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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Aug 08. 2019

흑백 사진에서 찾은 먼 추억

집안을 정리하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는 수십 년 된 사진들

모두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다시 보니 새삼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언제 봤는지 기억도 까마득한 빛바랜 사진들.

진즉 돌아가신 어르신들도 사진 속에서 웃고 계시고

지금은 영감, 할매가 되어버린 선배들도 있습니다.

사진은 삶의 기록이기도 하며 또한 시간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쪽진 머리에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어머니 어깨 뒤에 기대고 선 큰누나

앙증맞은 손으로 엄마 저고리를 잡고 있는 아이 

사진 밑에 쓰인 현상 날짜를 헤아려 보니

제 돌 때 기념사진을 찍은 것이었습니다.


지금 세상에는 휴대폰 카메라가 워낙 성능이 빵빵하여

굳이 묵적지근한 카메라를 들고 다닐 필요도 없지만

당시에는 재산목록 한자리쯤에 자리할 정도로 귀하디 귀한 

니콘, 코니카, 펜탁스 등의 필카가 있었습니다.

당시는 니콘 F3가 선망의 대상이었지만

F2도 감지덕지에 황송무지할 정도로 귀하디 귀한 놈들이었죠.

사진관에 가서 현상을 할라치면

우선 필름을 먼저 현상해야 하고

그 현상된 필름을 빛에 비춰보며 인화할 대상을 지정하곤 했었습니다.

현상액이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사진에서는

알지 못할 화공약품 냄새가 신선(?)하게 다가왔던 기억입니다.


내 고향 임실,

어른들은 '띄엄바우'라고 불렀습니다.

내력은 알길 없으나

옛날 어떤 장군이 산과 산사이를 뛰어넘었다는 것에서

유래하였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마을 가운데로 전라선 철도가 지나갔는데

그래도 특급열차가 기착하는 농촌의 도시였답니다.

그 열차들이 오가는 시간을 어림잡아

하늘에 떠있는 태양의 위치와 맞춰보면

대충대충 거의 맞아가는 시간을 갖고 살았습니다.


전주도 가고 오수도 가는 시외버스가

구름 같은 흙먼지를 피워 올리며 산 모퉁이를 돌아 내달아 가고

오라이~!

스~토~옵!

소리를 내 지르는 차장 목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열넷이나 생산하신 우리 큰 엄니

경쟁하듯 아홉 남매 제조하신 김성룡 어르신

두 집은 수수깡 울타리 사이의 이웃이었습니다.

그리고 김성룡 어르신의 장남이 

저의 유일무이한 깨북쟁이 절친이기도 합니다.

쬐깐 할 때 이름은 김점섭이었는데

초등학교 때 김태호로 바뀌고

현재는 김일수라고 또 바껴서

점섭! 태호! 일수! 라고 놀려먹기도 한답니다.


두 집안의 공통점은,

신작로와 철로 사이의 공간을 공유하던 이웃사촌이면서

'자기 먹을 것은 가지고 나온다'라는 속설을 믿었는지 어쨌는지

경쟁하듯 아이들을 생산했다는 것입니다.

승자는 무려 14명을 밤낮없이 제조해 내신

우리 큰 아부지, 큰 엄마이고요.

그중 막내는 큰 엄니가 쉰네살에 낳으셨답니다.

(대~애~단 하십니다요ㅠㅠ)

그 막내와 큰 언니의 나이 차이는 무려 36년....!

하이고 오마나......!


그러고 보면 우리 큰 엄니는

18세부터 54세까지 허구한 날 아이만 낳았다는 것인데

결론적으로 우리 큰 아부지가 차~암 대~단하셨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맏며느리로서 일복 많다고 맨날 신세 한탄하시던

큰 엄니는 훨씬 더 대~다~안 하셨고요.

성비 또한 아들 8명, 딸이 6명이니 적중율도 높았을 뿐만 아니라

컨트롤 역시 대~다~안 하신 프로펫셔널 플레이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양가 모두 3대가 같이 살았는데

점섭이네 9명, 큰집 14명의 아들딸이 무려 23명이고

할매, 하나씨(할아버지의 전라도 방언)

아부지, 옴마까지 모두 합치면

무려 31명의 어마무시한 대가족이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쯤되면 우리 큰아부지는 '가장'이 아닌

'족장'이라고 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요즘 같으면 대통령 표창이 아니라 공로훈장이라도 

받아야 하는 국가 유공자급(?)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근데 사실 옛날에는 '자식이 많아야 多福하다'라는 인식이 강하기도 했지만

영아 사망율 또한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에

종족보존 본능으로 인한 다산이 곧 '多福'으로 인식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피임의 개념을 전혀 몰랐던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출산율은 국가나 사회, 또는 환경과 밀접한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데

통계적으로도 밤이 길어지는 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임신한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해방 후~6.25 전쟁 직후 가임여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는 통계가 있는데

이러한 환경적 요인은 외국이라고 별다르지 않습니다.

중동의 6일 전쟁 때 등화관제가 실시된 시기에 엄청난 베이비붐이 일어났다는 

외국 통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러한 환경적 요인으로 대입해 보면

우리 큰집이나 내 친구 점섭이네도 

거의 동일한 요인이 존재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큰집 맏누나가 1945년생 해방둥이이고

막내가 1981년에 出世(세상에 나옴) 했으니 

흔히 말하는 베이비붐 시기가 거의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요인에 더하여

우리 큰집과 점섭이네 집은 또 다른 환경적 요인이 플러스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철로와 신작로 사이에 두 집안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요인 말입니다.

철로와 도로 사이가 불과 150m 남짓인데

시시때때로 뽀~옥~ 칙칙폭폭! 기적소리가 올리고

시외버스도 간단없이 빠~앙~빵 거리며 오고 갔으니

그 사이사이마다 아이를 만들 수 있는 외부적 요인이 수시로 발생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결론적으로 철로와 신작로는 엄청난(?) 다산을 유발한 결정적 촉매제라는 

사실을 결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요즘같이 출산율이 낮을 때 

그런 환경으로 신혼부부들을 몽땅 이주시켜 버리면?

......아마도 맞아 뒈지겠지요?

ㅎㅎㅎ


어쨌건,

신작로와 철로를 지나가는 시외버스와 기차들은 

내 고향 띄엄바우 사람들의 삶에

굵디 굵은 선을 주~욱! 그어 논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입니다.

역전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나고 했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생산된 수많은 정보를 취득하기가 용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른 동네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일찍 깨이거나 약아빠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뭐 맹모삼천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인근의 촌동네에 비해서

특급열차도 기착하고 직행버스 정류장도 있어서 인지

외부로 나가거나 들어오는 다양한 물자가 역전 창고에 집하되었습니다.

5일장에 소요되는 수많은 물자들은 물론

미국 원조(주로 밀가루, 탈지분유, 옥수수 가루) 물품도

거의 100% 역전 창고에 집하되어 각지에 뿌려졌습니다.

따라서 우리 동네는 지역의 물류 중심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물류 중심지가 된 덕분에 역전 창고는 1년 365일 좀도둑들의 사냥터가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미국 원조품인 탈지분유, 옥수수 가루도 있었지만

각종 과자와 빵, 그리고 과일 등은 물론

고구마, 감자, 대추, 오징어, 미역 등의 식품이 산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하루 3끼 다 먹으면 부자고 2끼 먹으면 보통이고

1끼 먹으면 가난한 집이라고 분류할 때라서

한창 성장하는 아이들은 언제나 뱃가죽이 등판에 붙어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전 창고에는 그 배고픔을 해결해 줄 과자와 빵 등의 물품이

무진장 쌓여 있었으니 한마디로 방앗간의 참새나 곳간의 생쥐들이

절대 외면할 수 없는 유혹 덩어리였던 것입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그 창고에 쌓인 각종 물품을 시시때때로 훔쳐 먹은 덕분에

그나마 우리들 몸뗑이가 이만치라도 성장되지 않았나? 

하는 기막히고도 가슴 아린 추억이기도 합니다.

불량끼가 솔찮았던 박O희 형,

개구쟁이 서O수, 삔득새 김O옥, 

그리고 나를 포함한 띄엄바우 아이들.

이들 모두 '역전의 용사'(歷戰의 勇士)가 아닌 '驛前의 勇士'

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던 대표선수들이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설영감님!

나이는 같지만 1년 후배였던 설O환의 부친이셨습니다.

이분에 대한 기억은 1년 365일 술에 취해 있었다는 것이고

얼굴은 불콰하니 항상 대추색이었습니다.

직업이 역전 창고를 지키는 경비원이었던 탓에

날이면 날마다 배고픈 좀도둑들과의 숨바꼭질이 주된 업무였습니다.

눈만 깜빡하면 어느샌가 물건을 빼먹으려는 좀도둑들이 설쳤기 때문입니다.

흡사 삼국지의 장비를 연상케 하는 험악한 인상과 

기차 화통을 삶아드신 듯한 걸걸한 목소리는

동네 아이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


지금 생각해 보면 한없는 죄스러움에 가슴 저리고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그 어르신을 동정하게 됩니다.

하지만 한창 성장하는 청소년기의 배고픈 아이들이

먹을 것이 수북한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는 참새의 본능이었다는 사실을

그 어르신도 충분히(?) 인식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순전히 아전인수 같은 이기주의일까요?

      

어쨌건,

우리 동네 띄엄바우 녀석들은

처마니, 용우치, 안두실, 금당리, 중금리, 화성리,

댕댕이, 도인리, 갈마리 아이들보다는 

비교적 도회스러웠고 촌놈들 중에서는 

속된 말로 돌아까진 장똘뱅이 기질을 가진 녀석들이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다’라는 속설에서 

벗어 날 수 없는 ‘역전’을 중심으로 살았다는 것이고

그 역전을 통해 수많은 문물을 먼저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장마가 지면 학교도 오지 못하는 두메산골 아이들보다는

비교적 잔머리가 빨리 돌아가서 삐질거리는 기질이 후천적으로 

훨씬 많이 배양되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흑백 만화처럼 탈색된 기억이지만

그 망나니 같고 북한의 꽃제비 같았던 아해들은 이제 모두

손주를 볼 나이에 접어든 늙은이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역전 앞마당 식당집 장남 박O수,

삔득새 김O옥, 

허세 가득한 서O수

툭하면 후배를 뚜들겨패던 박O희 등 등이고 

나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당 중의 한 명이었습니다.

아! 그리고 임실군 콩쿠르대회를 석권하시던 

깍신(이발사) 송만수 어르신의 장남 송O용이도 빼놓을 수 없네요. 

김O옥과 쌍벽을 이루던 뺀돌이였고 툭하면 찔찔대던 울보였지만 

부친을 닮아 노래와 춤을 멋들어지게 불러재끼곤 했더랬습니다.

대표곡은? 에라~~ 만수(부친 이름)ㅎ ㅎ ㅎ!    


먼 기억 속의 흑백 사진 한 장.

장소는 아장(애기묘)이 있고 처녀귀신이 맨날 나와서

사람들을 홀린다는 숲쟁이 앞을 걸어가는 장면입니다.

누가 찍어줬는지 기억은 없지만

사진속 인물들은 나와 박O근, 이O진, 최O두, 한O호라는 친구입니다.

그 중 육사 교복을 입고 있는 이O진은 지금 정부단체 일을 하고 있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글을 읽지 못했던 박O근은

어디선가 숙박업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순박하고 말수가 적었던 최O두는 고향에서 농사와 양봉업에 종사하고

기운이 세고 한주먹 했던 한O호는 저세상에 간지가 20 몇년이 넘었습니다.

......!!

참 먼 옛날이지만 기억 속에 살아나는 장면은 마치 엊그제 같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있는 듯하고,

 ‘세월이 유수 같다’ 던 말을 새삼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철로와 망태(철도 신호기) 에 연결된 강철 철사를 넘어가면

갯버들 늘어진 냇가가 있었습니다.

夏節마다 어른들은 천렵을 하시고

아해들은 멱감고 물괴기들 잡고

여자들은 여름밤에 몸을 씻었습니다.

짖궂은 어른들이 자건거 불빛으로 여인들 몸을 비추면

그때마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깔깔거리던

여자들의 속내가 지금도 아리송 하네요^^


그 때 당시의 시간을 아는 방법은 그냥 '어림짐작'이었습니다.

아침 해가 어디까지 오면 몇시쯤이라는걸.....

그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기준이 달랐습니다.

또 하나 기준은 기차가 오는 시간을 기준합니다.

통학열차, 101열차, 특급열차, 화물열차 등등등.....

그리고 그 기차가 어디쯤 오는지도 거의(?) 대충 짐작합니다.

깔막고개를 돌아 나오는 기차소리가 다르고

삽치재를 헐떡이며 올라오는 기차의 숨소리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또한 철로에 귀를 대고 들어보면 

레일과 레일사이를 지나가는 기차 바퀴소리가 다릅니다.

트득! 트득! 하면 평지나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이고

특~~득! 특~~득! 거리면 오르막을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멀게 들리거나 가깝게 들리는 것으로

거리가 어디쯤인가를 기똥차게 계산하기도 했었답니다.

어쨌거나 그 측정법은 나름 꽤 정확했었는데

그 기차바퀴 소리로 거리 짐작을 하고

겁도 없이 철교를 건너는 내기를 하는 만용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겁대가리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알밤 나무 가득한 뒷산 꼭대기에는

커다란 묏똥이 둥구런 모자처럼 앉아 있었는데

그 산을 '모여라 동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새벽안개 들판에 가득하고

아직 고덕산에 햇살이 걸치기도 전에

아침이슬 그득 차서 철떡거리는 

기차표 고무신을 신고 올라가서

모여라! 

모여라!

하고 외치면

까까머리 친구들이랑 성(형)아들이 

눈곱을 주렁주렁 매달고

간밤에 눌러붙은 코딱지도 떼지 않은 채

수 십 명씩 올라왔더랬습니다.


어쩔 때는,

늑대가 업어간 도야지 모가지만 달랑 남은 묏똥이

살짝 무섭기도 하였지만

철딱서니 없게스리 그 돼지 모가지로 축구도 했었던 기억도 나네요.

지금은 멸종되어 버린 토종 늑대가

내 어린 시절에는 종종 되야지나 닭을 물어가기도 했었는데

건너편 산 언저리를 어슬렁 거리던 밤 늑대의 우~우 울음소리와 

빛나는 눈빛들이 새삼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모여라 동산'은 옛날 진사 벼슬을 지낸 양반집 산이었는데

마을 뒷산 꼭대기에 묘를 쓰는 바람에

'풍수적으로 혈을 막아서 과부가 많이 생긴다'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허긴 생각해 보면

유독 남자가 빨리 사망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째서인지

좌우지간 할매, 아지매가 많았던 것은 사실 중의 사실입니다.


그 산에는 밤나무가 많았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유실수 농사를 위해 산 전체에 밤나무를 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밤이 익어갈 무렵이면

이놈, 저놈, 이 어른 저 어른 할 것 없이

그 산 언저리에 많이 머물렀습니다.

올밤, 늦밤, 쪽밤, 길쭉밤, 왕밤, 산밤 등등의

나무가 시시때때로 알밤들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밤을 지키는 사람도 있기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농사가 주업이기도 하고

사방팔방십육방삼십이방이 뻐벙 뚫린 그 넓은 산을

늙고 빼빼마른 노인이 무슨 수로 지킬 수가 있었겠습니까?

결국 수천 그루의 밤나무에서 생산되는 대다수의 알밤은

거의 대부분 동네 사람들의 위장으로 들어가 버리고

정작 주인의 몫은 10%도 될까 말까 한 그야말로 소출(小出)이었을 뿐입니다.


그 산은 우리 집 뒤에 있었습니다.

우리 감자밭 옥수수 밭도 있었고요.

그래서 이런저런 추억도 그 산만큼 많이 박혀 있습니다.

그 산을 넘어가면 진달래가 온통 천지사방에 피어났는데

어른들은 '문둥이가 간 빼먹는다'라고 겁을 주어서

맨날 올라갈 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 했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 산 꼭대기에 앉아서 내려다보면

저 멀리 철로가 보이고

철로 밑으로 개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 개천을 건너가면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른 봄에는 종다리 울음소리 퍼져나가는 먼 하늘 밑으로

홍자색으로 물든 들판이 보였습니다.

그때는 잡초를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대부분 자운영 씨앗을 논에 뿌렸었는데

어린 나물은 무쳐 먹기도 하고

소여물로 제공하기도 했었습니다.


근데 그때 그 산 위에서 보았던

홍자색 자운영 꽃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내 가슴에 선연하게 착색되어 있습니다.

수만 평이 넘을 법한 너른 들판에

봄바람에 일렁이는 홍자색 꽃의 파도

그 아름다운 모습은 절대 절대 

내 가슴과 기억 세포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 내 나이가 고작 10여 세 정도의 촌 아해라

무신 감성이 그렇게 세세하고 예리했을 것일까 만은

여전히 내 감성의 한 복판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어쩌면......!

고향이라는 것과 추억이란 놈이

내 원천적 감성의 일단을

꽉 틀어쥐고 놔주지 않기 때문일런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시기쯤 시골에 가면

필히 자운영 꽃밭을 찾곤 합니다.

그런데 그때의 감성은 거의, 전혀 살아 나오지 않습니다.

면적이 쬐깐한 것도 있었지만

원경으로 바라보던 풍경과

근경으로 보는 풍경은 

확실히 다르기도 하고

좋은 것만 간직하는 추억이라는 필터가

아직 더 강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밤나무 산,

바람이 부는 날은 횡재하는 날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바람의 괴이한 초식과

장풍이 나무들을 휘감아 때려대면

대가리가 빵꾸날 정도로 밤톨들이 쏟아져 나와

여름 비에 골패인 구덩이에 가득 가득히 쌓여졌습니다.


양쪽 주머니에 가득 처녛고

셔츠 안쪽에도 양껏 밀어 넣어

마치 만삭의 임신부처럼 배불뚝이가 되었습니다.

뭐 저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바람 부는 날은 알밤 수지맞는 날'이라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익히 경험칙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할매, 하나씨, 아저씨, 아줌마는 물론

동네 아새끼들 전부 다 밤나무 산에 버글버글 들끓었던 것입니다.

.....!


알밤이 토실하게 익어가던 그 무렵에 기억된 또 하나의 색깔.

온통 연노랑색으로 물결치던 들판의 나락들.

대부분의 기억이 흑백으로 처리되어 버렸으나

들판에 파도치던 홍자색 자운영 꽃과 연분홍 진달래 꽃밭은

여전히 선명한 총천연색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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