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단 이제 열다섯 시간 후다. 오래전 궤도를 이탈한 나의 첫 번째 별과 재회하게 될 순간이. 아마 누나도 내일 일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루고 있겠지? 혹시 아무렇지 않게 단잠을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몇 시간째 이렇게 이불 속에서 끙끙 앓고 있는데. 당연히 누나도 나처럼 고달픈 밤을, 아니, 나보다 훨씬 더 지긋지긋한 밤을 보내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건 비단 오늘밤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마땅히 지난 수십, 수백 번의 밤 동안 그랬어야만 한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누나의 불행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맹세컨대 누나가 불행한 삶을 살고 있길 바란 적은 없다. 단지 죄책감 정도는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여태껏 살아오면서 타인에게 짜증을 내거나 화풀이를 해본 적이 없다. 누나가 날 떠난 후로는 하다못해 하찮은 투정 한 번 부릴 기회가 없었다. 투정은 고사하고 언제나 사람들의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내가 뭔가 잘못했을까 봐, 미움을 살까 봐, 괴롭힘을 당할까 봐, 버림받을까 봐. 그런데 내일 나는 그동안 켜켜이 축척된 나의 탄식과 비명을 한꺼번에 다 입 밖에 토해낼 계획이다. 누나에게 내 가슴속의 폐허를 샅샅이 구경시켜 줄 것이다. 내 나무들이 어떻게 말라죽고, 내 땅이 어떻게 갈라졌는지. 내 하늘이 어떻게 불에 타고, 내 바다가 어떻게 사막이 되었는지. 내게도 한 번쯤은 그럴 권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리허설이라도 하듯 누나에게 들려줄 잔인한 말들을 되뇌어 보았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TV를 켰다. 수십 개나 되는 채널 중에 관심을 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TV로 진정될 일이 아니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번엔 전화기를 들었다. 저녁 무렵에도 통화를 했으면서 나는 습관처럼 또 수호에게 의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꾹 참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현재 시간을 알리는 디지털시계의 숫자들이 시한폭탄의 타이머처럼 나를 윽박질렀다. 귀에 다시 심한 이명이 일었다. 우주 저편에서 날아오는 둔중한 별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문영 선진이는 쌔근쌔근 숨을 교체하면서 자장가의 주인공처럼 잠들어 있다. 그 모습은 그 자체로 나에게 평화와 안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 며칠은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그 위에 자꾸 덧씌워지는 동생의 얼굴이 나를 괴롭혔다. 요즘 나는 시도 때도 없이 과거를 회상하곤 했다. 그리고 일단 거기에 접속하면 함빡 정신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모든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의 일들처럼 되살아났다. 잊은 줄 알았는데, 나는 하나도 잊은 것이 없었다.
동생을 만날 생각을 하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그 투명했던 눈동자에 대체 얼마나 깊은 원망이 서려 있을까. 과연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나 있을까. 마치 굶주린 호랑이의 시선을 상대해야 하는 사람처럼 겁이 났다. 하지만 내겐 더 이상 그런 것을 회피할 자격이 없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 내 삶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 고통은 그 옛날 동생을 두고 홀로 도망친 것에 대한 벌인지도 모른다고. 그토록 내게 의지했던 동생을 모른 척 떠나온 것에 대한 벌.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아니, 자려는 시도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불현듯 오늘밤 동생도 이 도시의 어딘가에서 나처럼 뒤척이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가 어두운 방에 누워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동생의 몸은 훌쩍 키가 자란 성인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영혼은 또 얼마나 크게 자랐을까. 그것은 혹시 내가 떠난 그날 산산이 부서져서 지금까지도 전혀 자라지 못한 채 어린 아이의 몸집을 하고 있진 않을까. 아니다. 이것은 비약이다. 나는 동생을 과소평가하려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아마 아주 키가 큰 영혼이 되었을 것이다. 그 어떤 영혼들 이상으로 아름답고 강한 영혼이 되었을 거다.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믿었다.
두렵다. 그렇지만 빨리 동생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