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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석 Jul 23. 2019

잔소리꾼 장모님과 함께했던 김장거사

올해 여든세 살이신 우리 장모님.

그 어떤 일이건 간에 자신이 생각하신 일에서 벗어나면

거의 핵폭탄 같은 잔소리는 물론,

집요하다 못해 진저리가 쳐질 정도의 억지가 가히 대책 불가인 노인네입니다.

 

이번 김장거사 역시 수십 년째 되풀이되는 장모님의 잔소리와

그에 반응하는 자식들의 전쟁으로 인하여

여지없이 예전과 다름없는 소란을 넘어 치열한 전쟁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죽어라 일만 하는 작은 처남은

별로 값어치도 안 나가는 1,000여 포기의 배추와 1,000개도 넘는 무를 심었는데

어찌어찌 200~300포기의 배추만 겨우 팔아치우고(1포기당 1,000원)

예년과 다름없는 적자 김장농사의 결과를 얻었습니다.


올 김장 역시,

배추를 따오고 무를 뽑고

다듬어서 소금에 절이는 김장거사는

그저 의무이듯 전통이듯 관습이듯

매년 그렇게 누가 뭐라 하든 말든

당연한 것처럼 치러지는 연례행사와도 같습니다.      

배추와 무, 그리고 갓과 대파, 쪽파, 마늘, 생강, 청각

갈치젓, 새우젓 등의 기본재료 역시 수십년째 별다른 변동이 없습니다.

또한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장모님의 사사건건, 시시콜콜 잔소리가

양념으로 섞여 들어간 것도 틀림없는 사실 중의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처갓집 김장 날에는

앞집, 뒷집, 옆집은 물론,

저 건너 먼 집에서도 여지없이 구경꾼들이 꾸역꾸역 몰려듭니다.


- 아이고! 수곽 아주머니 100살은 너끈히 사시것네!"(수곽이 고향이신 장모님)

- 저렇게 동네가 쩌렁쩌렁할 정도로 기운이 좋으신디 몇 살까지 저렇게 하실랑가?"

- 그래도 아무 짝소리 없이 어머니 모시고 사는 아들이 진짜 대단혀!"     

동네 사람들은 우리 처갓집 김장이 재미가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매년 구경도 오고 참견도 하고 수육에다 김치도 얻어먹습니다.

막걸리 공장을 하는 친척 덕에 제한 없이 마실 수 있는 막걸리도 있으니

이런저런 여러 사연과 핑곗거리가 존재하는 처갓집 김장 날은

수십여 명의 동네 사람이 매년 참관하는 풍성한 행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쨌거나 대충대충 후다닥 끝내버리는 다른 집들의 김장과는 달리

연례행사처럼 시끌벅적하고 풍성한 잔치는 물론,

하루 왼종일 지글지글 끓어대는 장모님의 잔소리와 함께 

많은 후유증?을 남긴 채 김장 행사는 종료됩니다.      

김장행사 종류 후 수십년째 반복되는 後事는 

처와 처제가 장모님을 모시고 목욕을 가는 일이고

마당 정리하고 쓰레기 치우는 뒷정리 담당은 제몫 입니다.


30여 마리나 되는 소 밥 주러 처남마저 자리를 떠나고 나니

시끌벅적한 집안은 졸지에 절간처럼 적막강산이 되어 버렸습니다.      

혼자서 마당을 치우면서

20여 년 전부터 마당 앞에 쌓여있던 통나무들을 소각해 버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미 진작부터 폭싹 썩어버린 나무 둥치에는 

온갖 벌레들이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여 번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작은 물론, 목재로써의 가치를 오래전에 상실해버린지 오래 입니다.      

통나무들을 기대어 세우고

충분히 쏘시개를 넣어 불을 붙였습니다.

처음에는 쉽게 불이 붙지 않았으나

한 번 불이 붙기 시작하자

장대한 불꽃을 피워 올리면서 통나무가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속에서 안전무비(?)하게 동면하던 온갖 벌레들은

졸지에 난리를 맞은 듯 수백, 수천 마리가 황급하게 뛰쳐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눈치빠른 녀석들은 통나무를 들칠 때 미리 도망가 버렸으나

게으르거나 멍청한 놈들은 그날이 제삿날이 되었음은 당연한 사실 입니다. 

     

여자들은 일반적으로 목욕시간이 솔찮이 긴 편이라

연례행사와도 같은 김장 후 목욕시간은 거의 한나절에 가깝습니다.

시내로 오가는 시간,

때 빼고 광내는 시간, 

세 모녀가 수다 떨고 군것질하는 시간,

그리고 쇼핑하는 시간까지 따지면 어림잡아 5시간은 족히 걸리는 것이 일반적 입니다.


그 사이 나무와 잡동사니를 소각하고 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한 다음

돌멩이를 쌓아 마당과 수로를 분리하고 울퉁불퉁한 바닥을 평탄하게 골랐습니다.

그리고 고구마 30여 개를 재에 묻었습니다.

유난히 군고구마를 좋아하는 처남과 마누라를 위해서입니다.  

오후 3시에 떠난 세 모녀의 목욕 길은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습니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겨울밤에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 좋았는지 

마누라와 처제는 연신 환호와 감탄과 칭찬세례로 저를 황송하게? 만들더군요.

또한 옳은 일이건 그른 일이건 이유불문 옵션사항인

장모님의 잔소리를 당연히 감안하였지만 그날은 웬일인지 그냥 패쑤~였습니다.     

그렇게 모닥불 주위에 앉아 군고구마를 까먹고 커피를 마시고 나니

어느새 밤 12시가 훌쩍 넘어가 버렸습니다.

보통 9시를 전후하여 주무시는 장모님은 모처럼의 모닥불 잔치가 좋으셨는지

"그만 주무시라"는 자식들의 재촉에도 마지막 불이 사그라질 때까지 같이 계셨습니다.  

    

늦은 겨울밤인데도 철새들은 어디론가 떼 지어 날아가고

전봇대와 전선줄에는 수천, 수만 마리의 떼까마귀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하게 앉아있었습니다.

멋모르고 전봇대 밑에 차를 세워놓았다가는 그야말로 새똥 바가지를 뒤집어쓸 수 있기 때문에 

주차장소 선택은 그야말로 필수 중의 필수가 경험칙으로 쌓인 지 오래입니다. 

     

어느덧 모닥불도 사그라지고

마지막 잔불만 남았습니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하얀 재만 포~르~르 날아갑니다.

모닥불에 잔소리를 태워버린 장모님도

300여 포기에 달하는 김장 거사를 끝낸 마누라와 처제도

노곤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마당에 우두커니 홀로 남은 저는

딸내미 염려와 마누라 잔소리가 가득 배어있는

담배 한 가치를 빼어 물고 잔불 속의 숯불로 불을 붙였습니다.


어두운 사위와,

미약한 밝음이 남아있는 하늘과

수천, 수만 마리의 까마귀가 떼 지어 자고 있는 하늘에

푸~우 하고 연기를 뿜어 올렸습니다. 

입김에 섞인 희뿌옇고 푸르딩딩한 담배연기는 

너~훌 너~훌 허공으로 흩어져 가는데

어찌 보면 처녀귀신의 옷자락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내 영혼의 한줄기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대문 밖으로 나가 사방을 바라보니

그 시간에 깨어있는 사물은 오로지 나밖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까마귀도, 강아지도, 하늘의 별들도......!

그리고 사람만 보면 밥 달라고 오포(정오를 알리던 사이렌. 오정포(午正砲)의 준말)를 

불어대는 소들 역시 요동 없었습니다.

다만 가끔씩 멍멍이 짖는 소리만 허공에 울려 퍼져 나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얀일곱시간(6~7시간) 나무를 태웠던 고로

낸내(나무 태운 냄새)가 온몸과 옷에 짙게 배어졌을 것입니다.

겉옷을 벗어 탈탈 털고,

흰 재가 내려앉은 머리도 털고 방문을 열어보니

마누라와 처제는 세상모르고 단잠에 빠져 있고

장모님도 코를 다랑다랑 고시면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주무시고 계신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습니다.

30여 년 전에 뵈었던 모습은 당연히 아니었고

작년의 모습에 비해서도 눈에 띄게 쇠약해지셨습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고집과 성깔은 여전히 그대로 얼굴에 남아있었습니다.  

   

허긴......

8남매의 장녀로 태어나

보리쌀 두말도 없는 집으로 시집을 와서

대책 없는 낙천적 성격으로 무장한 신랑을 만났으니

어쩌면 자연스럽게 지금의 성깔과 고집과 소신?이

형성되지 않았을까? 살짝 짐작해보기도 합니다.      

현재 여든셋이신 장모님은 불과 5~6년 전까지는

비교적 건강하게 농사일과 집안 대소사를 주도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지악스럽게 일을 하셨던 후유증으로

허리, 어깨, 무릎 등이 연쇄적으로 어긋나고 고장이 나서

몇 차례 수술과 요양으로 병원 신세를 지셨습니다.     

30도가 넘는 폭염 속에서도,

온 들판을 두들겨 패듯 천둥번개가 작열해도,

장대 같은 빗줄기가 사정없이 쏟아져도,

낡은 밀짚모자 하나에 하늘을 받치고

누가 뭐라 하건 말건

자기 할 일을 끝까지 수행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장인어른 왈,

- 저 할망구 뒈질려고 환장혓네 환장혀.......쫏 쯧 쯧!

뭐 장인어른이야 충분히 그렇게 말씀하실 만했을 것입니다.

세상 걱정 없는 장인어른은

하루 소주 1~2병은 기본으로 드셔야 하고

오전 11시부터 2시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낮잠을 주무시는 한량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가 인생 모토였기 때문에

죽으나 사나 치열하게 일만 하시는 장모님이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웠을 법도 합니다.


그렇게 평생 일에 파묻혀 사시고

집안의 대소사를 거의 대부분 앞장서서 추진하고 해결하시던 장모님은 

여러 차례의 수술과 입원 끝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어쩔 수 없이 뒷방 노인네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시집을 와서

50년이 넘도록 鄭氏 집안의 사실상의 대표로 군림했었는데

어느 순간 고문? 격인 2선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게 되자

당최 다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못마땅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또한 보리쌀 두말도 없는 집에 시집을 와서

아들 딸 5남매를 낳고 기르면서도

무려 20,000여 평의 논과 밭을 장만할 정도로

치열하게 평생을 사셨으니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의 의지와 신념, 또는

가치관이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철곽처럼 형성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이렇게 치열한 성격을 소유하고 계신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할 정도로 선량하고 부지런하고 정직한 둘째 처남입니다.

비육우 30여 마리를 키우면서도 20,000여 평의 농사를 짓고

동네 주유소에서 12시간씩 일하기 때문에 매일 4~5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합니다.

소만 키워도 벅찰 일을 농사와 직장을 병행하기 때문에

하루 평균 20시간을 노동하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여기에 장모님의 사정권(시각권)에 들어가면

온갖 시시콜콜한 잔소리와 억지, 또는 강압에 가까운 명령이

폭포와 태풍처럼 쏟아지고 휘몰아쳐 투하됩니다. 

그러나 처남은 거의 귀머거리를 자처합니다.

어떤 잔소리를 퍼부어대도 꿈쩍도 않고 대꾸도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오랜 세월 동안 최선의 방어가 무엇인지

스스로 터득한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선량하고 착하기만 한 처남도 간혹 폭발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야말로 누구도 말릴 수 없는 大戰鬪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새 암묵적 휴전이 성사되고 또 다시 예전의 상태로 복귀됩니다.

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라고는 하지만,

점차 노쇠해지고 어린아이 같아지는 노모를 굳이 이기려고할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동안 쌓인 경험치로 분석해 보면 장모님과 처남이 상호 간의 

역지사지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다시 말해서 장모님의 잔소리 폭격량과 처남의 방어적 인내치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서로 진작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신기한 것은

그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우 평온하고 다정한 모자 사이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한 존중과 애정도 매우 깊습니다.

아마도 어머니가 살아왔던 삶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지독하고 가차 없는 잔소리의 배경과 원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이런저런 일로 장모님 댁을 자주 찾습니다.

한 달에 평균 2~3번꼴이니

어쩌면 너무 자주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처가 방문이 특별할 것도 없기 때문에

그냥 제 집같이 무시로 드나드는 편입니다.

어쩌다 근처 텃밭에 일하시는 장모님을 보면,

“옥희씨~이!”하고 장모님 이름을 부릅니다.     

장모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지는 5~6년 되었는데

처음에는 "옥희씨!"하고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아 

거의 망각 상태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노인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우리 장모님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수곽댁, 아주머니, 할머니, 어머니, 고모, 이모 등으로만 불리워졌기 때문에

자신이 ‘오옥희’라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은 ‘옥희씨~이~’하고 부르면

결코 싫은 내색은 아닌 듯싶습니다.

아마도 오랫동안 불러주지 않던 자신의 이름을

그 누구인가가 불러주는 것에 일순간이라도 옛날의 어떤 시공간으로

감정이 돌아간 것이 아닐까? 

또는 동심의 한 자락이라도 연결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솔직히 우리 장모님은 완강하고 억척스럽고 억지스럽습니다.

게다가 거의 대책 불가인 잔소리 폭탄으로 중무장하신 투사이기도 합니다.

동네의 일가친척은 물론,

자식들과 며느리 사위들도

장모님을 살갑게 따르거나 쉽게 접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장모님이 참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일면으로는 귀엽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실 저하고는 이심전심으로 잘 통하기도 하고

거의 잔소리를 듣지 않는 유일무이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점차 장모님을 닮아가고 있는 우리 마누라님도

- 참 불가사의한 일이야!!

하면서 연구대상이라고까지 하니까요.

심지어,

- 엄마 기가 엄청 센데 혹시 당신 기가 더 센 거 아니야?

라는 추측할 수 없는 영적 영역까지 확대하여 그 의문점을 추적하려 합니다. 

     

사실 지난 세월 동안 억지와 강압이 몸에 밴 장모님을 

겪고 관찰하면서 제 나름의 관점이 확립된 것은 있었습니다.

만사태평인 장인어른과 5남매를 낳아 기르면서

소작인으로 살아야 했던 지난한 삻의 환경으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게 형성되었을 삶의 관점에 대한 불가피성을 말입니다.

또한 "호랑이" 그리고 "찌락대기"로 알려진 장모님 부친의

유전적 요인도 적지않게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어쨌거나 장모님 삶의 과정을 고려하고

그 삶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형성되었을 가치관과 성격을

여러모로 이해하고 수용하며 대응하려고 했던 것이 

거의 유일무이한 우호관계(?) 로 인정받는 주요 원인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모님이 어떤 요구를 하거나 바라시는 게 있으면

이유 불문하고 즉시 대응하거나 처리해 드리는 것이 습관처럼 배어버렸습니다.

그 요구나 바라는 바가 크게 어렵거나 많은 비용이 필요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장난감이나 군것질을 위해 용돈을 달라고 어린아이가 보채는 것이나

소소한 문제를 충족하고자 하는 노인들의 요구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 소 밥 줘야 하는디.... 하시면

- 예 제가 주고 올께요(20~30분 소요)

- 아이고 허리도 아프고 다리도 아픈디....하시면

- 어머니 지금 병원 가요(왕복 1시간 소요)

- 쪽파를 심어야 하는디 언제 땅을 판댜....!

- 제가 파서 밭 골라놓을께요(요건 솔직히 힘들지만 2시간가량 소요)

- 몸이 찌뿌렁 해서 뜨겁게 지지고 싶네

- 목욕탕 모셔다 드리고 끝나면 모시고 올께요(1년에 1~2번)

- 오이를 심었는디 땅바닥에 줄기가 기어댕기니께 오이가 꼬부랑탱이가 되는 것 같네.

즉시 쇠말뚝을 박고 노끈으로 칸을 만들어 오이줄기가 올라갈 수 있게 조치함(1시간 남짓)

그리고 1년에 몇 차례 용돈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그외 등 등 등......!      

뭐 사실 무지하게 효도하는 것 같지만

절대 그건 아니고 그저 노인이 하고 싶은 바를 요구받거나 미리 캐치하면

선선하고 설렁설렁해드리면 그뿐입니다.

아이들도 그렇지만 노인들 역시 엄청나게 큰 무엇을 요구하거나 바라시 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요구를 귀찮아하거나 짜증을 내면 불만이 쌓이게 되고

사소한 일에도 잔소리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시로 “옥희씨~이~”하고 아양을 떨거나

반 농담, 반 진담으로 얼렁뚱땅 장모님을 어르고 달래서

예측 불가능한 심사가 폭발할 때까지 방치하지 않는 것을 

비교적 이른 시간에 터득한 것일 뿐입니다.  

    

김장을 끝내고 우리 것과 처제 김치통을 세어보니 무려 60개가 넘습니다.

RV 차량 뒷 칸에 가득 싣고 쌈 싸 먹을 배추와 무, 대파, 고구마를 실으니

뒤로 차가 넘어갈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모님은 햅쌀 80kg, 찹쌀, 들깨, 참깨, 검은콩, 흰콩, 토란, 늙은 호박은 물론, 

음료수에 초코파이 한 박스까지 꾸역꾸역 내어 주십니다. 

거기에다 기름 넣고 밥 먹으라고 거금 20만 원까지 기어코 손에 쥐어 주십니다.      

- 아이고 어머니 차 터져요~옷~!!!

- 자네 차 발통이 큰놈잉게 꺼떡 없어. 어여 잔말말고 실어

(차의 크기를 따지는 장모님의 기준은 타이어, 즉 발통 크기 임)


- 그리고 가다가 쏟아지니께 쩌그가서 끈태기좀 갖고와서 묶어!

언제나 빈틈없는 장모님 성격과 어길 시 즉시 발동되는 잔소리를 예방하고자

짤막한 노끈을 찾아 왔습니다. 뭐 대충 묶어도 별일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즉시 호통이 뒤따라 꽂힙니다.

- 아니 자네 끈태기를 가져오랬더니 꼭 난쟁이 콧지래기 같은 놈을 가져오는가!

- ??

- 난쟁이 콧지래기?

- 어머니 난쟁이 콧지래기가 뭐예요?

- 난쟁이 콧지래기가 난쟁이 콧지래기지 뭐여!!

솔직히 “짧다”는 뜻을 알고 있었지만 

그 표현이 너무 적나라하고 비유가 재미있어서 다시 한 번 물어봤습니다.

- 어머니 난쟁이 콧지래기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흐 흐

- 아이고~ 자네는 그 말이 뭔 말인지도 모르는가?

- 잘 모르것는디요?     

- 아이고~ 짧디 짧은 놈으로 묶으면 자루가 풀어지니께 긴 놈으로 가져오라고~오!

장모님은 내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짐작하고 

결국 짜증을 섞어 긴 끈이라고 얘기하셨습니다.

- 아항^^ 그럼 난쟁이 콧지래기가 짧다는 것을 말씀하신 거예요?

- 그려! 자네는 그런 말도 여태 못 알아듣는가?

- 근데 어머니 난쟁이 코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아셔요?

- 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 그럼 어디 난쟁이를 찾아서 코 길이를 재봐야 확실하게 알겠네요 잉?

- 아이고 폭폭혀! 자네 그렇게 한가하고 할 일이 없는가?

- 아니 그게 아니라 난쟁이 코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당최 짐작이 안 되어서요

옆에서 듣고 있던 마누라와 처제는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이 재미있는지

깔깔대며 웃고 있었습니다.

      

사실 자꾸만 사라져 가는 지방 방언이 아쉽기도 했지만 

장모님이 보유하고 계신 오리지널 사투리는 정말 진짜 정겹고 재미있습니다. 

그야말로 뻘건 황토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것 같은 구수한 사투리는 

어찌 보면 매우 귀중한 보물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토속적이며 순수한 지방 언어의 아이덴티티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비교적 넉넉한 길이의 끈을 가져와서 자루 모가지를 대충 묶었습니다. 

어차피 집에 가서 전부 풀어버릴 것이기도 하지만 차에 실려 있기 때문에 

굳이 단단하게 묶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바라보시던 장모님이 가차 없이 잔소리를 날리십니다.

- 아니 자네 시방 왜 그렇게 섯들붓들 일을 하는가?

- 네???

- 왜 그렇게 야물게 못허고 섯들붓들 하냐고!

- 근데 어머니 섯들붓들이 무슨 말씀이예요?

(섯들붓들은 대충대충, 대강 대강이라고 합니다)

- 아니, 그렇게 붙들어 매면 전부 쏟아지고 말잖여!

결국 장모님의 완벽하다 못해 철벽 같은 성격에 자루를 나누어 담기로 하였습니다.  

   

- 어이 이서방, 쩌그 광에 가서 희뜩한 푸대 두어 개 가져오소

- 희뜩한 거요?

- 그려 희뜩한 거 두어 개 가져오란 말여!

장모님이 말씀하신 “희뜩한 것”은 경험상 여러 가지 색깔을 의미한 것입니다.

즉, 은색을 포함한 흰색 계통은 옷이건, 포대 건, 연장이건 

공통적으로 모두 포함되는 포괄적 컬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장은 가을의 끝을 의미함과 동시에 사실상 본격적인 겨울의 시작과 같습니다.

김치통 60여 개에 쌀과 고구마 등등에 늙은 호박 몇 덩이를 추가로 실으니 

제법 넓은 RV 차량의 공간은 온통 겨울 식량으로 가득 차 버려서 

타이어가 납작해질 정도로 과적이 되어버렸습니다.

 늙은 호박 2개를 더 주시면서 장모님은 또다시 몇 마디를 거드십니다.     

- 호박씨만 살짝 긁어내고 꿀이랑 대추랑 넣고 잘박허게 끓여 한 대접씩 먹어

나는 “잘박”이라는 말이 재미있어서 다시 장모님께 물었습니다.

- 어머니 꼭 잘박하게 끓여야 하나요?

- 그려! 불을 싸게 놓으면 꿀이 있어서 금방 타버링게 살살 저으면서 끓이라고!

.....아이고~ 참말로...... 

- 알것시요. 어머니 ㅎ ㅎ ㅎ.......!!


차 뒤쪽이 바닥에 끌릴 정도로 과적한 차량을 끌고 서울로 출발하였습니다. 

장모님은 아픈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하고 대문 밖에까지 나와서  손을 흔드십니다.

- 조심허고 살살 찬찬히 가

- 네, 걱정 마세요. 글고 추우니까 얼릉 들어가세요

- 내 걱정 말고 쉬엄쉬엄 찬찬히 가 잉? 

서울로 올라오면서 퍼뜩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김장 때도 어김없고 틀림없이 장모님의 잔소리 폭격을 맞았지만

혹시 언젠가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아마도 그 잔소리가 무지하게 아쉽고 그리워질 것이라는......

왜냐하면 들을 땐 짜증 나기도 했었지만 돌이켜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경험에 기반되어 

틀림없고 확실한 바로미터라는 것을 수없이 실감했으니까요. 

    

그래서 마누라와 처제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 어머니 잔소리를 시리즈로 녹음해두면 어떨까? 

- 녹음? 뭐하게? 

- 혹시 어머니 돌아가시고 제사 때 그 잔소리를 틀어놓으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사실 ”재미“라는 표현이 어울리진 않지만 장모님의 잔소리는 

워낙 집요하고 강력했기 때문에 그 잔소리가 사라진다면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처갓집 식구들이 공허해질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 그럴까? 

하며 깔깔거리던 마누라와 처제는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습니다.

뒷좌석을 흘끔 바라보니 두 여자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낮게 훌쩍이고 있었습니다.  

    

이번 김장 때도 딸들은 예년과 다름없는 엄마 잔소리 때문에 지겨워하고

장모님의 틀에 박힌 고정관념은 그런 딸들의 항변과 주장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배추를 이틀간 절여야 한다는 장모님과 12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딸들의 주장은 20~30 년부터 

시작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인 사안으로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장모님을 살짝 속이는 방법으로 맹물로 배추를 하루 절이고 

다음날 소금으로 다시 절이는 우회 전략을 써서 넘어가려고 작당(?)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눈썰미가 9단쯤 되시는 장모님이 그 얕은 속임수에 절대 넘어갈 분이 아니십니다.

소금에 절였으면 배추가 푸~욱 가라앉아야 하는데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을 한눈에 파악한 장모님은, ”@#$%&*년! 무신년.......!” 등 등의 

온갖 푸념을 내뱉으면서 직접 소금 간국을 풀어 배추를 절이셨습니다. 

결국 앞집, 뒷집 등의 아줌마들의 합세와 딸들의 강압으로 15시간 동안 배추를 절이기로 합의하고 

어찌어찌 어르고 달래어서 겨우 김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무를 많이 갈아 넣어야 김치가 맛있다는 장모님과 조금만 넣어도 된다는 딸들의 의견 충돌이 있었고 

갓과 파와 젓국과 청각을 섞는 방법과 양에 대해서도 수없는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거기에다 음식에 유독 까탈스러운 처남의 주문에 결국 3가지 방법으로 김장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복잡한 양념 버무리기와 김치 분류가 또 하나의 큰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좌우지단간, 그래 저래 우여곡절을 겪고 넘어 올해의 김장 거사는 끝을 맺었습니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장모님의 잔소리와 자기 주관이 확고하게 고착되어버린 

50대의 딸들의 주장들이 수많은 양념과 함께 뒤범벅되어서 말입니다.


사실 김장김치를 담그려면 주재료인 무, 배추와 수많은 양념들이 뒤섞여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그 최종적인 맛은 그 조화의 비율이 얼마나 적절했느냐에 달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한 그 “맛”이라는 것이 각자의 취향과 성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는 

 매우 주관적인 요소로 작용되기 때문에 어떤 음식이건 100% 객관화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김치의 종류가 수천 개가 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300여 포기의 배추와 200여 개의 무김치, 그리고 파김치와 갓김치를 담궜고 

동치미와 백김치, 총각김치까지 풀코스로 김장거사를 마쳤습니다.

아마도 장모님이 건강하시다면 내년도 그 후년도 여전히 똑같은 잔소리는 거듭될 것이고 

똑같은 딸들의 항변으로 반복되는 김장 전투는 지속될 것입니다. 

     

하지만......

갈수록 쇠약해지는 장모님을 보면

그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지도 합니다.

그래서 장모님의 잔소리를 녹음하자는 말에

딸들은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도 찔끔거렸던 모양입니다.

   

지금도 손 편지를 쓰시는 우리 장모님.

그래도 그 옛날에 중학교까지 졸업하신 동네의 재원이었다고 합니다.

공부를 더하고 싶었지만 부친의 엄명으로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18살에 보리쌀 두말도 없는 집으로 시집을 왔다고 합니다. 

신혼 때 가끔 보내주시는 해서체의 한문과 한글을 섞어 쓰신 

손 편지를 읽어볼라치면 그 논리와 문장력에 깜짝 놀라기도 했었습니다. 

    

제 딸이 서울대학에 합격했을 때도

직접 축하편지를 써서 부쳐주셨는데 솔직히 제 마누라보다 훨씬 필적과 문장이 좋았습니다.

또한 장인어른을 재촉하여 마을 입구에 “*** 서울대학교 합격” 현수막을 걸게 하시고

거금 500만 원을 합격 축하금으로 보내시기도 했던 나름 멋쟁이기도 합니다.     

그 축하금 때문에 큰 처남 댁은 지금도 입을 삐죽이기도 하는데

제 딸과 동갑인 큰처남 아들은 2년제 전문대에 들어갔다고

합격 축하금을 50만 원밖에 안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ㅎㅎ ㅎ......! 

     

지난번에 장모님께 여쭸습니다.

- 어머니 올해 몇 되셨제?

- 응.... 여든 서이....!

- 아이고~ 아직 몇 살 안되셨구먼?

- 그런 소리 말어, 나도 인자 갈 때가 얼마 안 남았어

- 허~ 어머니 지금은 100세 시대라 앞으로 20년은 끄떡없어요

- 지랄.....! 100살이 시방 누구 이름이여? 우리 동네에 100살까지 산 사람 하나도 없어

- 그러니까 어머니가 20년을 더 사셔야지

- 아이고 흰소리 하덜 말고 가서 소밥이나 좀 줘, 

혼자 있는 놈은 한 바가지, 두 마리는 두 바가지, 작은 새끼는 반 바가지, 

큰 새끼 2마리 있는 곳은 많이 처먹응게 세바가지......  

   

누구나 말하듯이 세월은 참 빨리도 갑니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똑같은 속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나이가 먹어갈수록 느끼는 삻의 속도는 갈수록 더 빨라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 장모님은 아직은 팽팽한 50대였는데

지금은 당신이 가야 할 때가 머지않았다고 판단하시는 듯합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조만간에 유산정리를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 나는 말여! 아들, 딸 똑같이 나눠줄 것잉게 괜히 헛소리들 말고 싸우지도 말어

유독 욕심이 많은 큰처남 댁 말고는 모두가 “어머니 맘대로 하셔요”가 공통된 생각입니다. 

보리쌀 두말밖에 없던 집에 시집와서 20,000여 평의 전답을 마련하셨으면

그 얼마나 근검절약과 각고(刻苦)의 세월을 사셨는지 충분히 인정되기도 하고

고약하기 그지없는 성깔과 고집만큼 경우 역시 매우 명확하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끔 장난으로 불러드리는 장모님 이름.

- 옥희씨~이!

- 내년에도 밥 잘 잡숫고 건강하셔요 잉?

- 글고 내년 봄에 오이 울타리랑 토마토 지지대랑 멋지게 세워드릴께요 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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