 평소 언행을 보면,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망상에서 전혀 깨어나고 싶지 않은 것 같고, 심지어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는 절대자 야훼와 같은 의식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웃을 수도 화를 낼 수도 없는 희한 뻑적지근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국가란 어머니와 같은 것이다'(소크라테스 )

'국가는 최고의 도덕적 존재이어야 한다'(H. 트라이치케)

'국가는 시민의 하인이지 주인이 아니다'(J.F. 케네디)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이 통치한다고 생각하게 하라. 그러면 그들이 통치받게 될 것이다'(W. 펜)

'국가의 멸망은 많은 경우 도덕의 퇴폐와 종교의 경모(輕侮)로부터 이루어진다'(J.S 스위프트)

근데 날파리들만 걸려들면 어떻하나?

등 등의 수많은 통치자나 철학자들의 교훈을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의 존재근간인 대한민국 헌법조차 깔아뭉개버리는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보이시는 분이다. 이것은 노자가 말한 최하등급의 통치자 즉, '통치자가 신망을 잃으니 백성은 통치자를 업신여기고 믿지 않는다(其次 侮之)'와 다름 아닌 것이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는 퇴임을 아쉬워하는 국민들이 60%에 가까운 지지를 보내고 있지만 우리는 4%~5%의 지지율에 불과한 고집불통 밴댕이 대통령을 모시고 사는 서러운 백성이다.

   

지난 대선 때 여성 대통령을 뽑는다는 전제를 두고 우리 가족이 대충돌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생전 단 한 번도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던 마누라가

- 이번에 박근혜 찍을 거야

라는 선제공격을 날렸기 때문이다.

내가 그 여자가 속한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의 투표권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다. 또한 자기 동창들이나 친구들도 이번에 1번을 찍기로 했기 때문에 무조건 그렇게 할 것이란다.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다. 두 딸은 물론 장모님한테까지 전화하여 박근혜를 찍어야 하는 당위성을 역설하시고 강요하시는 것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여자도 대통령을 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동성적 동질감 내지 유대감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아마도 내 짐작으로는 남존여비 사상이 여전히 잔존해있는 이 땅의 여성들이 수많은 남성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여자 대통령을 보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껴보려는 잠재되어있는 콤플렉스의 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두 딸의 선택이 어떤 방향이었는지는 대충 알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마누라가 누구를 찍었는지는 알 수 없고 지금까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요즘 닭이 괴롭다. 더군다나  AI까지 덮쳐서 큰닭 작은닭 모두 죽을 맛이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속담이 있다.(꼬끼요! 하고 우는 것은 수탉과 암탉 구분이 없다)

가부장적이고 남존여비 관념이 강고한 사회에서 남자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고 여자가 설치면 집안일이 제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빗대는 말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남자를 바깥주인, 여자를 안주인이라고 하듯 여자는 집안일이나 충실하게 하고 남자는 家長으로서 가족의 총괄적인 책임을 가진다는 통념이 굳건하게 자리 잡은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자가 나설 수도 없지만 나선다고 하더라도 남자들이 상대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집안일이 제대로 되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시절은 우리 아버지 시대를 지나면서 진작 종식되어 버렸고 현시대까지 그런 정도의 봉건적이고 보수적인 사고를 보유하려면 아마도 간이 서너 개 되지 않는 한 거의 꿈도 꿀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우선 나부터 맨날 마누라 눈치를 살피고 어쩌다 소래기라도 들을라치면 납작 엎드려 방어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전의 황제적 가장의 권위에 대한 속성이 완전하게 멸실된 것은 아니다. 사회는 여전히 남성 중심으로 유지되는 '남존여비' 사고가 고착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념이 여전한 사회에서 어찌어찌 최초로 여자 대통령이 탄생되긴 했는데 결론은 '아니올시다'로 귀결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또 최초로 제1야당의 여성 대표가 선출되었는데 이 또한 어깨에 너무 과도한 힘이 들어갔는지 중요한 상황에서 몇 번이나 헛발질을 세게 휘두르는 바람에 기똥찬 별명을 국민들로부터 하사 받았다는 것 아닌가!

일명 추키호테.......

어쨌거나 진정한 양성 평등시대로 가는 길목에서 북악산 아짐씨가 개판 똥탕을 쳐버리는 통에 당분간 우리나라 여성들의 잠재된 숙원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흘러야 되지 않을까 싶다.  


날씨는 여전히 꾸부렁하고 하늘에는 회색 구름이 낮게 깔려있다.

바람 한 점도 일지 않는 하늘은 요지부동 구름을 붙잡고 있는 듯하다.

마누라는 교회에 가고 딸내미와 아들 녀석은 저녁이나 되어야 돌아올 참이다.

모처럼 눈치 보지 않고 맘껏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최적의 기회이기도 하다.

무슨 음악을 들어야 할까?

나에게 있어서 음악은 일상과도 같지만 들을 때마다 선택의 고민이 앞세워진다.

쇼팽 - 1810~1849

쇼팽, 모차르트, 말러 등이 주르륵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쇼팽, 그 연약하고 셈세한 손가락으로 감각적 선율을 튕겨내는 모습이 연상되지만

오늘 기분에는 그리 적합하지는 않을 것 같다.

겨울 속으로 사라져 가는 가을 끝머리에, 건반악기보다는 찰현악기의 질감과 소리가

훨씬 더 고즈넉하고 센티멘털한 감정을 살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평생 우울하고 비감한 심사에 젖 어살던 차이콥스키를 선택하여 그 감정에 나를 이입시켜볼까?

아님 조증 환자에 가까운 가벼움과 발랄함,

그리고 재기를 넘어 천재도 넘고 신의 경지에 도달한 콩나물 요리박사 모차르트?

내가 제일, 최고, 무조건 좋아하는 모차르트이지만 지금 이 시간 이 기분엔 그것도 좀 그렇다.  

 Edward Elgar - 1857~1934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E minor. op. 85)과

현을 위한 세레나데(Serenade in e minor Op.20)를 저울질하다가 현을 위한 세레나데를 골랐다.

첼로 협주곡을 연주한 미샤 마이스키가 유난히 늘어지기 때문에 짜증 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미샤 마이스키가 연주한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도 평균에 비해 4분가량 늘어진다)     

세레나데는 원래 밤에 듣는 소야곡이라고도 하고 녹턴이라고도 하지만

리스너의 입장에서 그딴 것이 무슨 쓰잘데 없는 형식일 것인가!

낮이고 밤이고 봄이고 여름이고 자신의 감정이 요구하는대로 그냥 선택해 들으면 그만일 것이다.   

이 곡을 만든 엘가의 이력은 다른 여타의 음악가들과 비교하면 매우 평범하고 보잘것이 없다. 음악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은 하고 있었지만 작곡을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고 피아노 교습이나 해주던 평범하기 그지없는 청년이었을 뿐이다. 또한 그 누구누구들처럼 천재성을 타고나거나 부모에게서 예술적 유전자를 물려받은 음악적 환경에서 살지도 않았다. 그냥 모범적이고 조용한, 전형적인 영국인으로 태어나고 자랐을 뿐이다. 적어도 그의 아내인 앨리스(Caroline Alice Roberts)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엘가는 대기만성형의 전형으로 꼽히기도 한다. 독학으로 공부한 작곡 실력으로 42세에 첫 작품을 발표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황실로부터 남작을 하사 받았을 만큼 음악가로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29세의 엘가가 연상의 앨리스를 만난 것은 대학시절이었는데 이 앨리스는 요즘 흔한 말로 내조의 여왕이었다. 교양 있고 사려 깊은 앨리스는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는 엘가를 항상 격려하고 응원했는데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긍정적인 조언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중은 지극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며 앨리스가 갑자기 사망한 이후 오랫동안 작곡을 하지 않을 만큼 엘가의 상심이 컸다고 한다.    

Caroline Alice Roberts - 시골 촌뜨기 엘가를 성공의 길로 인도한 내조의 여왕이다.

엘가의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위풍당당한 행진곡’이다. 1902년 에드워드 7세(Edward Ⅶ)의 대관식에 사용하려고 작곡한 곡인데 5번 곡 중 1번이 가장 많이 연주된다. 영국은 물론 각국 대통령의 취임식 때 많이 연주되고 그것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엘가 역시 이곡에 가장 큰 애착심을 가지고 있는데 ‘일생에 단 한 번밖에 나올 수 없는 곡’이라고 술회하였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곡이 황실에 헌정된 이후 영예로운 기사 작위는 물론, 영국 최고훈장인 공로훈장과 대저택까지 하사 받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작은 초라하였지만 말년은 화려하고 위풍당당하게 마감한 것이다. 이 곡은 매년 영국에서 열리는 클래식 음악제에 마지막 엔딩곡으로 연주되는 것이 관례인데 빈필하모니 신년음악회의 ‘라데츠키 행진곡’과 같이 관객이 손뼉 치고 환호하며 하나가 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서양에서 돌아다니는 말 중 ‘영국은 걸출한 음악가가 없고 미국은 철학가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엘가의 출현은 영국인들의 자존심을 세워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결국 영국 왕실은 시골 촌뜨기 출신인 엘가에게 귀족의 지위까지 하사하게 되고 엘가 역시 그야말로 위풍당당한 음악가로 인정받는 출세를 하게 된 것이다.     


현을 위한 세레나데는 결혼선물로 엘리스에게 헌정한 곡이다.

이 곡을 들으면 우선 마음이 편안해지고 서정적 감상에 빠지는 듯하다.

특히 소슬한 늦가을에  따뜻한 차를 마시며 듣는 맛으로는 그지없이 안성맞춤이다.

마치 우울한 감정에 따뜻한 바람을 살랑살랑 뿌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1악장은 엘가 특유의 유니크한 목가적 서정성이 마치 골짜기를 돌아 나오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느껴진다. 선율 역시 유려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런데 2악장을 들을 때는 사랑과 복수를 위해 미친듯한 광기를 발산하는 히스클리프가 바람을 맞고 서있는 폭풍의 언덕이 연상된다. 왜 그럴까? 암만 생각해도 세레나데와 히스클리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는데 말이다.


본래 세레나데라는 음악은 낭만적이고 호소력 있는 ‘늦은 밤의 음악’으로서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거나 유혹하기 위한’이라는 전제가 붙는 형식이기 때문에 대체로 부드럽고 서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잡을 수 없는 집시의 영혼을 가진 히스클리프의 음산하면서도 슬픈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폭풍의 언덕의 성격과는 뭔가 분위기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연유가 되었건 분명 그러한 연상이 연결되는 동기가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폭풍의 언덕’을 읽을 때 이곡을 자주 들었다는 연관성, 또는 엘가와 에밀리 브론테가 거의 동시대 사람이어서 정서적 동질성을 공유했을 일말의 가능성도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어떤 생각이나 느낌은 순전히 각 개인의 몫이므로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2악장을 들을 때마다 바람이 몰아치는 폭풍의 언덕이 연상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만의 주관적 느낌일 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3악장은 어디선가 솨~아 하는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다.

완만한 구릉에 심어진 밀들이 파도치듯 춤을 추며 바람에 쓸려지는 듯한 광경처럼 말이다.

부드럽게 쓸려오는 그 바람에 앨리스를 사랑하는 엘가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기도 하다.     

혹자는 엘가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가 모차르트의 그 유명한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무지크'나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보다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세레나데를 의식적으로 모방한 차이콥스키에 비해 엘가의 세레나데는 담백하고 짧지만 나름의 독창성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도 내가 이 곡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엘가의 세레나데는 모차르트처럼 화려하거나 차이콥스키의 장식적인 선율도 없다. 그냥 부드러운 바람처럼 속삭이고 청순한 시골처녀의 미소같이 상큼하고 신선하다. 그래서 누가 뭐라 하든 이곡을 사랑하고 애청하는 것이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내가 항상 흥얼거리는 노래가 있다.

희한하게도 봄, 여름에는 거의 생각나지 않다가 가을만 되면 타이머를 맞춘 듯 자동으로 연결이 된다.

<세월이 가면>

남매와 같이 이름도 비슷한 박인환의 詩에 박인희가 노래한 곡이다.

가을을 노래하는 음악이야 세상에 쌔고 쌨지만 나는 이곡을 유독 좋아하고 애송하는 편이다.

우선 감각적이고 회상적 감성이 켜켜이 박혀있는 박인환의 詩가 너무 좋다는 것이고,

서정적이고 청아한 박인희의 목소리가 짜 맞춘 듯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 앞에서 단 한 번도 불러본 적은 없지만 내 나름대로의 감정과 호흡으로 이 곡을 자주 부르는 편이다. 특히 이런 가을날에는 시도 때도 없이 흥얼거린다.

박인환 - 1936~1956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의 급작스러운 요절 후 한동안 ‘명동의 엘레지’라는 이명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다고 한다. 엊그제까지 외투 깃을 세우고 명동을 활보하던 박인환의 갑작스러운 요절과 함께 곡의 가사 또한 애잔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후리후리한 키와 멋쟁이 미남이었던 박인환의 애칭은 ‘명동백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원래 명동백작은 ‘은성 주점’의 말뚝이었던 소설가 ‘이봉구’가 아니었던가? 백작 별명이 2명이라고 해서 안 될 것도 없겠지만 이봉구가 박인환보다 11살이 더 많으니 큰 백작, 작은 백작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서른을 갓 넘은 빛나는 젊음과 발랄한 재기가 넘쳐났던 젊은 예술가의 요절은 그와 인연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슬픔과 함께 명동의 슬픔이기도 했던 것이다.      

 <세월이 가면>은 일반적으로 가장 크게 히트한 박인희의 곡을 기준으로 삼지만 옛 연인에 대한 회상적 시어(詩語)가 너무 감각적이고 공유의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이 곡을 녹음하였고 최초의 녹음은 당연히 나애심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1959년 현인 녹음이 가장 먼저인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1956년 5월 나애심이 녹음한 유성기판이 2015년에 새롭게 발견되면서 대중문화사가 새롭게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1959년 현인이 처음 녹음한 것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박인환의 생전 술친구였던 나애심이 가장 먼저 녹음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근자에 나애심의 유성기판이 새롭게 발견되면서 두 사람의 인연으로 인한 당연성을 명확하게 확인시켜 준 것이다.     


2015년 발견 된 나애심 유성기판

<세월이 가면>은 나애심 이후 여러 가수들이 각자의 스타일로 음반을 발표하였는데 1959년 현인, 1968년 현미, 1972년 조용필, 1976년 박인희가 차례로 음반을 출시하였다. 그러나 1956년 창작 당시의 가사 원형에 가장 가까운 것은 나애심의 녹음이다. 다른 곡들은 일단 제목부터 <세월은 가고>, <세월은 가도> 등으로 원작과 차이를 보이기도 하고, 원작 가사 일부를 완전히 바꿔버리기도 했다. 반면 나애심의 곡은 조사 한 군데를 제외하고 박인환의 가사와 그대로 일치한다.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과거)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박인희의 녹음은 16, 17행이 생략되었고 8행이 ‘과거’에서 ‘옛날’로 변경되었다)     


박인환의 요절 후,

<세월이 가면>은 그의 갑작스러운 요절과 맞물려 한동안 명동을 상징하는 곡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헤어진 옛 연인을 회상하는 아스라한 분위기는 누구에게나 공감을 유발할 수 있고 당시의 예술사조나 시대상과도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에 대한 신화 같은 전설에 관한 사항은 사실과 다른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어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자료와 앞, 뒤 정황을 따져보면 그 전설 같은 신화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현재 인터넷 포털 서비스를 비롯한 흘러 다니는 자료들 대부분이 팩트와 다른 내용을 갖고 있고 그 잘못된 내용은 여전히 그렇게 퍼져 가고 있는 현재형이다.

박인희 - 1945~최근 35년만에 귀국 콘서트를 하였다

그 신화적 전설은 다음과 같다.     

1956년 3월 13일 저녁, 명동의 경상도 집에서 박인환은 절친인 작곡가 이진섭과 영화배우 겸 가수인 나애심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잔이 몇 번 돌아가고 취기가 오르자 일행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하였다. 그러나 나애심은 일행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하고 이를 넘겨다 본 이진섭 역시 즉석에서 오선지를 그리고 작곡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곡을 나애심이 몇 번 흥얼거리더니 이내 특유의 애잔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고 술집에 동석하였던 다른 사람들까지 환호하고 따라 불렀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그 시간 이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테너 임만섭과 소설가 이봉구가 합석하였는데 테너 임만섭이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르자 지나가던 행인은 물론, 인근 상점 사람들까지 몰려들어 졸지에 즉석 리사이틀이 벌어졌고 이후 이 곡은 명동의 낭만을 상징하는 노래로 각인되어 버렸다고 한다.  

......!!

하지만 사실은 상당 부분 픽션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근대 대중문화 사학자들의 주장이다. 그 주장들을 뒷받침하는 자료들이 군데군데에서 발굴되는 중이어서 그 신화는 신화로서만 존재하고 팩트로서는 탈색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있다. 다만 전설과 신화가 대부분 각색되고 미화되듯이 불과 31년밖에 살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가버린 박인환에 대한 연민과 그 천재성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추모의 정이 그렇게 스토리를 만들어 버렸을 것이라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또 하나,

<세월이 가면>을 ‘명동의 엘레지’라고 한 것은 당시의 언론자료에서 많이 확인할 수 있는데

‘엘레지’란 본시 슬픈 노래 즉, 비가(悲歌)로 번역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또는 ‘슬픔의 시’ ‘죽은 이에 대한 애도의 시’를 뜻하기 때문에 박인환 사망 2달 후인 1956년 5월에 녹음한 ‘나애심’의 노래가 출판된 이후 그렇게 불렸을 가능성이 정황상 보다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세월이 가면>의 즉흥적 작시와 작곡에 대한 전설은 당연히 바로잡아져야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근대서지 통권 제9호

그 전설적이고 신화에 대한 나름의 반론은 다음과 같다. 근대서지 2014년 상반기호(통권 9호)에 의하면 1956년 3월 12자 주간 희망이라는 잡지에 소설가이자 언론인인 송지영이 <명동의 샹송>이라는 글을 기고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기고문에는 박인환과 이진섭이 ‘명동을 후줄건히 적실 샹송풍의 노래를 하나 만들어 보자’라고 의기투합 하였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송지영의 기고문이 실린 <주간 희망>이 출간된 바로 다음날인 1956년 3월 13일 경상도라는 술집에서 즉석 시작(詩作)과 작곡(作曲)은 물론, 공연까지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물론 3차원적 정신세계를 소유한 예술가들이 즉흥적 시작(詩作)과 작곡, 또는 공연까지 완결할 가능성은 충분히 확보하고 있을 수 있지만 전설과 신화가 으레 그러하듯 약간은 억지스러운 점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박인환이 세상을 떠난 며칠 후인 동년 4월 3일 같은 잡지에 <세월이 가면, 명동 샹송이 되기까지>와 동년 6월 1일 발표된 <아리랑>지의 편집 후기를 살펴보면 경상도 술집에서 벌어졌다던 전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 사실일 것으로 판단된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이 이미 진작부터 시상을 다듬어 왔던 것인데 3월 13일의 술좌석의 취흥에 겨워 발표한 것이라고 전하는 이도 있고 원래 박인환과 이진섭이 ‘명동을 후줄건히 적실 샹송을 만들어보자’라는 의기투합 속에 박인환이 하룻만에 시를 완성하고 이진섭은 열흘에 걸쳐 작곡한 것이라는 자료와 증언도 있다.       

다른 또 하나의 증언은 2015년 월간조선 4월호에 실린 박인환의 장남 박세형의 인터뷰이다. 박세형은

 <세월이 가면>의 악보를 본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됐나요? 세종로 집으로 아버지와 이진섭 선생이 왁자지껄하게 오셨습니다. 그날 8절지 도화지에 〈세월이 가면>이 적혀 있었는데 좀 특이했어요. 콩나물 대가리 같은 음표는 없고, 아라비아 숫자만 잔뜩 있었거든요.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음표더라고요. 예를 들어 ‘도·미·솔’ 하면 ‘1·3·5’라는 식으로......‘     


결론적으로 <세월이 가면>은 경상도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여러 자료와 증언으로 밝혀지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미 진작부터 詩와 작곡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날(3월 13일) 술좌석에서의 취흥이 상황을 그렇게 만들어간 것이며 그 과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즉흥적 시작(詩作)과 작곡(作曲)이 이루어진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실 詩는 즉흥적으로 뽑아낼 수도 있지만 작곡은 가사에 맞추어 화음은 물론, 수학적 계산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즉흥적 작곡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음악 전문가의 의견이라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박인환의 절친 이진섭

어쨌건,

그렇거나 말거나 그딴 것들은 나에게 아무 소용도, 의미도 없다. 문학사를 논할 것도 아니고 시대사를 따질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뭐가 의심스럽거나 근거가 불확실하면 이리저리 찾아 헤매고 뒤져대고

미주알고주알 따지는 부박한 내 천성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을 뿐인 거다. 그러한 헛짓거리에 시간을 낭비하는 숙명(?) 또한 벗어날 수 없는 팔자소관이라는 점도 확실하다. 돌아가신 우리 엄니가 맨날 하신 말씀이 있다.

- 우리 막둥이 하고 털풍이(둘째 형)하고 반반씩 섞   었으면 참 좋을텐디......

털풍이는 우리 식구들이 공통적으로 부르는 내 작은형의 별명이다. 1년에 한, 두 번뿐인 그 귀한 명절 옷을 한벌 사주면 작은 형은 2~3일도 못 가서 어딘가는 찢어먹고 구멍을 내고

기차표 고무신보다 훠~얼씬 질긴 타이어 표 고무신을 사줘도 단 며칠 만에 바닥이 달아난다.

나와 큰형은 1년도 더 신는 고무신을 불과 2~3일 만에 작살내서

새끼로 동여매고 신고 다니다가 결국 비짜루로 등짝을 얻어맞고 찔찔 울고 있던 작은 형.

새 학기 책을 담은 책보를 허공에 내돌리다가 냇물에 퐁당! 빠뜨려서

부풀어 터진 교과서를 아궁이에서 말리고

그것을 어머니는 일일이 다리미로 다려서 책을 재생하기도 했었는데......

1년을 사용한 교과서가 마치 새 교과서처럼 깨끗하여 맨날 이웃 아줌마들이 내 책을 가져갔던 것과 비교하면 둘째형과 나의 성격은 완벽하게 다른 별종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이한 성격과 행동양식에

시골집 삼순이가 낳은 새끼 강아지 어디가서 잘 살고 있는지...

- 아이고~ 한 뱃속에서 나왔는데

  어찌 그리 다를까 잉!

하고 웃으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내 별명은 빤닥과 꼼꼼쟁이다.

우리 엄니가 붙여주신 별명이다.

빤닥은 아버지가 맨들맨들하게 면도칼로 밀어주신 머리빡이 햇볕에 빤들빤들 빛이 나고 그 모습이 야물어 보인다고 붙여주셨고 뭐를 시키면 고드래 파고 집중해서 끝까지 마무리하는 완벽성(?)에

- 사나자식이 그렇게 꼼꼼하면 불알 떨어진다.


라고 걱정 겸 칭찬 겸 해서 얻어진 별명이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 쟈는 밥 굶고 살지는 않을 거구먼?

- 근디 우리 털풍이는 장개가서 각시한테 쫓겨나지는 않을랑가 걱정이여

.....!

그런 부모님의 걱정과는 달리 털풍이 형은 현재 나보다 훨씬 부자고 부부 금슬도 더 좋다.

또한 그 털털 무지한 성격 때문인지 주변 사람들과 갈등도 거의 없는 태평성대의 한가운데서 유유자적하신다. 그리고 자식들과의 사이도 항상 절친 사이처럼 그지없이 좋게 유지하는 팔자 좋은 사람이다.


가끔 인사동을 어슬렁거리다가 화랑에 들어가 보면 항상 새로운 느낌을 갖는 작품들을 접하게 된다.

작가들마다 나름의 창의들이 가득한 작품들이 벽면 가득히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뇌와 불면의 시간을 가졌을지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순식간에 어떤 모티브가 잡혔을 수도 있고 골백번 구상을 더듬다가 초점이 잡혔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언어는 분명 작품 속에 박혀 있지만 그 언어를 캐내야 하는 것은 오롯이 감상하는 사람들의 몫일뿐이다. 사실 옛날에는 굳이 작품을 분석하고 그 의도를 파악하려고 맞추어지지도 않는 지식 퍼즐을 총동원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작가의 주관을 객관으로 바꿔보려는 치기나 다름없었다는 점이다.

창의는 오로지 단 한 개뿐이다.

그래서 작가는 모험적 시도를 마다하지 않고 모든 현상과 사고를 넘나들며 치열한 투쟁을 해야 한다.

그렇게 얻어진 결과물에 대해 아무런 부채의식도 가지지 않고 관람자가 이러쿵저러쿵 논하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림과 동시에 어리석은 만용과도 같다. 비평은 할 수 있지만 단언적 결론이 불가능한 영역이 예술세계이기 때문이다.

엄청나게 넓은 대지에 대빡 크고 넓은 천을 휘감은

기차를 움직이는 '대지미술(land art) ,이나

'너희들 스스로 알아서 판단 하그라 잉?, 하고

관객에게 주관적 판단을 맡겨버리는 비구상(non-figurative)이나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별도 하기 힘든 극사실주의(hyperrealism) 나 예술행위의 목적은 똑같다. 그 어느 것이 가치성에서 우수한지 열등한 지 굳이 분석과 비교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각기 나름대로의 추구하는 관점에 따라 스스로 가고자 하는 길을 갈 뿐인 거다.

사람 역시 타고난 천성이건 환경적 요인에 의한 고착이건 자기 스스로 자기 삶과 인생을 만들어 갈 뿐이다. 나 역시 피곤한 삶을 자청하여 만들어가고 있지만 그것 또한 나 자신이 선택한 것일 뿐이고 그 선택의 발원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내 영육에 축적된 사고와 오감(五感)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추단 할 뿐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밤을 절반이나 날려 버렸다. 지난 초여름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버린 이웃사촌 친구에 대한 생각의 끈이 풀려나오더니  그 친구와 연결된 오만 잡것들이 끊임없이 파생되고 연결되더라.


잘 있는지......!

지금 이 시간에는 어디를 활개치고 다니면서 온갖 설레발을 떨고 다닐까?

시골에 계신 홀아버지와, 여전히 눈물에 젖어 얼굴이 반쪽 난 마누라는 보고 싶지도 않나?

조선 팔도 이곳저곳을 시도 때도 없이 붙어서 쏘다니던 생각,

그 너른 중국 땅을 겁도 없이 헤치고 다니던 지난날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같은 아파트 같은 라인에서 산 인연으로 12년 전에 우연히 말을 트고

그 12년 동안 마누라 자식보다 같이 보낸 시간이 많았던 친구.

친구네 집앞에 있던 건조장. 지금은 헐어지고 없다

오죽하면 남자끼리 연애하는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의심도 받았을 만큼 허구한 날 같이 시간을 보내던 친구. 그 인간이 보고 싶은 건지,

그리운 것인지,

비 내리는 가을밤을 그렇게 헤매고 다녔다.  


그나저나 오살 놈의 온갖 감상이 지난밤부터 이어지고 추적추적 쏟아지는 가을비에 심사가 편치 않은 오늘, 나는 먼 곳으로 출장을 다녀와야 한다.

자동차 시동을 걸고 길을 떠났다.

안동을 거쳐 문경과 영동이 오늘의 목적지이다.

안동과 문경은 약속된 만남이고 영동은 시골집이 있는 곳이다. 거리를 찍어보니 안동까지 190km.

시간은 대략적으로 2시간 30분가량이라고 내비게이션이 알려준다. 안동에서 문경으로 거슬러 오는데 약 50km이고 문경에서 충북 영동까지 65km이니 300km를 넘는 거리를 운전을 해야 한다.   

안동에 도착하니 수녀님이 반갑게 맞아 주신다.

월류봉 - 우암 송시열이 공부하던 곳이다. 이곳이 고향인 친구와 자주 오던 곳이다.

- 아이고 와 이리 오랜만 인교?

언제나 그렇듯 자애롭고 인자한 미소가 마음을 편케 해준다.

- 네 수녀님 보고 싶어서 눈이 짓물렀는데 살다 보니   그렇게 되어버렸습니다.     

- 에이 거짓말~

- 진짭니다. 제가 경상도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자가 수녀님인 줄 모르시나요?

- 그렇게 사랑한다면 진작 와봤어야지 2년 만에 오는   경우가 어디 있어예!

우리는 서로 깔깔거리며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 아이고 수녀님 그동안 더 이뻐지고 젊어지셨네요?

  혹시 어디 애인이라도 생기셨나?

- 호~호 그래요?

  내 애인이야 여기저기 엄청 많지예

- 엥? 그럼 저 말고도?

- 그럼요. 애인이라는 사람이 2년 만에 삐쭉 얼굴 비추는데 조선시대도 아니고

  가만있을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만나면 항상 나누는 농담 겸 안부 인사가 그런 식이다.     

수녀님이 직접 담갔다는 오미자차 한 잔 얻어 마시고 다시 문경으로 떠났다.  

도산서원 - 강세황 작

안동, 문경, 예천, 영주는 아직도 여전히 유교적 사고가 바닥에 짙게 깔려있는 곳이다.

지역에 흐르는 사고와 가치관 역시 지극히 고답적이고 완고한 편이다.

그래서 이 지역을 얘기할 때 일반적으로 매우 보수적인 동네라고 말한다.

유교의 오륜사상(五倫思想)이 여전히 유전인자처럼 각인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륜사상(五倫思想)이란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유학의 다섯 가지 기본적인 윤리를 말하는데 특히 이곳 사람들한테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의식은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그 기준에서 벗어나면 혼이 쏙 빠지게 야단을 맞거나 아예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기도 한다.      

정치성향 역시 강고한 보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반적인 사고의 기반도 보수적인 데다가 정치성향 역시 보수적이니 그야말로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영남 보수의 본류이자 근거지처럼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동 각시탈

그러나 지역문화와 정서의 근저를 훑어보면 꼭 정치적 시각으로 재단하고 획일화할 수는 없다. 물론 지금까지의 모든 선거에서 특정 정당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성향은 여전하다. 하지만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는 지역색이라는 특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을뿐더러 왜곡된 우리나라의 정치환경에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는 것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수백 년에 걸쳐 관습화 되어버린 유교적 사고와 거의 강요당하다시피 한 정치적 획일성을 한데 묶어 무조건 ‘보수’라는 고정관념의 틀에 가두어버리는 것은 결코 타당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필경 윤리와 도덕에 기반한 보수적인 사회 가치관과 수십 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한 지역 정치인들의 보수적 정치성향이 이 지역 정서의 보수성을 한층 더 고착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다만 ‘정치는 생물이다’라는 말과 같이 상황에 따라 정치성향이 바뀌어질 수도 있겠지만 수백 년간 사람들 마음속에 각인되어버린 유교적 가치관은 쉽게 사라지거나 얇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로 꼽히는 병산서원

장유유서는 유교 도덕 사상의 기본이 되는 다섯 가지 덕목 중의 하나이다. 즉 구체적인 인간관계를 다섯 가지로 집약하고 서로서로 지켜야 할 의무로 규정한 것이 '오륜 사상'이며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등을 말한다. 이 다섯 가지가 인륜의 기본이므로 인륜의 오상(五常)이라고도 하는데 그중 ‘장유유서’는 어른과 아이, 곧 상하의 질서와 순서가 흔들리지 않고 반듯하게 유지되어야 올바른 사회가 유지된다는 뜻이다.


영남지방은 예로부터 학문에 정통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어서 세인들은 영남을 인재의 고장으로 불렀다고 한다. 특히 고려말에서 조선조 초기에 정몽주, 길재, 김종직이 배출되었는데 김종직은 영학파(嶺學派)의 수장으로서 훗날 ‘영남학파’가 결성되는 근간을 마련한 학자이기도 하다. 김종직은 손중돈을 가르쳤고 이언적은 그 손중돈에게 사사했다. 이언적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정립하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李滉)의 학문체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황 또한 퇴계학파를 결성하여 사림(士林)을 이끌었으니 영남학파 발현의 근원은 사실상 김종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참고로 영남학파는 이황의 퇴계학파 외에 조식의 남명학파,  장현광의 여헌 학파가 있다.

점필재 김종직. 영학파의 수장으로 영남학파를 결성하는 근간을 마련하였다

또 다른 시각으로는 영남지방의 자연환경 및 산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사회에서 영남지방은 산지가 많고 농지가 적어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관직에 나가는 것이 최우선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고 이 때문에 영남지방은 다른 곳에 비해 유독 서당이 많았다는 것이며 그 상관관계가 어떻게 되었건 간에 다수의 유학자들이 배출된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건 오랜 세월 동안 그러한 저간의 여러 이유들이 기반되어 보수적 사회 가치관이 고착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매우 일반론적이며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 1000여 년 간의 사직을 유지한 중심 영역이 안동, 영주, 예천, 문경이었다는 점과 국가, 사회를 포괄적으로 지배한 조선시대 유교사상의 중심지역이었다는 것도 이 지역 정서의 본질을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지역정서를 지배한 유교의 영향으로 지역 전반에 축적되어있는 윤리, 도덕관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고 자존심과 자긍심 또한 자연스럽게 강고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동에서 3번 국도를 이용하였다.

문경으로 가서 상주를 거쳐 충북 영동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국도라고는 하지만 중앙 분리대가 있는 왕복 4차선 도로는 고속국도에 못지않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하다. 고속국도에 비해 굴곡진 구간이 많은 편이긴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고속도로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안전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산과 들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서 가는 맛이 계절마다 모두 달라서 나름의 재미가 쏠쏠하기 그지없다. 또한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산과 들, 그리고 하늘과 강을 보는 즐거움은 역마살 팔자를 타고 난 나 같은 사람들에게 부여된 일종의 특혜 옵션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날이면 날마다 항문 소양증에 시달리거나 치질에 걸릴 확률이 높은 사람들에 비하여 얼마나 자유로운 삶일 것인가? 만은......

사실 허구한 날 조선 팔도 사방팔방에 발바닥을 찍어야 하는 현실적 고달픔도 결코 만만치 않은 자기변명을 위한 자위일 뿐이기는 하다. 하지만 각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얻어지는 경험과 지혜는 그 고달픔을 상쇄하는 또 다른 삶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자위가 지나치면 이기적 구덩이로 함몰될 수 있음으로 이쯤에서 접기로 하고......      

문경에서 후다닥 일을 마치고 상주로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영동을 가려면 필연적으로 상주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상주 시내까지 4차선 국도로 가고 상주임란북천 전적지를 오른쪽에 끼고 우회전하면 2차선 국도가 나오는데 이곳으로 영동, 보은도 갈 수 있고 김천으로도 연결된다.     


2차선 국도를 따라가는 길은 호젓하다.

가끔 지나치는 차량들도 평화롭고 여유로워 보인다.

주변 환경과 풍경 때문일까?

내가 느끼는 기분 때문일까?

산길 옆으로 가끔씩 나타나는 마을은 가을걷이가 대부분 끝나서인지 사람들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산밑 농가의 낮은 처마와 세월이 쌓여있는 돌담,

그리고 따지도 않은 감이 매달려 있는 풍경은 그대로 하나의 그림이다.  

은빛으로 물결치던 초, 중추의 억새꽃들은  

어느덧 노파의 머리카락처럼 성글어져 버렸다.

말라비틀어진 이파리들 부딪치는 소리가 카랑카랑하다.

여기저기 널려있는 허물어진 무덤들은 누구의 흔적들일까!

버짐 같은 이끼에 덮여 산화해가는 비석들이 서러워 보인다.

불현듯 ‘비목(碑木)’이 바람처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비목(碑木) - 한명희 작시. 장일남 작곡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碑木)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2절 후략)     

작사자 한명희 선생이 군 복무 시절 무명용사의 돌무덤을 우연히 발견하고

영감을 얻어 詩作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썩은 비목(碑木)에 삵은 철모가 얹어진 이름 모를 젊은이의 돌무덤.

화약냄새 진동하는 골짜기에서 홀로 죽어가며,

그 누구들인가..... 그 무엇인가를 그리워했을 무명용사는,

따뜻한 엄마의 손길이 아득히 아득히 그리웠을 것이다.

뻐꾸기 울음소리 골짜기를 돌아 나오던 고향산천도 초점 잃어가는 망막에 맺혔을 것이다.

땔나무 한 짐 짊어지고 산바람에 땀을 식히던 초동(樵童) 친구들도 생각났을 것이다.

알알히 쌓인 돌멩이에 피어난 파란 이끼들은

그 누구들인가를 향한 그리움과 슬픔의 흔적이었을 것이다.

그의 삶에 연관된 수많은 인연들의 애끓는 안타까움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죽음은 그 사유가 어떤 것이었건 그와 연관된 사람들의 슬픔이고 연민이다.

지금은 장묘문화가 대부분 화장으로 자리 잡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100% 토장 문화였던 탓에

아직도 우리의 산야에는 수많은 분묘가 남아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인연이 끊어진 무덤들은 서서히 잡초에 점령당하고 봉분마저 허물어져 자연스럽게 산야에 흡수되어 사라져 간다. 생자필멸과 자연 회기라는 도망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말뚝 같은 진리가 여지없이 진행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내서면을 지나 삼포리에 접어들면 상주와 영동군에 걸쳐있는 높이 933m의 백화산이 보이고 모동면, 모서면, 내서면, 황간면 등에 산자락이 늘어져 있다. 그 자락에 농가를 마련하고 몇 년을 살았지만 정상에는 아직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했다.

해발 933m 백화산 - 경북 상주군과 충북 영동군에 걸쳐 있다

몇 해 전 가을 큰 맘먹고 산에 올라간 적이 있긴 있었다. 산 밑에서 바라보는 산 중턱의 단풍이 너무나 환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약간은 겁도 나긴 했지만 동네 할머니, 할배들도 맨날 제집 드나들 듯하시기 때문에 쯤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팡이 겸 호신용 몽낭구 한 개만 가지고 덜렁덜렁 산을 올랐는데...... 아이고! 가는 날이 장날인지 재수가 옴 붙었는지 아니면 멧돼지 회식 때를 잘 못 알았는지 10여 마리의 멧돼지를 만나서 기절초풍은 물론, 혼비가 백산까지 해버렸다. 당시 너무 황망하고 놀래서 김병만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바람같이 나무 위로 올라가 피신했는데 얼마나 간이 덜렁덜렁했는지 순식간에 온 몸에 땀이 대책 없이 흘러나오더라. 내가 피신한 나무는 불과 3m도 채 안 되는 오리나무였는데 이 녀석들이 들이받기라도 하면 내 몸뚱이는 떨어진 홍시처럼 땅바닥에 처박힐 것이 자명하고 내 몸뚱이를 찢어발기는 녀석들의 송곳니를 생각하니 사지가 떨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혹시 몰라서 동네 어른들이 산에 오를 때 필히 지참하던 호루라기를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이 생각났다.


언젠가 어디 학교 앞을 지나치는데 학생들이 빨간색 플라스틱 호루라기를 나누어 주길래 장난 삼아 한 개 얻어왔던 것이다. 내가 하나만 달라고 하자 ‘아저씨가 왜?' 하며 의아스럽게 쳐다보더라. 그 호루라기는 여학생들의 성추행을 방지하려는 호신용이라고 하였는데 내가 달라고 하니 학생들이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딸 주려고'라는 핑계를 대니 '아! 그러면 가져가세요'하며 주었던 것을 혹시?라는 생각으로 지참했던 것이다. 어차피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어른들이 산에 오를 때 막대기로 나무를 딱! 딱! 치거나 호루라기를 호르르륵! 불고 다니면 짐승들이 미리 알고 도망간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농가 뒤편으로 임도가 뚫어져 쉽게 백화산을 오를 수 있다

나는 호루라기를 입에 물고 힘껏 불었다. 그런데 호루라기에서 나는 소리는 호르르륵! 이 아니고 호~오~휙!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호루라기가 너무 작은 데다 겁먹은 내 입김이 너무 세게 들어가서 호루라기 속의 알맹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건 말건 그딴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 굵지도 않은 오리나무를 밟고 서있는 다리는 사시나무 떨 듯 후들거렸고 나뭇가지를 잡고 있는 손바닥은 흥건하게 배어 나온 땀에 미끌거렸다. 온몸의 땀구멍이 모두 개방되어 땀을 뿜어내고 기화된 수분이 안경을 뿌옇게 만들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또한 호루라기 조차 제대로 물지 못할 만큼 입술을 떨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것조차 바닥에 떨어뜨릴 상황이었다. 그러나 공포스러운 멧돼지를 쫒으려면 오직 호루라기를 부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덜덜 떨리는 입술로 호루라기를 꽉! 물고 있는 힘껏 계속 불어대었다. 호르르륵! 소리가 날 때도 있지만 호르~휘~익! 소리도 나고 호~오~휘~익! 등 부는 방법에 따라 제멋대로 소리가 만들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일정하지 못한 소리가 더 효과적이었는지도 모른다. 멧돼지들에게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희한한 소리가 각기 다르게 들렸을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놀라기는 그 녀석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처음에는 빤히 쳐다보다가 호루라기를 불어대기 시작하자 자기네들끼리 ‘저게 무신 소리여?’하는 듯 꿀~꿀 거리더니 이내 질풍노도같이 수풀 속으로 내달아 도망가 버렸다. 그 뛰어가는 소리가 흡사 무소불위 탱크가 산야를 밟고 지나가는 것처럼 압도적이었는데 일으키는 먼지가 그 녀석들을 계속 따라가고 있었다.

두~다~다~다......!

나는 한동안 나무 위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여전히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고 온 몸은 땀으로 적셔져 늘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멧돼지를 발견하고 나무에 뛰어 올라가고 호루라기를 불고 그 녀석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은 불과 3분~4분 남짓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신체에서 발현되었던 공포적 반응이나 생리적 현상은 아마도 2시간~3시간 보다 훨씬 길고 긴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어 있다.  


그 녀석들이 어디까지 얼마나 갔는지도 모르고 혹시 내가 가는 길목 어디에서 나를 들이받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일단은 나무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깊은 산 중턱 나무 가지에서 밤을 새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나무에 그대로 있는다고 하더라도 산중의 밤을 견디어내지 못할 것이고 언제 어느 때 또 다른 짐승들이 튀어나와 어둠의 공포와 합세하여 나를 혼절시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무에서 내려온 나는 축지법을 통달한 도사같이 산을 날았다. 그야말로 중국 무협지에서 나오는 무림고수같이 나무도 넘고 바위도 넘고 골짜기도 날아서 넘었다. 그렇게 한 시간 이상을 날아서 내려오니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살았다!

이제 살았다!

오직 그뿐이었다.

커~컹대며 개 짖는 소리가 마치 구세주의 손길처럼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산을 내려와서 집에 도착하니 온 몸의 힘이 한 줌도 남아있지 않아 마루에 그대로 누워버렸다.

그리고 어둠이 까맣게 내려앉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넋이 빠져나간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아마도 당시의 나와 우사인 볼트가 달리기 시합을 했더라면 이기지는 못했겠지만 최소한 뒤떨어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확신한다.   

백화산 계곡. 영동군 끝자락이다.

백화산을 동쪽에 두고 산길을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오후 햇볕에 빛나는 활엽 단풍을 볼 수 있었다. 설악단풍이나 내장단풍 같은 화려함은 없지만 기다랗고 장대하게 뻗어있는 백화산의 단풍 원경은 소담하고 은근한 아름다움이 있다. 언제일지도 모를 아득한 옛날, 그 어떤 자연섭리에 의해 생성되었을 산과 들. 사람들에게 있어 그 산과 들이 제공하는 각종 산물들은 곧 생명이고 희망이며 미래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무심한 듯 하지만 그 존재에 의존하고 순응하여 수천 년을 같이 살아왔고 그 상관관계는 먼 훗날까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숙명과도 같다.


우매리를 지나가다 보니 길옆에 감나무가 줄지어 서있고

땅바닥까지 늘어진 가지에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으~잉?

지금 이때까지 감을 따지 않았으면 혹시 버리는 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감은 상강이 지나면 금방 물러져서 곶감도 깎을 수 없어 천상 감식초나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감은 지역마다 재배하는 종이 다른데 상주와 영동에서

나는 감은 주로 ‘둥시감’이고 전북 완주군쪽은 ‘월하 감’이 난다.

둥시감. 가을에는 널린게 홍시다

둥시감은 타원형이고 월하 감은 그보다 넓적해서 ‘넓적 감’이라고도 한다.

당도는 둥시감이 높고 보관성은 월하 감이 우수하다.

우매리 둥시감. 감중에서 가장 당도가 높다

상주, 영동, 완주는 모두 곶감 명산지이다.

곶감을 깎기 위해 감을 수확하는 시기는 대체로 ‘상강’을 기준한다.

상강(霜降)은 24절기 중 18번째로서,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이다.

음력으로는 9월, 양력으로는 10월 23일 또는 24일이며, 된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내가 영동군 황간면에 농가를 마련한 첫가을에

맑은 주황색으로 익은 감을 몇 바구니 따서 서투른 곶감을 깎아 본 적이 있었다.

그 시기가 10월 초순이었는데 동네 어른들이 나를 보고 실실 웃으시더라.

- 벌써 곶감 깎나?

- 네~

- 못 먹을 텐데?

- 왜요?

- 지금 깎으면 속이 안차고 죄다 빠져버리는데.....

- 그래도 그냥 한 번 깎아보려고요

- 알아서 햐   

내가 생전 처음으로 깎아봤던 곶감. 이렇게 이쁜 녀석들이 3주 후 거의 사망해 버렸다

그해는 유난히 감 풍년이 들었는데 앞집 할아버지의 조상의 조상의 조상님이 심으셨다는

150년이나 된 고목나무에 대략 5,000여 개의 감이 가지가 찢어지게 달렸더랬다.

그래서 500개쯤 따서 하루 온종일 감자 깎는 칼로 곶감을 깎아봤었다.

그리고 농협에 가서 곶감 거치대를 무려 300개나 구입하였다.

곶감을 만들려면 깎은 땡감을 꿰어 건조할 거치대가 당연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더분하게 생긴 농협 직원은 내 얼굴을 여러 차례 힐끗힐끗 쳐다보더니 내 거주지를 물었다.

인근 수십 리 근방 사람은 거의 모두 알고 있는데 낯선 내가 궁금했기 때문일 것이다.

곶감 건조장. 조형적으로도 매우 아름답다

- 워디 사시는가유?

- 원금계 삽니다.

- 원금계에 오래 살았슈?

- 아뇨, 그냥 몇 년......(실제로는 7개월)

- 곶감 농사 많이 하시나 봐유?

- 아니, 그냥......쬐끔.

- 이거 300개면 30 접인데 솔찮이 많은 양인디요 잉 - 아, 네 그냥 시간 날 때 깎아 만들려고요.

1개의 거치대에 10개의 곶감을 걸 수 있는데 무려 3,000개나 걸 수 있는 300개의 거치대를 사는 사람이 도무지 농사꾼같이 보이지 않는 것에 의구심이 들었나 보다.

          

나는 내친김에 곶감 상자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곶감이 완성되면 당연히 포장할 상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개나 덜컥 사버렸다.

1 상자에 약 30개~40개가 들어가니 6,000개~8,000개를 포장할 수 있고 150년 된 감나무가 매년 5,000개씩 감을 제공해 줄 것이니 그중 3,000개만 곶감을 만들어도 2년이면 소진된다는 어설프고 순진무구한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농협 직원은 또다시 의구심이 배경 된 질문을 쏟아냈다.

- 곶감을 많이 깎으시나봐유.

- 예, 많이는 아니고 쬐끔 깎아서 선물이나 하려고요.

- 상자값이 만만치 않은디 100개만 가져가시고 또 필요하면 가져가셔유.

- 상자가 얼마씩이죠?


곶감 거치대

농협 직원은 태블릿 PC를 꺼내 가격표를 찾아 보여주었다. 상자 1개당 가격은 600원이었고 200개를 구입하려면 120,000원을 지불해야 했다.

그래도 곶감 200 상자를 생산하려면 그깟 120,000원이 뭔 대수겠는가! 나는 거치대 300개와 상자 200개를 사고 감을 따는 기구까지 호기롭게 쇼핑을 감행하였다.

결론은 수년이 흐른 현재까지 곶감 거치대는 최고 80개까지 사용해봤고 곶감 상자는 100개도 사용하지 못한 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고 조만간 폐지로 전락할 운명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사실 3,000개의 곶감을 걸 수 있는 거치대를 산 것은 순전히 미련 곰탱이 같은 내 욕심이었지만 인근에 사는 친구가 유발한 달짝지근한 유혹도 충분한 이유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 친구는 매년 50접가량의 곶감을 만들었는데 맨날 못생긴 곶감 몇 개 주면서 온갖 생색을 다 내곤 해서 소위 곶감 깔딱증에 걸리기도 했었던 고로 멋지게 곶감을 만들어 복수도 할 겸 으스대고 싶은 마음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 이형! 곶감 한상자에 50,000원 받는데 200개만 만   들어 팔아도 1,000만 원은 쉽게 벌어.

- 깎아만 놓으면 자동으로 곶감이 되는데 한겨울에     1,000만 원이면 짭짤한 부수입이야.

잉? 1,000만 원?

그렇다면 2년 동안 2,000만 원을 벌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내가 꼭 사고 싶은 앰프를 사고도 몇백만 원의 여유가 덤으로 생기는 것이고 그 남는 돈으로 언젠가 꼭 사고 싶은 스피커도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도달하자 나 스스로 펼친 상상의 날개가 대책도 없이 커지는 것이었다.  내 일생에 한 번쯤 꼭 사고 싶은 앰프는 Mcintosh MA8000이다.  

   


오래전부터 하이엔드 앰프로 유명하지만 사실 내가 그렇게 선호하는 음색이 아니어서 아직까지 매킨토시를 구입한 적은 없다. 다만  이 녀석의 뽀대가 워낙 품위가 있을뿐더러 회로의 안정성이 뛰어나서 웬만하면 고장 날 일이 없다. 또한 먼 훗날 중고로 팔아먹어도 그리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들여야 할 기기로 점찍고 있었던 것은 사실 중의 사실이다. 또 하나는 이 녀석이 인티그레이트 앰프여서 분리형 앰프의 문제점을 원천적으로 보유하지 않았다는 점과 음악 마니아라면 한 번쯤은 대면해야 할 명기의 반열에 올라있는 놈이라는 점이다. 더군다나 MA8000은 채널당 300W의 대출력이고 기똥찬 DAC(Digital Audio Converter)를 기본 탑재하고 있어서 굳이 고가의 DAC를 구매하지 않아도 되는 이점을 겸비하고 있다.

Mcintosh MA8000. 파란 불빛의 매력은 오디오 마니아들의 로망이다

가격은 13,000,000~14,000,000원.

무게만 45kg을 넘는 헤비급이어서 혼자서는 옮기지도 못한다.     

이 녀석에 어울리는 인터커넥터 케이블과 스피커 케이블을 구매할 경우 최소 200만 원~300만 원이 추가될 것이기 때문에 2년 동안 곶감으로 2,000만 원을 벌 수 있으면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를 움켜쥘 수 있는 희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수년이 흐른 현재까지의 결론은 대부분의 구상이 시행착오였고 섣부른 희망이었다는 것이다.

우선 150년이나 나이를 드신 영감태기 감나무가 매년 5,000개씩 감을 생산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또한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해거름도 있지만 노화된 뿌리와 가지가 젊은 나무들만큼 활성적이지 못해서 그 수확량을 예측할 수도 없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농가를 구입한 첫해의 이상 풍작을 기준하여 오만가지 헛된 희망을 품었으니 내 미래계획은 애초부터 성립되기 어려운 망상이었던 것이다. 모든 과실수는 경제 수확 수령이라는 것이 있어서 경제적 목적을 달성할 정도의 수확량을 확보하려면 적정한 젊음을 보유하고 있어야 한단다. 이 자료는 어느 날 우연히 들어간 농진청 사이트의 ‘농업과학기술대전’에서 얻었는데 소위 ‘과학과 통계’라는 거름망을 통해서 나의 무식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나이가 들면 쇠락할 수밖에 없다는 생물 논리를 학실히 확인한 것이다.


수령 150년 된 감나무. 너무 늙어서 감이 많이 열리지는 않는다

어쨌거나 그렇게 500여 개의 곶감을 왼 종일 깎고 또 깎아 농협에서 사 온 거치대에 꿰어 마루 위에 주~욱 걸었다. 보고 또 봐도 싫증이 나지 않았고 기분 또한 엄청나게 뿌듯 뿌듯하였단다.

처음 깎아 본 곶감이기도 했지만 저놈들이 말랑말랑하게 숙성이 되면 누구도 주고 누구한테도 선물해야겠다는 김칫국도 사발로 들이켜 버렸다.

또한 아직 4,500여 개나 남은 감들을 죄다 곶감으로 깎아 팔면 2년 후쯤 꿈에 그리던 앰프로 바뀌어질 것이라는 신나는 그림도 그려졌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사는 동물이다.

물론 각 개인에 따라 희망이라는 관점이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최소한 인간은 시시각각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품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갈 맛이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희망이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의적(一義的) 등불과도 같은 것이다. 키에르케골의 절망론의 변증법적 논리도 결국 ‘희망’이라는 귀착점을 향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인간에게 있어서 ‘희망’은 곧 삶의 본질인 것이며 또한 살아가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내가 곶감을 깎으면서 원하는 어떤 불가측(不可測)한 희망도,

그 곶감이 예쁜 담황색으로 숙성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그 곶감을 전달받은 사람이 표하는 감사함도,

거기에 더하여 친구의 연간 1,000만 원이라는 황당한 수익 론도,

그 황당한 수익론을 혹시?라는 의문 속에서도

내심 가능하다고 믿고자 하는 나의 어설픈 기대도,

나 스스로 설정하고 추구했던 미래의 희망이자 또한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막상 그 희망을 지향했던 시점에 도달했을 때,

그것이 달성되었을지 어떨지는 귀신도 모르는 일이니 나 역시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어떤 희망이 달성되지 못했거나 난망한 상황이 되었을 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헛짓거리를 자책하고 또 후회 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건 그 ‘희망’이라는 놈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나를 이끌고 온 에너지이자

삶의 추동력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그 ‘희망’이라는 추상적이고 실체도 헤아릴 수 없는 녀석에 맨날 휘둘리고 속고 살지만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무시할 수도 내칠 수도 없다.

그것은 예측 불가능한 미래에 대하여 사람들이 붙들고자 하는 한줄기 동아줄이며

어두운 밤바다의 등댓불과도 같기 때문이다.


습기의 공격을 받아 썪어가는 곶감

무식이 용감한 것인지,

까짓꺼......라는 만용의 발로인지 어쩐지는 몰라도

나는 수백 년에 걸친 경험도 귓등으로 흘려듣고 또는 무시해 버리고 곶감을 깎았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 곶감들은 별다른 문제가 없이 자~알 숙성되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불과 3주도 되지 않아서 ‘곶감은 상강 전후에 깎아야 한다’라는 수백 년도 넘은 경험론을 귓등으로 대충 흘려듣고 무시한 대가를 처절하게 치렀다는 사실이다.

그 처절한 대가를 치른 후에 터득한,     

즉, 곶감이 제대로 숙성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땡감(水枾)의 속이 완전하게 차오른 상강 전후에 수확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당도가 최대치로 올라와 있고 과육의 경도 역시 적당하기 때문이다.    


둘째, 기온이 섭씨 15도 이상 올라가지 않아야 한다.

날씨가 너무 더우면 과육이 물러져 곶감으로 진행되지 않고 홍시로 변하면서 전부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상강은 10월 하순경이며 그 시기의 기온이 섭씨 12도~15도이다)

    

셋째, 적절한 습도 관리가 최대의 관건이다.

설사 기온이 적정하다고 하더라도 습도가 높으면 시쳇말로 작살이 나버린다.

건조가 양호한 곶감

3일 이상 비가 오거나 공기의 습도가 높으면 금방 세균이 번식하여 곰팡이가 슬기 때문이다.

쉽게 곰팡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깎은 감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당분이 포함된 수분이 솟아 나오는데 그 수분을 말려버릴 햇볕이나 바람이 없어 세균 번식이 용이해지기 때문이다.      

상기의 곶감 숙성에 대한 최소한의 조건을 나열하긴 했지만

여러 가지 조건에 따라 수많은 변수가 작용하기도 한다.


주변에 하천이 있거나 논으로 둘러싸여 습도가 높은 조건이면 훨씬 환경이 불량하다고 할 수 있으며 습기 침습이 적은 높은 지대는 비교적 곰팡이의 공격을 적게 받는다. 또한 사방이 방습 처리가 된 건조장이나 습도를 말려버릴 수 있는 열풍기 시설이 구비되어 있으면 곰팡이의 공격을 최소화할 수 있다. 환경 여건이 곶감의 숙성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는 내가 직접 확인한 실례에 근거하기 때문에 99%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루 위에 곶감을 걸어 놓았을 때 제일 위쪽의 곶감은 심한 습기에 노출되더라도 쉽게 곰팡이가 슬지 않거나 정도가 약하다. 그러나 마당에 가까운 제일 아래쪽 곶감들은 예외 없이 곰팡이의 집중 공격을 받아 사실상 폐물로 전락해 버린다. 그 높이의 차이가 그리 큰 것도 아니다. 가장 위쪽과 가장 아래쪽의 길이가 기껏해야 1m 남짓밖에 되지 않는데도 정도의 차이가 매우 심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화된 곶감 건조장

그래서 내 나름대로 곰팡이 방지책을 세워봤는데 일기예보를 참고하여 상황에 따라 비닐 커버를 씌우는 것이다. 날이 궂을 것 같으면 비닐을 뒤집어 씌우고 아래쪽도 철저하게 밀봉해 버린다. 이렇게 해보니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다만 날씨가 맑아지고 해가 나오면 즉시 비닐을 벗기고 통풍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닐에 갇혀있는 습기와 감에서 발산되는 습기가 합해져서 오히려 더 쉽게 곰팡이가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첫 번째 곶감 농사는 폭망을 넘어 절망스러운 결말로 끝나버렸다.

'곶감은 상강 전후에 깎아야 한다'라는 동네 어른의 말씀을,

겉으로는 ‘아 그렇습니까?’하고 대충 흘려듣는 것도 모자라

‘그냥 깎아서 마르면 곶감이지 꼭 그 시기에만 깎아야 한다는 법이 있나?’라는 방정을 떤 나의 경솔함과 만용을 곶감神이 처절하게 응징하고 벌을 내렸기 때문이다.  


내가 생전 처음 곶감을 깎았던 날.

그것도 무려 10시간도 넘게 깎은 감들을 처마 밑에 줄줄이 매달아 놓고

보고 또 보고 얼마나 흐뭇하고 스스로 뿌드드듯 했었던가!

참말로 탐스럽고 아름다운 그림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탐스럽고 새끼와도 같은 곶감이 어느 순간부터 추~욱 늘어지기 시작하더니

시시때때로 철퍼덕! 철퍼덕! 곤두박질쳐서 바닥은 온통 시큼한 감죽 천지가 되어 버렸다.

그나마 힘겹게 매달려 있는 놈들도 곰팡이에 온통 점령되어 쭈그렁바가지나 다름없이 찌그러지면서 도저히 곶감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형태가 변형되어 갔다.

- 아이고~ 어떻게 깎은 감인데.....!

나는 어떻게든 내 아집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물론, 사망해가는 곶감을 생존시켜 보려고 하루 종일 선풍기를 틀어 바람을 쐬어주고 30도짜리 알코올도 분사해봤다.

결론은 거의 대부분 사망, 낙상사, 병사 등의 선고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거다.     

그 와중에서도 대략 100여 개 정도는 곶감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그런대로 봐줄 만했다.

그래서 이미 사망선고를 받고 마당 한구석에 내동댕이 친 녀석들한테는 미안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곶감은 그들의 희생을 딛고 생존한 적자일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하고 애지중지 보살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갔고 남아있던 녀석들도 나름대로 곶감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 비록 색깔은 거무죽죽하지만 표면에 하얀 시설(枾雪 - 곶감 거죽에 돋은 흰가루)이 올라와 누가 뭐래도 곶감다운 곶감의 모양새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동안 아깝고도 아까와서 단 한 개도 먹어보지 못한 나의 새끼 같은 곶감이

그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곶감’이라고 인정받을 만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떨리는 마음으로 곶감을 시식해 보려고 마음먹었다.


윤회적 사고에 빗댄다면,

곶감은 사람한테 먹혀야 그 본분을 다하는 것이니

누군가 먹어주어야 곶감도 기꺼운 마음으로 마지막 소임을 마치는 것일 게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선택된 곶감을 집어 들고 쫄깃하고 달큰한 향내를 기대하며 죽~ 찢어봤다.

옛날, 옛날 외할머니가 항상 곶감을 찢어 드시던 기억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

아니, 이게 뭔 조화속이여?

나는 너무 어이도 없거니와 눈앞의 현실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다.

당연히 윤기 나고 차진 진황색 과육을 기대했건만

그 쫀득한 살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속은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황당 그 자체였다.

곶감은 과육 조직이 살아있어 도톰한 살집이 있어야 하고 그 육질이 쫄깃쫄깃해야 하는데

그 놈들은 겉만 멀쩡할 뿐 속은 먼지가 날릴 정도로 말라비틀어져 있었던 것이다.

결론은 온갖 정성을 퍼부은 것에 감복하시어 하느님, 부처님이 긍휼 한 마음으로 곶감 형태를 만들어 주시긴 했는데 그 과육들은 진작에 홍시로 액화되어 증발해 버렸던 것이다.

10월 초순이면 한낮 기온이 섭씨 20도가 넘는 날이 많고 그 상황이면 곶감으로 숙성되지 않고 홍시로 변해간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마을 어른들은 여지없이 실실 웃으시더라.

- 이 집 곶감 워떠신가?

- 네, 그냥 망해부렀습니다요~

- ㅎ ㅎ ㅎ ㅎ!!!

- 그러게 내가 뭐랴!

  곶감은 상강 전후에 깎아야 혀.

  그동안 학채냈다고 생각하고 다음에는 잘혀봐 잉?

- 아~ 네 네 네 네 네 네~    


사람은 배우면서 산다고 하지만 없는 시간 쪼개서 감을 따고 깎고 매달고

거기에다 온갖 정성을 쏟아부었는데 너무나 어이없고 허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경험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고 이론과 실제가 맞지 않으면 괘변이 되는 것인가 보다.     

그 이후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10월 20일을 전후하여 감을 따고 곶감을 깎아 널게 되었다.

역사에서 현재를 배우듯이 경험은 한마디로 '소중한 것이여'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며칠씩 비가 와서 습도가 높아지면 여지없이 곰팡이란 놈이 습격을 한다.

이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곶감 생산자들은 땡감을 깎아 건조장에 넣거나 비닐로 칸막이를 만든 다음 유황불을 피워 2시간가량 곶감의 수분을 제거하는 선결 작업을 거친다.

이 방법을 유황훈증(硫黃燻蒸)이라고 하는데 이 과정을 거치면 바닥이 흥건할 정도로 수분이 빠져나오고 보기 좋게 짙은 주황색으로 발색이 되는 효과가 있다.

 

이후 약 30일가량 비가 오지 않으면 곶감은 큰 문제없이 순조롭게 숙성되어 간다.

그러나 어느 정도 곶감이 건조된 30일 이후라도 4~5일 이상 비가 와서 습도가 높아지면

여지없이 곰팡이가 발생하고 곶감의 상태는 시꺼멓게 변색되어 버린다.

이러한 변색은 상품성을 크게 저하시키기 때문에 곶감 생산자들은 날씨와 습도에 매우 민감하고 조심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열풍기를 돌려 습도를 제거하기도 하는데 간혹 양심불량자들은 살충제를 사용하여 곰팡이 발생을 억제하거나 제거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백화점이나 마트에 담황색이 선명한 곶감 상품을 보면 혹시?라는 의심을 하게 되고

구입할 의사는 0%에서 절대 올라가지 않는다.     


사실 옛날 시골에서 만든 곶감은 유황훈증 등의 후처리 가공방법이 개발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색깔이 요즘 출시되는 것과 많이 달랐다. 검정에 가까운 짙은 밤색이거나 더 심한 경우 꼬질꼬질하기도 했던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억하는 곶감의 본래 모습이다. 요즘같이 현대화된 건조장이나 환풍시설, 열기구, 유황훈증 등의 제조방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씨가 맑으면 맑은 대로 궂으면 궂은 대로 곶감을 말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옛날의 곶감은 대부분 이런 모습이었다

그래서 깨끗하게 숙성되는 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때도 많았다. 순전히 날씨의 상태에 따라 곶감의 품질이 좌우될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재래식 곶감 숙성 과정은 곰팡이가 슨다고 하더라고 크게 개의치 않았고 색깔이 검게 변한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곰팡이가 슬었건 아니 건간에 수분이 70% 이상 증발되고 날씨가 추워지면 표면에 하얀 당분이 생겨 험한 모습을 스스로 화장해 버리는 재주도 피운다. 이 하얀 가루를 시설(枾雪 - 곶감 거죽에 돋은 흰가루)이라고 하는데 시골에서는 흔히 ‘분이 오른다’고 하고 이것은 곶감의 완성을 말하는 것과 같다.  

어쨌거나 올해도 500여 개의 땡감을 깎아서 곶감을 만들고 있다. 중간 과정에서 점검해 보면 절반은 곰팡이에 점령당하고 절반은 그럭저럭 곶감으로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애쓰게 만들어서 누구의 입을 즐겁게 해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감이 있으니 만들어 보는 것일 뿐이다. 산이 있으니 오르는 것이라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이렇게 온갖 역경을 거쳐 만든 곶감이 내 위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기껏해야 20~30개뿐이다. 고기 굽는 사람이 고기를 잘 먹지 않는 것과 비슷한.....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가 곶감을 숙성하는 방법은 옛날 할머니들이 하셨던 전통적 방법을 그대로 고수한다. 사실 유황훈증은 곶감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선결 작업이라고 인식되어서 불과 200개~300개를 하는 사람도 어김없이 유황을 사용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 조상님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유황훈증을 하지 않고도 맛난 곶감을 얼마든지 생산하였기 때문에 굳이 유황불을 피우고 약을 뿌리고 하는 헛짓거리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뭐 팔아먹을 것도 아니고 남에게 과시할 것도 아닌데 곶감 상판대기가 맑은 주황색이면 어떻고 시꺼먼 오시(烏枾) 면 무신 상관있을 것인가! 설사 곰팡이가 번졌다고 하더라도 푸른곰팡이이기 때문에 인체에 큰 해가 없을뿐더러 수백 년 동안 검증된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고자 하는 것뿐이다.

곶감이 매달려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벌도, 파리도, 초파리도 와서 당분을 빨아 드신다. 또한 끈적끈적한 표면에 온갖 분진(먼지 등)도 달라붙는다. 그러나 굳이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해오셨던 방법이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을 나라님도 잡수시고 숙종 때는 중국 황실에 진상도 하였기 때문이다. 솔직히,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현재 각종 마트에서 판매하는 이쁘고 깨끗하고 맑은 주황색이 나는 곶감은 진정한 의미의 곶감은 아니라고 본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곶감이 되기 전의 반건시(半乾枾)의 진행형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우리 조상이 만들었던 곶감은 색깔이 오시(烏枾)와 가깝게 거무죽죽하고 표면에 하얀 밀가루를 바른 듯 곶감의 당분이 올라와 포설된 것이라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믿기 때문에 그 방법대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감을 재배한 기록은 고려시대부터라고 하고 곶감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중기 이후 주영편(晝永編), 규합총서(閨閤叢書)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참고로 땡감은 수시(水枾) . 곶감은 건시(乾枾) . 먹기 좋게 말랑말랑한 곶감을 반건시(半乾枾)라고 한다. 허균의 <도문대작>에서는 지리산의 오시(烏枾)가 곶감 만드는데 좋고 홍길동이 따먹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는데...... 그 길동이가 언제 세상에 다시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가끔 눈에는 띈다. 동사무소에 주민등록 만들러 가거나 여권을 만들거나 관등성명을 기입해야 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홍길동’이 있다. 모델료를 얼마나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둥시감은 흉년인데 우매리는 풍년이다.

샛길로 한참 빗나간 이야기를 다시 이어보자.

아까 우매리를 지날 때 아직도 따지 않은 감이 가지가 찢어지도록 매달려 있었다고 했는데.....

감이 너무 탐스럽게 달려서 사진이나 몇 방 찍으려고 내렸더니 할머니 아주머니가 길가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머니는 전동 스쿠터에 앉아 계셨는데 모자를 쓰고 무릎에 담요까지 덮고 계셨다. 산골의 기온이 급속하게 떨어지기도 하지만 노인들의 순환기는 동절기에 접어들면서 기능이 급속히 약화되기 때문일 것이다.

- 안뇽하세용^^

- 누구셔?

- 녭,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서생입니다요~

- 지금도 과거를 보는 데가 있능가?

- 그럼요. 서울에 과거를 보는 데가 많습니다.

- ???


할머니는 틀림없이 과거시험(科擧試驗)으로 인식하고 나는 농담으로 과거(過去)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순진무구한 농촌 할머니가 도통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은 매우 매우 당연할 것이다.

옆에 있던 50대 아주머니가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 과거시험 보러 간다고요?

- 아니, 과거시험이 아니고 ‘과거’를 볼 겁니다.

- 그게 그거 아닌감?

- 네, 저는 이제 늙어서 과거시험은 못 보고요.

  지나간 과거(過去)를 보러 가는..... 쉽게 말해서 점(占) 보는 겁니다요^^

옆에 앉아계시는 할머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린고? 하는 표정을 지으시면서,

- 뭣이라고 하는겨?

  옆의 아주머니에게 해석을 구하신다.

- 아이고, 이 아자씨가 서울로 점 보러 간대요.

  나도 무신 말인지 아심아심해요.

나는 할머니를 놀려먹는 것이 죄송하기도 하거니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할머니 손을 덥석 잡았다.

- 할머니 제가 쩌그 안동에서 점을 봉께 우매리에 옛   날 애인이 기다린다고 해서 왔는디요 잉~

- 내가 애인?

- 네, 세월이 하도 오래 흘러서 그렇지 할머니가 옛날   제 애인이었다고 하데요?

  우매리 감나무 밑에서 기다린다고 해서 왔는데..... 진짜 그 점쟁이 용하네요?

- 아이고 남살시러워라. 이 냥반이 시방 누구보고 애인이라고 한댜?

- 에이~ 할머니, 제 얼굴 보시고 잘 생각해 보셔요.

  진짜 우리 옛날 애인 사이 었다니까요?

  안동 점쟁이가 우매리 가면 감나무 밑에서 애인이 기다린다고 했는데

  지금 할머니가 딱 이곳에 계시잖아요.


김천에 산다는 50대 아주머니는 이내 눈치를 채고 흘~흘 웃으면서,

- 아이고, 할머니 옛날 애인이 찾아오셨는데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 그람 어떻게 햐?

- 손도 잡아주고 뽀뽀도 해야지요^^

- 할머니 그래도 수십 년 만에 옛날 애인을 만났는데 뽀뽀라도 한 번......

김천 아줌마는 깔깔거리며 재미있어서 죽겠단다.

- 아이고, 사람 죽것네.

  우리 영감이 없어서 그렇지 맞아 죽을 짓을 골라서 하는구먼.     

- 하이고 큰일 났네. 어르신 오시기 전에 얼른 도망가야겠구만요.

- 우리 영감은 쩌~그로 진작 가버렸어.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신다.

- 잉? 그럼 할머니 싱글이야?

- 뭔 소리여?

- 과부나 혼자 사는 사람을 영어로 싱글이라고 해요^^

- 떽끼~ 남살시럽구로 뭔 말을 그렇게 한댜?

- 근데 할머니 이름이 누군지 알아야 애인이었는지 어쨌는지 알 수 있는데......

- 내 이름?

- 네~

- 내 이름......이, 하도 오래 되야서 내 이름도 잘 모르것네.


할머니도 옛날엔 이렇게 청순하고 예뻣었겠지......

할머니가 기억 저편에서 주섬주섬 꿰어 맞추어 기억해낸 이름은 김명희라고 하셨다.

사실 오랫동안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은 노인들은 자기 이름을 금방 기억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50대 아주머니는 이미 진작 스토리의 흐름을 읽고 있었기에 이제는 내 의도에 말을 맞추어서 분위기를 잡아 주는 동조자가 되어 버렸다.     

- 아, 맞구만~

  음, 김명희..... 안동 점쟁이가 김명희 씨가 분명히     제 옛날 애인이라고 했어요.

- 뭐시기? 그 안동 사는 점쟁이가 누구여?

- 아이고, 명희 씨 그럼 안동 가셔서 물어보실라고?

- 어떤 미친년이 헛소리 하는지 주뎅이를 찢어놔야      할 것 아녀!

- 에이 명희 씨 안동이 어디라고 거기까지 가신 대요?

- 명희 씨?

- 그럼 할머니 이름이 명희니까 명희 씨라고 하지 뭐라고 하겠어요?

결국 할머니는 ‘명희 씨’라는 수십 년 만의 달달하고도 어색한 호칭에 마음을 열고 말았다.

- 허기는 누가 내일모레 땅속에 들어갈 늙은이 이름을 불러주겠능가.

  오랜만에 내 이름을 불러주니 옛날 처녀 때로 돌아간 것 같네 그랴.      

요양원..... 사실상 어르신 보관소나 마찬가지다

내가 가끔 노인들과 친해지기 위한 방법으로 이름을 불러드리는데 경험적으로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좋아하는 노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름은 법률적, 사회적으로 자신을 대신하는 주체적 대명사와 같고 또한 자신만의 고유성을 가진 객체로 존재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그 이름마저도 불러주는 사람들이 점차 사라져 가고 종래에는 본인 자신도 망각해 버린다. 어느 때부터인가 엄마, 어머니, 할머니, 어르신 등으로 통칭되고 종래에는 ‘노인네’라는 다소 귀찮고 냄새나는 퇴물로 내방쳐지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요양원’이라는 것이 생겨서 그 귀찮은 퇴물을 적은 비용으로 관리하거나 일종의 보관(사망할 때까지)을 의뢰하는 것이 사회 통념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어 ‘효(孝)’라는 글자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사라져야 할 개념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나 자신 역시 그러한 미래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쬐끔씩 서러워지기 시작하는데..... 아이고 으짤거나!!      


자신의 이름을 써먹은 지가 언제인지도 모르는 세월이 자꾸자꾸 흘러가면 언젠가는 자기 이름조차 쉽게 기억하지 못하거나 생소하게 들린다고 한다. 심지어 이웃이나 고향 친구마저 이름보다는 누구 엄니, 어디 어디 댁, 또는 할멈이라고 부르는 것이 대부분이라서 명자 씨, 숙자 씨 등의 이름을 불러주면 처음엔 어색해하다가도 이내 수줍은 얼굴로 반색을 하신다.


간혹 어설프게 어르신 이름을 부르다가,

- 이런 싸가지 읎는 놈!

이라는 윤문식류의 호통을 듣는 때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호의적으로 받아주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쯤에서 할머니 놀려먹는 것을 중단하였다. 더 이상 지나치면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슬쩍 화제를 돌려버렸다.

- 근데 이 감들은 누구 것인데 지금까지 그대로 있대요?

- 나도 몰라. 아마 누구한테 팔았다고 하던디?

- 지금 곶감 깎을 시기도 지났는데 여태까지 안 땄으면 까치밥이나 해야겠네?

사실 올해 둥시감은 대체로 흉년인데 이곳의 감들은 열려도 너무 열렸을 만큼 풍성하다.

감을 만져보니 단단하여 아직 무르지도 않았다.

- 할머니 감좀 따가도 돼요?

- 내 것이 아닌디 내 마음대로 뭐라고 못햐.

- 이 감 주인이 누구신가?

- 쩌그 콩 털고 있는 이가 감나무 임자여.


그렇게 이런저런 농담을 하고 있는 사이 감나무 주인이라는 아주머니가 삼발이 수레를 끌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 누구셔?

- 할머니 애인입니다.

- 애인?

- 넹^^

- 아이고 별꼴 다보 것네?

  할머니 진짜 애인 맞어?

- 몰라, 나보고 다짜고짜 애인이라고 하는디 난 당최 모르것어

할머니를 포함한 우리 모두 깔깔거리고 웃었다.

- 근데 명희 씨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됐시유?

- 나?

- 그럼 할머니 말고 명희라는 이름이 또 있나요?

옆에 서있던 감나무 주인이 귓띰으로 올해 여든다섯이라고 말해 주었다.

- 할머니 저도 올해 나이가 여든 다섯인디요 잉^^

- 뭐시기?

- 진짜예요. 주민등록증 보여드려?

- 예끼!

- 제가 원래 여든다섯 살인디 백화산에서 산삼 3뿌      리를 캐먹었더니 이렇게 젋어졌습니다요 ㅎ ㅎ.

- 산삼을 먹었다고?

- 네, 산삼 한뿌리에 10년씩 젊어진다고 하던데요?

- 근데 산신령님이 직접 심고 가꾸는 산삼을 먹으면 한뿌리에 100년씩 젊어진다고 하더라고요.

- 아이고 그람 당장 백화산을 몽땅 뒤져서라도 산삼을 캐먹야쓰것네.

  30년이 젋어진다는디 뭐를 못하것어.

- 아이고 서울 사람들이 진작 죄다 뽑아가 버렸다고 테레비도 나오고 신문에 난 거 못 보셨남?

(실제로 백화산에 산삼이 심심찮게 발견된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옛날에 인삼밭이 많았는데 그때 씨앗이 많이 퍼진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 저런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생면부지의 우리는 졸지에 옛날 애인 사이도 되고 옷깃이라도 스치는 인연이 되어서 잠깐이나마 친밀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지가 찢어질 듯 열린 감에 욕심이 동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직 무르지도 않아서 절대 부족인 곶감을 보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주머니 감 몇 개 따가도 돼요?

- 안돼요

감주인 아주머니가 단호한 표정으로 거부하였다.

- 이거 지금 안 따면 전부 버려야 하지 않나?

- 그래도 안돼여.

- 왜요?

- 감을 다른 사람한테 팔았는데 연락도 없고 따 가지도 않아서 우리도 시방 골치 아파요.

- 아니, 어떤 사람인데 이렇게 아주머니를 골치아프게 하는거여?

- 돈은 다 받았는디......화장품 회사라고 하는 것 밖에 몰라요.

- 에이, 그럼 이거 진작에 포기했구만.

  어차피 버릴건데 몇 개만 따갈게요.

- 안되는디.....

그때 여든다섯 살 드신 옛날 할머니 애인께서 강력한 지원사격을 해주셨다.

- 아, 몇 개 따간다고 누가 알어?

  길가에 있는디 누가 몽땅 털어가도 모르잖여?

  갸들이 뭐라고 하면 내 핑계 대시게.

할머니 애인이 지원사격을 하자 감 주인은 마지못해 허락을 하셨다.

- 그람 저쪽 나무에서 표시 안나게 먹을 만큼만 따가요.

그러고는 수레를 끌고 언덕 밑으로 내려가 버렸다.

할머니 애인은 호~호 웃으시더니

- 저쪽으로 가서 가지를 꺾어, 봉다리도 없는디 가지를 꺾어야 많이 가져가제

- 하잇, 충성!

- 감사하므니당^^

농담으로 만든 할머니 애인의 지원 덕분에 큰 눈치 보지 않고 나는 감을 따게 되었는데 시골집에 도착하여 헤아려보니 무려 150개가 넘었다는.....ㅎ   


내서면에서 삼포리 삼거리에서 내가 사는 황간면 금계리로 가는 길은 갈라진다.

황간면에 볼일이 있을 때는 모동면사무소를 거쳐 신천리 우매리 방면으로 가는데

그날은 우매리 방면으로 갔던 것이다.

얼마간은 돌아가지만 신라시대에 세워졌다는 고찰 반야사를 잠깐 들러야 하고

황간 읍내에서 이것저것 쇼핑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야사

그런 볼일이 없는 평소에는 득수리를 지나 정산리, 백학리, 호음리 쪽으로 간다.

그쪽이 가깝기도 하거니와 주변 경치가 더 좋기 때문이다.

득수리는 지나올 때는 연상작용 때문인지 항상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를 생각게 한다.

술도 잘 처먹고 뻥도 대빵으로 센 부산 사나이 O득수.     

정산리까지는 경북 상주군에 속하고 호음리부터 충북 영동군에 속한다.

그래서 경계지역의 말투는 충청도와 경상도 말이 섞여 있다.

백학리는 언제부터 마을 이름이 지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동네 어귀에 왜가리가 항상 떼 지어 산다.

그래서 백학리라고 부른단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한동안 머무르면 그 숲은 황폐화되어 버린다.

산성 성분이 잔뜩 포함된 배설물이 나무를 사망시켜버리기 때문이다.    

반야사 경내에 있는명품 배롱나무

우매리에서 우여곡절 끝에 갈취한 감을 후다닥~ 깎고 나니 벌써 어둠이 몰려들었다.

곶감 거치대에 총총히 꿰어 걸고 중간중간 빠져버린 곳에도 보충하여 균형을 맞췄다.

1개의 거치대에 10개씩 감을 꿰는데 어느 쪽인지 곶감이 비어있으면 균형이 맞지 않아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번 곶감은 완전 연합군이다.

옆집 할머니 감을 따주고 얻은 삯감,

다른 집에서 슬쩍한 대봉감,

운주면 장선리에서 서리한 월하감.

우매리에서 온갖 잡설로 갈취한 눈감땡감 등 등.

크기도 다양하고 모양도 각기 다르고 사연도 많다.


월류봉

곶감은 처음 깎을 때보다 거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깎지 않으면 그야말로 형태와 크기, 또는 색깔이 제각각이다. 뭐, 팔아먹을 것도 아닌데 맛만 좋으면 될 것 아닐까만은......  


하여튼,

오늘 하루는 우매리에서 땡감을 갈취하기 위한 농담 따먹기 휴식 시간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뭐 싸고 뭐 볼 시간도 없이 지나가 버렸다. 더군다나 입동이 며칠 남지 않아서 해가 짧아 사위는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여 버린다.

어쨌거나 위장에 연료는 넣으려면 대충이라도 찌개는 끓여야 하고 방에 군불도 때야 하기 때문에 번갯불 콩 구워 먹듯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문 밖 밭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들깨대를 한 아름 들고 와서

아궁이에다 쑤셔 넣고 팔뚝만 한 장작을 7~8개 얹는다.

워낙 건조가 잘되어서 별도의 쏘시개를 쓰지 않아도 금세 불이 옮겨 붙는다.

언젠가 불타는 청춘이라는 예능에서 장작불도 제대로 붙이지 못해 별의별 쇼를 벌이는 것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했는데 장작불은 최소한의 기본원칙이 있어야 쉽게 붙일 수 있다.  

첫째, 산소가 원활하게 공급되도록 할 것.     

둘째, 장작은 서로 모아지게 쌓아야 할 것.     

셋째, 쏘시개의 화력이 장작에 작용할 수 있는 적정선을 유지할 것.     


이것으로 끝이다.

물론 경험의 산물이기 때문에 화면에서 폼만 잡던 사람들이 제대로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지만서두.     

쌀과 잡곡을 북~북 문질러 씻어 밥솥에 넣고 쾌속 취사 버튼을 누르고 묵은 김치를 잘게 썰고 돼지고기 얼린 것을 투하하고 마늘과 양파를 타라락! 찧고 썰어 넣고 뽀글뽀글 끓이면 일명 속성 두루치기가 완성된다.

그리고 산과 들을 이틀 동안이나 뒤지고 뒤져서 담근 고들빼기김치 한 접시 꺼내놓고 고추 멸치볶음과 구운 김을 곁들이면 패스트푸드 같은 저녁밥 준비는 끝이다.  

야생 고들빼기 김치. 맛나보이지 않나?^^

그사이 장작 대여섯 개 아궁이에 더 처넣고 차를 마시기 위한 준비를 하고 오디오 예열을 위한 전원 스위치를 눌러 놓은 다음 듣고 싶은 CD 몇 장을 골라놓으면 일단 저녁을 나기 위한 준비는 완료되는 것이다. 시골에 살았던 어릴 적의 추억과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 때문에 농가를 마련하긴 했지만 서울 중심으로 생활을 해나가다 가끔씩 시골에 들르는 것도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왕복하는 시간도 그렇지만 도회지의 아파트와 달리 시골집은 환경 자체가 달라서 수시로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고추멸치볶음. 요리하기 쉽고 맛도 좋다

특히 새로 신축한 건물이 아니고 수십 년 이상 묵은 흙집인 경우는 허구한 날 보수하고 땜빵질에 시간을 쏟는 일이 많다. 건물이라는 것은 사람 손이 닿지 않고 손 기름이 묻지 않으면 희한하게도 급속하게 사그라지는데 낡을 대로 낡은 흙집은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했던 흙벽이 오랜만에 와보면 어딘가 덜~렁 떨어져 구멍이 나있어 난감한 상황에 빠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또한 굳게 닫아놨던 창고문도 활짝 열려 있고 이것저것 집기들도 바람에 날아가 사방 군데에 처박혀 있어 도착하자마자 항상 뭔가를 정리하고 추스르는데 시간을 써야 한다. 누구 말대로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으면 원래 살던 귀신이 장난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6~8월에는 2~3주만 집을 비우더라도 대문 밖과 마당은 그야말로 밀림으로 변해 버린다. 망초 같은 경우는 불과 2주 남짓에 60cm~70cm까지 속성으로 자라기 때문이다.


이녀석은 여름내내 시골집 마당에 상주하고 살았다

그리고 잡초가 무성해지면 각종 벌레와 개구리는 물론이고 비얌까지 들락 거린다.

먹이의 사슬이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마당 우물가에서 샤워하다가 등 뒤로 뱀이 스~르~륵 지나가는 통에 간이 떨어졌다

붙는 날도 있었고 헛간 구석에 숨어있는 너구리 가족 때문에 화들짝 놀란적도 있었다.      

언젠가 집을 비운 3주 사이에 생겨난 엄청난 크기의 말벌집 때문에 기절초풍한 일도 있었다.

말벌집

한, 두 개도 아니고 무려 5개를 연달아 짓고 있었는데 인간사회로 치면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언뜻 보면 누런 갓을 씌운 전등과 흡사할 정도로 크기와 모양이 비슷해 보였다. 아마도 한동안 인기척이 없는 흙집인 데다 비바람까지 피할 수 있는 지붕 밑 안쪽이니 말벌들이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말벌집을 통과하여 방문을 열어야 하고 냉장고도 열어야 하는데 수천 마리도 넘는 말벌들이 왱! 왱! 거리는 살벌함 때문에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119를 부르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고 직접 하자니 생명보험부터 먼저 들어야 할 것 같아 한동안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무단침입은 물론 무허가 아파트를 건축한 불법 침입자들을 쳐부수고 격퇴시켜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전쟁이나 다름없는 일이고 인간사에서 무수하게 겪고 넘었던 극복의 과정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뭐 전쟁이니 극복이니 하는 거창한 수사적 뻥을 칠 것 까지는 없을지라도 인간의 삶과 생활에 방해를 하는 것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제거해왔던 것이 이 세상의 방식이었으니 나 역시 그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선 중무장을 하고 말벌집 제거를 위한 준비물을 챙겼다.

먼저 기다란 쇠막대기에 헝겊을 둘둘 말고 백등유를 잔뜩 멕였다.

또한 지난번 집수리할 때 남았던 백색 락카와 혹시 모를 화재에 대비하여 분사용 호스도 준비해 두었다. 바짝 마른 목조건물에 붙은 말벌집을 태우다가 자칫 집까지 태워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긴팔 셔츠와 두꺼운 점퍼를 껴입고 머리에 수건을 두른 후 밀짚모자를 쓰고 차광용 비닐을 2중으로 뒤집어

쓴 다음 장갑도 2개를 꼈다.

수천 마리의 살인적인 꼬마 장수말벌과 전쟁을 벌이는데 그 정도의 준비는 철저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사다리를 타고 락카를 뿌렸다.

굉장히 효과적이다.

우선 락카의 점액질이 말벌집의 구멍을 메꾸면서 휘발성 유류가 도포되기 때문에 졸지에 공격을 받은 말벌들이 폭격을 당한 듯 난리가 난다.

꼬마 장수말벌

그리고 기름 멕인 헝겊 뭉치에 불을 붙여서 벌집을 태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도 혹시 처마에 불이 옮겨 붙을까 봐 물 분사기를 준비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였다.

나의 공격에 수천 마리의 말벌들이 집에서 빠져나와 그야말로 진주만을 공격하는 가미가제 전투기같이 왜~애~앵! 왜~애~앵! 난리를 치고 날아다녔다.     

일반적으로 말벌이 가장 흥분하고 공격적일 때는 자기들의 집을 공격당할 때라고 한다.

당연히 자기 집을 쳐부수는 나를 공격하기 위해 수백 마리의 말벌이 내 주위를 감싸고 날았다.


그러나 작업을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이미 시작한 전쟁은 끝장을 봐야 하고 그래야 모처럼 들른 시골집을 사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손과 어깨에 한방씩 쏘였다.

마치 묵직한 침을 맞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이놈들은 말벌 종류 중에서도 두 번째로 강력한 꼬마 장수말벌 아니던가!

매년 성묘 때 말벌에 쏘여 목숨을 잃는 사례가 적지 않기에 덜컥 겁이 올라왔다.

물론 이 녀석들은 가장 흉포한 장수말벌보다 크기가 작고 독성도 약하지만 히스타민이나 세로토닌 등의 신경전달물질과 여러 종류의 효소가 포함된 무기를 갖췄다는 것은 동일하다.

따라서 여러 방을 쏘이게 되면 호흡곤란과 급성 알레르기 반응으로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말벌과의 전투를 하면서도 나의 호흡에 문제가 없는지 지속적으로 주의를 기울였다.

만일 호흡이 가빠지거나 정신이 아득해지면 이유불문 응급구조를 요청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기 분류에 따르면 시골집에 둥지를 만든 녀석은 꼬마장수말벌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러한 반응은 없었다.     

하기는 어릴 때 벌 중에서 가장 큰 호박벌에게 쏘인 적도 있었고 이 녀석들보다 훨씬 강력한 장수말벌 침도 경험해본 터다. 또한 땅벌집을 공격하다 수십 방씩 쏘여서 머리통이 멍게처럼 퉁퉁부어 된장을 처바른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니 어찌 보면 그때 이미 벌독에 내성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말벌은 한번 침을 쏘고 나면 죽어버리는 꿀벌과 달리 침을 영구하게 쓸 수 있다.

따라서 계속적인 공격이 가능한 녀석들이어서 위험성이 크므로 특히 조심을 더해야 한다.


2번을 쏘이기는 했지만 나는 진격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5개의 말벌집을 모두 떼어낼 수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벌집에 말벌들이 맴을 돌면서 여전히 나를 공격해 왔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나는 곧 승리의 나팔을 불 정도까지 녀석들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말벌 중에서 장수말벌은 땅속에 집을 짓지만 다른 종들은 대부분 나뭇가지나 건물 밑에 집을 짓는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밀랍으로 집을 짓는 꿀벌과 달리 나무를 갉아다 타액을 섞어서 집을 짓기 때문에 마치 얇은 코르크와 같이 바삭바삭하고 가볍다. 그래서 불을 붙이면 쉽게 타버린다. 땅에 떨어진 말벌집에 백등유를 뿌리고 불을 붙이니 순식간에 한 줌의 재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말벌들은 주위에 맴돌고 자신들의 집이 붙어있는 곳을 떠나지 못한다. 이 녀석들을 락카를 분사하여 공격하니 하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땅바닥에 떨어져 맥을 쓰지 못했다. 이렇게 말벌과의 사투는 무려 3시간이나 지속되었다.

이 전쟁이 벌어진 이후에도 며칠 동안이나 말벌은 계속 날아왔다.

밖에서 먹이를 잡느라 외출한 녀석도 있었고 자기들이 지었던 둥지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예측하지 못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천장을 기어 다니는 지네가 갑자기 뚝! 떨어지기도 하고

집안이 궁금한 새가 날아들어 온 방안을 헤집기도 한다.

밖에 거울을 걸어놓으면 자기의 영역을 지키려는 새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적으로 인식하고 끊임없이 거울을 쪼아대며 공격하기도 한다.

비오는날 허락도 받지 않고 침입한 청개구리

또한 방문이나 창문 어디라도 틈이 생기면 서생원들이 기가 막히게 찾아서 들어온다.

그리고 찾기도 힘든 구석에다 잔뜩 대변을 내질러서 오살 놈의 똥냄새에 콧대가 썩어버리는 것 같다.

이것 말고도 도둑고양이가 소리 소문 없이 슬쩍 방문하는 경우도 있고 여름철에는 각종 날벌레나 모기가 엄청나게 날아 들어온다. 지금이야 그런 것들에 대한 방비를 하고 어렵지 않게 처치를 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매 순간마다 대책 없이 허둥대고 당황했었던 날이 허다했었다.     


한겨울의 산촌마을은 적막하기 그지없다.

하루 종일 사람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때도 적지 않다.

날이 추워지면 노인들이 대부분인 주민들이 거의 움직이질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인의 순환기 질환이 다발하는 동절기에는 도회지의 자식들이 모셔가는 경우도 많아 더욱더 사람 보기가 어렵다. 또는 아침밥을 먹자마자 마을회관으로 들어가서 저녁밥까지 해결하고 잠만 자러 집에 돌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마을회관에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지원한 물품이 수북하게 쌓여있고 난방비 걱정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유류가 공급되기 때문에 굳이 외롭게 집안에 틀여 박혀 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시골 농가 뒤로 보이는 백화산. 산에서 휘~잉하고 불어내려오는 겨울바람이 장난 아니다

솔직히 한겨울 산촌의 외딴집은 무섭다.

어쩔 때는 귀신이 사방에서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렇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양철지붕을 뛰어다니는 들고양이들 때문에 섬찟섬찟 놀라는 일도 적지 않다.

겨울이 무서운 이유는 또 다른 곳에도 있다.

바로 겨울바람이다.

바람은 사시사철 불지만 분명한 것은 계절마다

그 성격이 다르고 소리도 다르다.

     

봄바람은 부드럽고 살랑거린다.

여름 바람은 소리도 크고 두텁고 휘몰아친다.

초목의 이파리들이 무성하여 바람을 쓸어내는 범위가 크고 묵직하기 때문이다.

가을바람은 두께가 얇지만 신선하고 맑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겨울바람은 매몰차고 딱딱하고 창날 같은 직선형이다. 주변에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심야의 시골 방구석에 덩그러니 앉아 있으면 무슨 이유에서인가 소름이 돋는 날이 적지 않다.

매몰찬 바람이 나무를 스치며 내는 소리도 스산하기 그지없고 이파리 없는 가지들이 서로 부딪치며 발생하는 기이한 소리에 놀라기도 한다. 특히 안개가 많아 저기압이 마을을 뒤덮는 날이면 멀리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긴가민가할 정도로 미묘한 느낌으로 흘러 들어온다.


언젠가 알듯 말듯하고 들릴막말락한 정체불명의 소리가 새벽까지 끝없이 이어 진적이 있었다.

영 꺼림칙하고 무섭기도 하고 기분도 더할 수 없이 거시기하여

내키지 않지만 랜턴을 들고 적막하기 그지없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본 적이 있었다.

방안에서 들릴 듯 말 듯하는 소리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기보다는

직접 나가서 확인하고 맞닥뜨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리의 발생지는 확인되었다.

농가에서 직선거리로 1km 남짓 거리에 있는 종교단체 수련원이 있었는데 여기에 수련하러 온 아이들이 새벽까지 나무를 태우며 얘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까?

악을 쓰는 것도 아니고 집단으로 떠드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러한 의문을 풀어보려고 여러 가지 자료를 찾아봤다. 낮은 기압에서는 소리가 낮게 깔려 저주파 형태로 먼 곳까지 간다고 하더라.

그때는 영락없이 귀신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줄 알았다.          


전원을 동경하고 자연 속에서 삶의 여유를 찾으려는 도시민이 적지 않지만 실제로는 적지 않은 난관과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필히 전제하여야 한다. 흔한 말로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표현이야말로 귀농, 귀촌에 똑떨어지게 잘 들어맞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시골 출신이라 비교적 시골의 정서를 잘 파악하는 편이고 웬만한 농사 정도는 해치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약 4년여간의 농촌 경험은 귀촌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음을 솔직한 심정으로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귀촌보다는 귀농의 실패 확률이 높다.

귀촌이야 경제적 문제와 상관없이 전원생활이 목적일 뿐이지만 경제적 문제를 전제한 귀농은 정말 심사숙고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선험자들의 경험론이나 조언이다.

귀농과 비교할 순 없지만 귀촌 역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수반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막상 귀촌을 해보면 가장 먼저 대두되는 문제가 현지민들과의 교류와 적응이다.

시골사람들이라고 그냥 만만하게 생각하면 큰 코는 물론 작은코까지 사정없이 피투성이가 되기 일쑤이다. 경험자라면 누구나 인정할 만큼 결코 만만치 않는 장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시골사람들은 도회지 사람들한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포괄적으로 해석하면 텃세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일종의 도회지 콤플렉스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순박하고 친절해 보인다고 경솔하게 행동하고 쉽게 사람들을 대하면 여지없이 왕따로 몰리기 십상이다. 대를 이어 터전을 깔고 살아왔거나 최소한 수십 년을 같은 지역에서 거주했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끼어든 외지인은 어디까지나 이방인일 뿐이고 경계의 대상인 것이다.     


귀촌이나 귀농이나 마음을 비워야 적응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정서적 커뮤니케이션이다.

어떤 면에서는 도대체 무슨 얘기들을 하며 살아야 하나?라는 막막함을 느낄 때도 적지 않다.

일례로 차(茶)나  음악 등의 문화적인 취미와 시사적인 문제에서도 공유할 수 있는 면이 얇다.

그러니 얘기를 나눈다고 하더라도 단순한 일상적인 것 밖에는 거의 필요가 없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답답하고 상호 간의 교류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누구의 탓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상이한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 간극을 좁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의 벽이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처음에 겪었던 몇 가지 황당한 문제를 토로하자면,

마당에 불을 켜놔도 시비를 건다.

- 당신 돈 많어?

  왜 다 자는 밤에 불을 켜놓는거여?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농삿일 해야하는디 당신이 불을 켜놔서 잠을 못들잖여 X벌!

음악을 크게 틀어도,

- 당신 이 동네 혼자 사는겨?

  아니 씨벌 이미자 배호도 아니고 무신 깽깽이 삶아먹는 소리여!

다리가 아픈 시골 할머니 손잡고 운동이라도 도와드릴라치면,

- 당신네들은 아무 여자나 손을 막 잡는 거여?

  조심혀, 여기 그런 동네가 아니란 말여!

참 많이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모든 일이 귀촌 첫해에 겪었던 실화의 일부분이다.

결국 이장님 조언에 따라 소주 2박스, 라면 2박스, 수박 2 덩이를 싸들고 가서

공손하게 머리 숙여 인사하고 신고식을 치렀고 그것도 1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런 시비를 당하는 일이 줄어들었다.      


컴컴해진 마당에 불을 켜고 늦은 저녁밥을 먹었다.

혼자서 먹는 밥은 항상 그렇듯이 대충대충 후루룩 뚝딱이다.

식후 설거지라고 할 것도 없다.

기껏해야 밥그릇, 국그릇, 수저, 젓가락 한 개씩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사이 온돌방은 따끈따끈하게 덮혀져 있었다.

지난봄에 만들어둔 감잎차를 걸렀다.

희미하게 탄닌 성분이 남아있지만 구수하면서도 담백한 맛이다.

음악듣고 책도 읽고 차도 마시는 시골집. 혼자있는 시간 자체가 파라다이스이다

그리고 최대한 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는 시간이다.

얼마나 좋은지.....

안온하고 행복하고 평화롭고 여유로움에 나 스스로 감격을 할 정도이다.  

사람들이 힐링, 힐링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힐링이 있을까!

방안에 배어있는 약간의 낸내는 군불을 때는 방의 향기와도 같다.

마치 고기를 구울 때 연기를 쐬어 훈제의 풍미를 가미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뜨끈한 온돌방의 안락함은 산에서 쓸려 내려오는 늦가을의 쌀쌀한 공기 때문에

더욱더 그 필요성과 존재감을 인정케 한다.

이런 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행복이 아닐까 싶다.

물론 순전히 나만의 주관적 판단이자 느낌일 뿐이지만.       

이제는 음악을 크게 틀어도 누가 시비 거는 일은 없다.

이미 텃세를 이것저것 몇 년간이나 지불했기 때문이다.     

아무한테도 간섭받지 않는 공간과 시간을 갖는 창공을 나는 라이더와 같은 기분이다.

이러한 시간을 즐기기 위해 적지 않은 여러 문제들을 감수하면서도

내가 시골 농가를 유지하고 시간 날 때마다 찾는 이유이다.

대문만 걸어 잠그면 홀라당 벗고 알몸으로 돌아다녀도 누가 볼 사람도 없어

그야말로 자유인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베르나르드 하이팅크 - 19229

아쉬케나지가 두드리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CD를 플레이어에 걸고 귀청이 떨어져 나가도록 볼륨을 높여본다. 두툼한 아쉬케나지의 손가락이 건반을 두들겨 패고 하이팅크의 지휘봉은 허공을 긋고 춤을 춘다. 머리카락에서 흩뿌려지는 땀방울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이 생생하게 연상된다. 같은 음반에 수록되어있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4번은 그냥 패스. 이상하게도 그 곡에는 애정이 별로 가지 않아서다.

      

플라멩코 기타의 일인자 파코 데 루치아(Paco De Lucia)가 연주하는 Live In America 음반은 스페인에 가는 지인에게 부탁하여 현지에서 구입한 오리지널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2014년 멕시코 칸쿤 해변에서 손자와 놀던 중 심장마비로 급사해 버렸다.

존 맥러플린, 알 디 메올라와 함께 최고의 스페니쉬 기타리스트로 클래식, 재즈, 락 등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어 다닌 참다운 명인 중의 명인이다.

 

파코 데 루치아 - 1947. 12. 21.~2014. 2. 25.

까마론 데 라 이슬라 - 1950~19922

첫 번째 곡인 Mi Nino Curro 역시 귓구녕이 얼얼하게 볼륨을 올려 듣고 다른 CD에 있는 Cmaron De La IslaComo El Agua를 맞이한다.

한 사람은 기타리스트이고 한 사람은 가수이다.

두 사람 모두 플라멩코 음악을 메이저 라운드로 끌어올린 최고의 아티스트들이다.

까마론 데 라 이슬라는 천시받는 집시 출신이면서 플라멩코 음악을 통해 집시들의 지위를 향상하고 자신의 고향을 관광지로 지정하게 만들 정도로 전 세계인의 환호를 받은 인물이다.

까마론은 42세인 92년도에 사망했지만 파코 데 루치아와는 거의 동년배(까마론이 3살 어림)

여서 같이 공연할 기회도 많았다. 이 두 사람이 협연한 곡 중 하나가 Como El Agua인데 다행스럽게 두 번째 스페인 방문자가 구입해 주었다. 한마디로 그 현란하기 그지없는 플라멩코 기타 연주와 파격적인 목소리를 감히 평가할 방법이 없다. 이 위대한 아티스트들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여러 미디어를 통해 생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뿐이다. 유난히도 발현악기를 좋아하는 내 취향이 다양한 발현 음악 소스를 보유하게 만들었는데 스피커 역시 그러한 음악을 기준으로 장만하기도 하였다.

     

시골 농가에 있는 스피커는 JBL XPL 160A인데 한국에서 그리 쉽게 구해지는 물건이 아니다.

3년 전 우연히 대구의 변두리 굴속 같은 어떤 집에서 너덜너덜한 놈을 구해서 때 빼고 광내고 미드레인지와 트위터를 수리해서 현재까지 듣고 있는 중이다. 이 놈은 국내에서 그리 큰 평가는 받지 못했지만 상당한 실력기로 오디오 마니아들에게 호평받고 있어 어쩌다 중고가 출현하면 순식간에 구매자가 데리고 가버리는 녀석이다.     

이 녀석의 장기는 라이브 음악이다. 특이하게도 미드레인지가 두랄루민으로 채택되어 있어서 잘못 다루면 금방 구겨지고 찢어져 버려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 다루어야 한다. 스피커 내부를 살펴보면 네트워크가 기대 이상으로 충실하고 충진재도 양모로 채워져 있어 전체적인 만듦새가 분명 중간급은 넘어서는 녀석이다. 오디오 쟁이가 늘 그러하듯 언제까지 이 녀석과 동거를 할진 모른다. 다만 발현 음악을 차랑차랑하게 울려주는 것으로 유명한 ‘아포지’를 들어 본 후 확실한 차이가 생긴다면 혹시 생각이 달라질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Apogee Acoustics Diva 정도의 그레이드는 아니고 Apogee Duetta라면 어느 정도 자웅을 겨뤄볼 수 있지 않을까?


아포지 스피커는 정전형 스피커의 대명사로 특히 발현악기나 피아노 음악 재생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라우드 스피커 유닛의 물리적 특성과 통울림을 기반하는 일반적인 스피커와는 그 개념 자체가 다르고 재생 메커니즘도 전혀 달라서 직접적인 비교는 할 수 없다. 일반적인 스피커는 전기신호를 진동판의 진동으로 바꾸어 소리를 재생하지만 정전형 스피커는 정전계의 작용에 의해 진동을 발생시켜 소리를 만들어내므로 소리의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뭐 그렇다는 생각이 있을 뿐이지 당분간 오디오에 집적거릴 마음은 없다. 워낙 이것저것 수도 없이 주워 모아서 더 이상 어디에다 처박을 공간도 없기 때문이다. 대략적으로 스피커만 15종이고 앰프만 12종이니 마누라 눈총 때문이라도 당분간 다른 기기를 넘볼 수가 없는 것이다.    

10여 년전 중국에서 망설이다 구입하지 못했던 중국 소수민족 발현악기. 사진 볼 때마다 아쉽다

시골집에서 음악은 항상 밤 10시까지만 듣는다.

그 이후에는 노닥거리거나 책을 읽는 시간이다.

특히 이 시기에는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여서 밤이 깊어갈수록 호젓하다.

가끔 멀리 2차선 도로에 차량이 지나가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온 사위가 고요하다.

오뉴월만 하더라도 뒷산에서 들려오는 짐승들의 짝짓기 소리가 요란하고 깊은 산골의 밭을 지키는 진돗개들의 짖는 소리가 사방을 울리지만 가을걷이가 모두 끝나버린 이 시점에서는 그런 소리마저도 진작 사라져 버렸다. 초저녁에 군불을 지핀 방바닥은 진작부터 열기가 대단하여 방안 공기가 후끈후끈하다.

덮어놓은 이불에서 헝겊 누린내가 날 정도로 뜨겁다.


시원한 홍시 2개를 준비하고 졸릴 때까지 책이나 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골랐다.     

요즘은 뭣에 끌렸는지 고전에 맘에 끌린다. 계절 탓도 있겠지만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세상의 이치와 진리에 대한 탐구를 더 늦기 전에 조금씩이라도 더듬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다고 해봤자 내 인생관과 가치관이 갑작스럽게 변할 리도 없겠지만 갈수록 혼탁해지는 세상과 경박해지는 세태에서 옛 현인들의 가르침은 찌들어진 내 영혼을 다소나마 정화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老子(李耳) - BC 604년

노자의 도덕경과 공자의 논어 중 무엇을 먼저 읽어 볼까? 두권 모두 단순 무지한 나의 지식의 한계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동양철학의 최고봉이다. 하지만 우주만물의 이치와 세상의 진리를 논파(論破)할 정도의 경지에 오른 분들의 위대한 저작물이기에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순전히 내 의지의 경계의 끝에서 지레 겁먹고 도망갈 이유도 없다.

읽어서 신선이 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설사 읽다가 막히면 돌아가거나 중단한다고 하더라도 누구한테

떫은 소리를 들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노자의 도덕경을 골랐다.

무위자연을 설파했던 도가적인 내용이 마음에 끌리기도 했고 공자보다는 20년~30년 선배이기도 하고 그의 성씨 또한 나와 같은 이씨(李氏)? 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노자가 李라는 姓을 만든 최초의 시조일지도 모른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노자의 어머니가 자두나무(李樹)에 기대어 노자를 낳고 그 자두나무를 뜻하는 ‘李’로 노자의 姓氏를 정했다고 하니 2,620년(BC 604년) 전에 오얏 이(李氏)의 성을 가진 사람이 최초로 태어났던 것이다. 아직까지 노자 이전에 누가 ‘李’라는 성씨를 최초로 사용했는지는 중국 역사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다. 그러나 노자의 조상들이 대대로 이관(理官)을 지냈기 때문에 ‘理’를 ‘李’로 바꿔 득 성하게 되었고 그 조상이 이이정(李利貞)이라는 말도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설 역시 객관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은나라 말기 이이정의 어머니가 왕의 폭정을 피해 달아나다 자두로 허기를 채웠는데, 은나라가 망하고 다시 돌아와 고현(苦縣)에 정착한 뒤 자두나무의 은혜를 기억하여 ‘理’를 ‘李’로 바꿨다는 설도 있지만 이 것 역시 그 근거가 명확 치는 않다.           


물론, 노자는 중국사람이고 나는 단군의 자손이기 때문에 ‘李’라는 姓만으로 희박하기 그지없는 연관성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 다룬 토종 6 씨(金, 李, 朴, 鄭, 高, 崔)의 姓이 이 땅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고 결국 중국의 한자를 사용한 중국의 성씨 중에서 받아 온 것이라면 나의 ‘李’라는 姓과 노자(李耳)를 ‘아무런 연관도 없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 한국의 성씨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金氏이고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李氏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중국의 고사성어 중 장삼이사(張三李四)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전체 백성 중 셋은 장(張)씨고 넷은 이(李)씨라고 하니 전체 인구 중 70%가 李氏와 張氏였던 셈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씨가 가장 많았고, 두 번째 왕(王)씨, 세 번째가 장씨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장삼이사가 아니라 왕삼이사(王三李四)가 맞는 말이다. 그러나 왕삼이사(王三李四)라고 하면 왕(임금)이 셋이라는 뜻이 되어 불경 또는 역모의 의미가 있어 왕씨 대신 장씨를 넣은 것이라고 한다. 어찌 되었든, 현재 전 세계의 성씨 중 1억 명이 넘는 것은 李氏가 유일하다고 하니 이 글을 쓰는 현재 시점에서 세계 인구 73억 5천5백여만 명 중 70분의 1이 李氏인 셈이다. 사실 내가 李가이 건 金가이 건 그것은 순전히 삼신할머니의 뜻에 따라 세상에 나왔으므로 나란 존재는 그저 피동적 결과의 산물일 뿐이다. 또는 윤회의 고리에 얽혔는지 사주팔자가 그런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나는 李氏 姓을 가진 주체이면서 또한 객체로서 나에게 주어진 생명의 시공간 속에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 삶의 여정에서 때론 고뇌하고 사유(思惟)하고 현실세계의 희로애락도 맛보면서.


도덕경.

불과 5,000 여자에 불과한 소책자일 뿐이지만 지금까지 서양에 번역된 숫자만 300여 종이 넘고

‘세계 철학사’라는 명저를 남긴 슈퇴릭히(Hans Joachim storig)가 ‘이 세상에 단 3권의 책을 남긴다면 자신은 ‘도덕경’을 꼽겠다'라고 경탄했던 노자의 유일무이한 철학서이다. 또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 역시 자신에게 가장 심대한 영향을 끼친 책중의 하나로 도덕경을 꼽았다고 한다. 우매하기 그지없는 의문이지만 단 5,000 여자에 불과한 도덕경이 수천 년의 시, 공간을 넘어 현재까지도 사람들에게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소싯적에 한동안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니체나 쇼펜하우어에 심취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 현재 그 흔적들은 머릿속에 아주 희미한 잔상만 남아있을 뿐이다.

사실 뭣도 모르는 내가 철학에 대한 고저 담론을 논할 생각은 없다. 아니, 전혀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이렇게 난해하고 복잡한 철학에 관한 글을 끄적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사족이 주렁주렁 매달려 쓸데없이 글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다. 산야에 쏟아진 빗물의 최종 귀착점이 어디인지는 모두가 알지만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가는 것인지를 미주알고주알 설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사실 그러한 자연현상보다 우매한 인간의 사고가 훨씬 복잡하고 난삽(難澁)하다. 자연은 법칙에 의해 대범하게 모든 질서가 유지되어가지만 글은 그러한 법칙과는 전혀 상관없는 인간 사고의 산물이어서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면 마치 행방이 묘연한 물을 찾는 것과 같은 혼란에 빠져 들기 때문이다.

    

내가 ‘노자’ ‘논어’를 한 권씩 구입한 곳은 얼마 전 고속도로 휴게소 편의점이다. 중요한 약속을 휴게소로 정했는데 만날 대상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오후 5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6시가 넘어갈 때까지도 꼴도 보이지 않는다.

전화를 해보니 차가 많이 막힌다고 한다.

어쩌겠는가!

방법이 없다.

그냥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호두과자도 한 봉지 사 먹고 커피도 마시고 이것저것 구경을 해봐도 무료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책이 눈에 띄었고 평소 다시 한번 읽어보리라고 마음먹었던 노자가 눈에 띄었던 것이다.

책을 뽑아보니 얼마나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는지 먼지가 뿌옇게 쌓여있다.

계산을 하면서 ‘책이 잘 팔려요?’라고 물으니 편의점 직원은 그냥 웃기만 한다.     

지독히도 책을 안 보는 사람들.

그래서 얄포롬한 껍데기 지식만 범람하는 사회.

그저 얇은 지식만 뚜르륵! 훑어서 서치 하기 때문에 Summary 하는 능력시험이 있다면

한국사람은 무조건 100% 합격할 것이다.

많이 걱정된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책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과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인지,

지식은 어떻게 쌓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희박하다.

설사 책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그저 표면 지식 위주로 쉽고 재미있는 것만 찾는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응용력은 강하지만 창조력은 형편없이 떨어진다.

또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하거나 생산하여 세계에 도전할 기반이 박약하다.

이유야 수없이 많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원인은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고착된 결과중심주의를 맹목적으로 인정하고 따르는 가치관이 팽배한 때문일 것이다.


스믈 몇 번이나 되는 일본의 노벨상 수상을 부러워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는

국가와 사회에서 어떤 미친놈이 그런 목적을 설정하고 도전을 하겠는가!

당장의 시험성적, 당장의 성과만을 요구하고 그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에게 이유불문

보상이 돌아가는 사회에서 어떤 골 빈 인간이 소신은 물론, 학문의 진리를 탐구할 의욕을 품을 것인가!

그러한 결과우선주의 가치관이 우선하는 사회에서 소위 출세의 반열에 오르거나 남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부분 사람들이 진작부터 파악하고 있는 처세술인 것이다.


이미 수십여 년 전부터 그렇게 훈련되어왔고 그 관념화된 등식은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아니 실패의 가능성이 훨씬 큰 장기플랜이나

노벨상 등의 목표에 인생을 던질 사람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일 년에 서너 차례 가보는 대형서점의 서가를 훑어보면,

국내 학자들의 저술은 거의 보이지 않고 대부분 번역서이다.

특히 전문분야의 토생학문은 진작에 씨가 말라 움도 틔지 못할 정도로 절멸 상태이다.

그렇다고 학계의 반성도 없다.

그냥 무심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자연과학, 이공학 등의 전문분야는 철저하게 외국 학문에 종속되어 버렸다.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걱정도 눈에 띄지 않는다.

......!

그냥 할 말 읎다!     


책장을 폈다.

‘노자사상의 전개와 재정립’이라는 편역자의 해제를 비교적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약속한 인간들을 만나려면 적어도 한 시간 반 이상은 족히 기다려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해제를 꼼꼼하고 되새겨가며 읽는 이유는 이렇게 깊고 난해하고 형이상학적인 책을 읽을 때엔

서문이나 해제를 파악하는 것이 첩경이라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다른 욕심은 내지 않고 1시간 30분가량의 시간 동안 15페이지에 달하는 해제를 반복해서 읽었다.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지만 솔직히 이해가 어려운 부분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분적으로 먼 옛날에 읽었던 것들의 파편들이 어느 기억소자에 기록되어 있었는지 조금씩 튀어나온다.

하지만 쭈글쭈글해진 뇌의 해마가 모든 것을 꺼내 주진 못한다.

역자는 노자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당시의 국가와 주변 상황 및 관련인들의 관계를

기나 긴 줄같이 꿰어 설명하고 있다. 읽으면서도 이해가 꼬이고 앞, 뒤의 상황이 섞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경험에 비춰 볼 때 철학서를 읽을 때 항상 겪는 문제인지라 되새김의 반복을 통해 100%는 아니더라도 대략적인 이해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제를 읽고 목차를 훑고 있는 사이 8시가 다되어서 후배들이 도착하였다.      

무려 3시간 반이나 기다린 지루함에 온몸이 녹작지근하였지만 그래도 도덕경 덕분에 짧은 시간이나마 ‘노자’라는 위대한 사상가를 다시 접할 수 있었다는 것에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인간들은 염치도 없는지 도착하자마자 온갖 주문을 해댄다.


- 형, 배고파요. 빨리 먹을 것좀 주문해줘요.

으짜겠는가!     

한국사회에서는 아직도 표면상이나마 장유유서의 전통이 남아있어서 아랫사람이 요구하면 체면 때문이라도 응해줘야 한다.

- 이런 XX 시키들, 그래 뭐 처먹을 거야?

- 우동, 국수, 돈까스......

거기에 커피와 아이스크림까지 처멕이고 나니 괜히 기분이 드럽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약속시간을 어긴 것은 그들이고 이번 약속의 내용 역시 그들의 이익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꾹꾹 눌러 참았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도 있다는 상호주의가 언젠가는 발현될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그때 해제를 읽은 이후 처음으로 본문을 읽을 참이다.

농익은 홍시 한 개를 쪽~ 빨아먹고 가장 편한 자세로 독서 자세를 잡았다.

2시간가량 읽을 예정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정일뿐 상황에 따라 가변 될 수 있다.

읽다가 졸리면 자게 될 것이고 2시간이 지나도록 정신이 말똥말똥하면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책에 파묻혀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철학서를 읽을 때는 항상 이해의 중심을 반듯하게 잡고 들어가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저술들, 특히 철학서들은 저자의 논리에 강요받을 가능성이 상당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들의 사고를 치밀한 논리를 동원하여 합리화하고 설득하기 때문에 자칫하면 어느 한쪽으로 함몰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외골수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이념’에 빠지게 되면 마치 휘어진 굵은 쇠기둥 같이 변형되어 좀처럼 정상으로 되돌리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제아무리 위대한 철학가라도 하더라도 항상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 또는 자신에게 축적된 지식과 사고에 근거하여 논리를 구축하기 때문에 그 간극에 대한 차이는 필히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도덕경은 5,000 여개의 한자로 구성된 작은 소책자이지만 도가의 자연철학에서부터 직관론, 윤리설, 정치학, 군사학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영역을 논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책이다. 보통 소설책 10페이지도 될까 말까 한 작은 양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만물은 물론, 우주까지 뻗어가는 광활무비 한 영역까지 아우르는 포괄성을 담고 있다. 물론 뜻글자인 한자의 특성도 한몫하고는 있지만 그의 웅대한 학문의 정수를 불과 5,000 여자의 글자에 함축했다는 것은 노자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높은 경지에서 세상을 관조(觀照)하고 있었는지 경탄을 넘어 상상조차 힘들 지경이다.    


줄거리로 이어진 소설이 아니어서 전체 81장 중 처음부터 얽힌 실타래를 풀듯 차근차근 풀어헤치고 수십 년 묵은 칡뿌리를 캐들어가듯 시간을 좀먹어가며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가야 한다. 너무도 깊고 심오하고 넓어서 뿌연 안개를 입으로라도 호~호 불어 헤치듯 미로 같은 길을 찾아 한 걸음씩 나갈 수밖에 없다. 그리 양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공자마저도 우러러 마지않았던 노자의 철학 세계를 범인(凡人)의 수준으로 모두 이해하기에는 매우 지난한 문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십 년 전에 읽었지만 아슴아슴한 기억만 잔존해 있는 동서양 성현들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겨 세상 만물의 이치와 진리를 접해보려고 한다. 결코 녹록지는 않겠지만 이것도 목표라면 또 하나의 인생 목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수천 년 전의 현인(賢人) 노자(老子)는 “사람은 땅을 본받고(人法地), 땅은 하늘을 본받고(地法天), 하늘은 도를 본받고(天法道),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道法自然)”라고 하였고 그의 가르침의 중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즉, 억지로 무엇을 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삶을 산다는 의미를 지닌다. 무위(無爲)는 인위(人爲)의 반대 개념이다. 인위란 의도적으로 만들고 강요하여 그것을 지키면 선이고 그렇지 않으면 악으로 간주하는 인간들의 이기적 잣대와도 같다. 그 이기적 잣대에 의해 세상은 계량되고 평가되어 누구인가는 이득을 취하고 그 상대편은 패배하거나 손실을 봐야 한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이분법적으로 형성되고 또 그것에 훈련되고 받아들여지도록 교육받는다. 또한 다툼이 있으면 사법적 판단과 조정으로 승패가 갈라지고 그 법률적 허용범위를 넘어가면 감옥에 영치되는 벌을 받는다.     


이 같은 인간사회의 상호 간 질서를 도모하기 위해 협약한 법률, 또는 암묵적 동의에 의한 통념적, 관습적인 제반 사항도 그 발상이 시작되는 자체부터 인위라는 것이 노자의 주장이다. 즉, 자연(自然)은 인위(人爲)가 더해지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를 말하므로 자연 그대로의 순리를 따르거나 좇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그러한 주장이 비현실적이거나 형이상학적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사회라는 개념을 율법같이 강요받을 수밖에 없고 또한 그렇게 교육받고 훈련받아 세뇌되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남녀 모두 예쁘고 섹시한 것이 대세라고 한다. 멋있고 예뻐야 대접받고 출세가 용이한 소위 외모지상주의 세상인 것이다. ‘예쁘고 아름다움’에 대한 선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와도 같은 절대성을 가진다. 그래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외모를 가꾸는 것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우월한 조건을 물려받은 사람을 ‘자연미인’이라 하고 후천적으로 보강한 사람을 ‘성형미인’이라고 세칭 하더라. 그리고 그 예쁨이 원천적인 것인지 인위적으로 뜯어고친 성형술에 의한 것인지 따지지도 않는다. 일단 예쁘고 섹시하면 호감을 표시하는 것은 물론 심정적 특혜까지 덤으로 얹어진다. 사실 예뻐서 나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예쁘고 상냥하기까지 하다면 누군들 싫어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예쁘다는 기준이 거의 대부분 외모에 편향되는 세태가 한심스러울 뿐인 것이다. 언젠가 요즘 대세라고 하는 8등신 미녀가 초등학생 수준의 시사상식도 알지 못하고 눈만 끔벅끔벅하는 것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한 일도 있었는데 이러한 맹탕 두뇌를 결코 진정한 미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달이 머문다는 월류봉. 우암 송시열 후손들이 은광산을 뚫어 수많은 갱도가 남아있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미(美)와 추(醜)로 구분하거나 그 정도의 차이를 설정하여 평가하려는 의식이 만연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나름의 의문도 든다. 의미 차원에서 보면 예쁜 여자가 못생긴 여자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존재 차원에서 보면 예쁜 여자와 못생긴 여자는 똑같이 평등할 뿐이다. 즉, 현재의 세태는 ‘존재’는 망각해버리고 ‘현상’만 추구하는 천박한 시류에 편향된 사고와 다름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세속적인 모든 가치관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눈으로만 판단한 표면적이고 인위적인 세계일 뿐 인간 존엄의 본질적인 문제는 아닌 것이다. 모든 사물에 대해 보고 느끼기에 역함이 없거나 순리(順理)적인 것들을 ‘자연스럽다’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자연스럽다’라는 표현은 ‘미’와 ‘추’의 2분 법적 개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미 초월해버린 ‘진리’이기 때문이다.      

겨울로 접어든 산촌의 밤은 호젓하다.

밤 9시가 넘어가면 대부분의 집의 등불도 꺼진다.

시꺼먼 어둠 속에 도둑고양이는 살금 거리고 무엇인가를 경계하는 두 개의 눈이 돌아다니고 있다.

이 시각쯤에는 너구리도 굴속에서 기어 나와 먹이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적막한 사위에 부엉이 울음소리가 길게 메아리치고 퍼져나간다.

주변의 서생원들은 간이 오그라 붙어 굴속으로 줄행랑 칠 것이다.

어떤 인간들 역시 간이 덜렁덜렁하고 입안이 바짝바짝 메말라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부엉이 울음소리 같은 민심으로 쥐새끼 같은 국정농단 부역자들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기대앉아 도덕경을 펼쳤다.

그런데 내가 도덕경을 읽고자 하는 마음이 어떤 연유에서 기인한 것인지에 대한 갑작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그 많고 많은 책중에서 왜 하필 도덕경을 선택했을까! 혹시 우리 종씨인 李耳(노자) 선생의 어떤 예시(豫示)가 있었던 것일까? 괜히 엉뚱한 생각들이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 잠시나마 혼란스러워진다.

아마도 근자의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에 대한 현답을 얻기 위해 그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필요성이 작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렇게 함축적이고 난해한 내용을 파헤쳐가며 깨치고자 하는 치열함은 이미 옛날에 상실해 버렸다.

또한 어떤 사안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프로그램 역시 진작에 녹슬고 노후화되어 버렸다.

닦고 조이고 기름 쳐 봤자 제대로 시동이나 걸릴지도 의심스럽다.

다행히 털털대고 삐그덕거린다고 하더라도 돌아가기만 한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불과 300여 페이지 남짓 한 얇은 책이지만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 시간이다.

첫 장을 넘기면서 시작한 도덕경 여행은 당초 예정했던 시간을 망각해 버릴 만큼 나를 몰입케 하였다.

사실 이해가 용이한 내용도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괴리감이 드는 부분도 적지 않았다.

굳이 토로하자면, 수천 년간의 정신세계를 관통한 대학자의 담론(談論)을

불과 몇 시간 만에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이며 또한 말도 안 되는 만용인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논리를 총동원해도 실마리도 잡지 못할 만큼

난감하기 그지없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까마득한 높이까지 올라갔다가 전혀 가늠되지도 않는 깊이까지

사고의 폭을 수시로 왕복하는 격렬한 운전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작악(作惡)과 잡회(雜會)의 사바세계에서 배운 법칙대로 살아가는 내가 수천 년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도(道)의 세계, 즉, 진리의 세계를 낮과 밤사이에 깨우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감생심이었던 것이다.   


다만 2,6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 진리는 불변하다는 것이다. 문명이 발전되었다고는 하나 사람이 살아가는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또한 과학이 발전되었다고 하더라도 행복지수가 높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복잡한 불편에 얽매이는 아이러니가 상존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갈수록 멀어지고 사회는 각박해져 간다. 평범한 일상을 사는 범인이나 국가를 통치하는 위정자나 세상을 살아가는 도리는 다르지 않다. 노자는 그 대원칙을 ‘도’ 즉, 자연 진리를 통해 설파하는 것이다.

    

하룻밤 몇 시간 사이 이리저리 생각이 뒤섞이고 꼬여지면서 읽은 도덕경을 지극히 우매하기 그지없는 내가 통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수차례 다시 읽고 되새김을 반복해야 어렴풋이나마 그 광활한 세계에 겨우 발을 디딜 수 있을 것이다. 철학서나 명저를 읽으면서 느끼는 감상은 언제나 새로운 자각과 함께 삶을 반추하는 소중함을 재인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내가 읽은 도덕경 중 일부의 편린을 인용해 보자.

마치 2,600여 년 전에 우리의 삶을 빤히 알고 있었던 것 같아 신기하기도 하고 신통하기도 하다.

중국 운남성 옥룡설산. 이 사진을 찍은지도 벌써 10년이 되얏고나......

제 57장

天下多忌諱 而民彌貧 萬多利器 國家滋昏

사람들의 기술이 발달되면 될수록 기괴한 도구가 더욱 많아지고,

人多伎巧 奇物滋起 法令滋彰 盜賊多有

법령이 정비되면 될수록 도둑은 점점 많아진다.

     

제 39장

侯王無以貞 將恐滅

군주가 만일 공정치 못하면 고꾸라질 것이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백성을 천히 여기고 학대한 임금이 멸망하지 않은 때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제 17장

근래 우리나라의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그야말로 비논리적이고 비체계적이며 그동안 획책된

음모정치가 뽀록나 나라가 발칵 뒤집혔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내용이다.    

노자는 ‘이상적인 정치가’에서 통치자의 수준을 4등급으로 분류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현재 우리를 통치하고 있는 어떤 사람의 등급은 4등급도 훨씬 넘어가 버린 것 같다.

       

1등급

太上 下知有之  

뛰어난 통치자는 도치(道治)로 나라를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은 그저 통치자가가 있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2등급

其次 親而譽之

두 번째로 뛰어난 통치자는 덕치(德治) 하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를 예찬하고 따른다.  


반야사 인근. 세조가 이곳에서 몸을 씻고 피부병이 완쾌되었다는 설명문이 세워져 있다. 증말......?

3등급

其次 畏之

법과 형벌로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는 백성이 두려워하며 겉으로만 복종한다.

     

4등급

其次 侮之

통치자가 신망을 잃으니 백성은 통치자를 업신여기고 믿지 않는다.        

2016년 기준 2,620년 전의 노자 말씀이다.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어찌 그리 지당하신 말씀만 골라놓으셨을까!

저 등급을 기준하면 우리 현대사에서 1등급은 한 명도 없다. 사실상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바탕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기본적으로 대의정치(代議政治)라서 국민이 정치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은 정치행위의 주체이며 수요자임과 동시에 모든 일상과 행위가 정치와 연결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따라서 통치자의 책임이 과중하게 부담될 수밖에 없는 본질적 문제가 수반되어 기본적으로 형성될 수 없는 환경인 것이다.


사실 굳이 우리나라의 통치자들을 거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 자신 스스로 편향적이라는 굴레에 갇혀버릴 수 있는 모순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의 '이상적인 정치가'를 거론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 나름의 등급은 매겨야 한다.

다만 2명의 외에는 대부분 3등급이나 4등급일 거라는 점은 확실하다.

국내 최고의 명문대학 정치외교학과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아예 등급도 매길 수 없는 인간도 있기는 하지만 거론할 가치도 없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하자.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그 중 한사람은 아버지 프레임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촛불에 포위되어 북악산 자락에 납작 엎드려있는 무꾸리 언니는 몇 등급이나 드려야 하나?

노자님은 가장 낮은 등급의 통치자를 ‘其次 侮之’라고 하였고

그것은 ‘신망을 잃어 백성들이 업신여기거나 믿지 않은 수준’이라고 하였는데

이미 그 등급마저도 훨씬 뛰어넘어 ‘경멸’의 단계까지 홀라당 날아가 버렸으니 아마도 노자에게 부탁하여 새로운 등급을 신설해달라고 부탁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또한 자기 스스로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기도 하다.

사고, 감정, 의지는 물론, 지혜와 각성도 할 수 있는 생명체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사고와 행위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런데 요즘 대한민국을 끌고 가는 권부나 학계 일부 사람들이 보이는 행태는

분명 사람의 그것이라고는 인정키 어렵다.

사고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자각’과 ‘반성’이 결여되어 있고

오로지 ‘변명’만 나불거리는 병리적 사고만 남발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후안무치한 자기성찰 부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7,000년이 넘는 문화역사를 쌓아온 대한민국에서 원칙과 보편적 가치가

흐르는 물처럼 실행되는 날은 언제쯤이나 가능할 것인가!   

백화산 반야사 인근 풍경. 단풍이 화려하진 않지만 소담스럽고 은은하다  

논산 관촉사 윤장대. 티벳의 마니차와 같은 용도이다

노자는 말한다.

聖人在天下 歙歙 爲天下渾其心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자기 일개인의 주의와 주견(主見)을 세우지 않고 다만 온 백성의 마음을 종합하여 자기의 마음으로 삼는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은 밤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달구새끼들은 곧 아침이 온다고 울어댄다.

꼬끼요! 꼬꼬꼬꼬끼요~

닭년인지 닭 놈인지 새벽잠도 없는가 보다.

꼴딱 새버린 지난밤 탓에 내 머릿속은 텅! 비어 무심 공간에 들어간 듯하다.

혹시...... 이것도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경지가 아닐까? 만은......!!  

   

서리 하얗게 내린 들판에서 새봄의 희망을 본다.

그것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맨날 맨날 그래 왔다.


2016년 12월 24일  관악산 밑자락에서 이정석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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