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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줄 Mar 24. 2016

프롤로그

나단 디에고와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다. 이제 머지않아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는 삼촌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했다. 또 별자리 얘기도 했다.

 "이제 곧 켄타우루스자리를 보겠구나. 북반구의 별자리하곤 비교가 안 된다니까!"

 그는 애써 내 기분을 북돋으려고 했다. 나는 칠레 사람인 선원과 시노부라는 일본인의 뒤를 따라 배에 올랐다. 바람이 없는 고요한 밤이었다. 물결도 아주 잔잔해서 선체엔 거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래도 바다라는 걸 알리듯이 멀지 않은 곳에서 웅숭깊은 배의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30여 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내가 탄 배가 출발을 알렸다. 굉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 배는 먹물처럼 시커먼 바닷물 위를 천천히 미끄러졌다. 음험하게 내려앉은 밤의 어둠을 헤치며 나는 몇 시간 만에 다시 육지를 떠나고 있었다. 몇 시간 전엔 하늘, 지금은 바다가 내 발밑에 놓여 있었다. 선미에 서서 그동안 내가 지나온 것들을 망연자실 바라봤다.

 하늘엔 별이 아주 많았다. 별들은 아직 내게 익숙한 모양으로 떠 있었다. 하지만 디에고의 말마따나 이제 북반구의 별자리들과는 잠시 작별을 고해야만 했다. 불현듯 그들의 얼굴이 별자리처럼 하늘에 떠올랐다. 이 하늘을 지배하듯이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자 나와 그들 사이에 금을 긋듯, 유성 하나가 휙 하고 허공을 갈랐다. 유성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지만 내 눈엔 유성이 그리고 간 그 국경 같은 선의 잔영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들을 생각하니 뱃멀미가 시작된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건 별과 별이 만나는 거야."

 누나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귀속을 울렸다. 십수 년 전 누나에게서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나는 너무 어릴 때라 온전히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일찍이 이 문장은 문신처럼 내 운명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별과 별이 만난다는 건 빛과 어둠을 창조해 내는 일이고."

 누나가 내게 들려준 이야기들은 모두 사실이었다. 이젠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 확실히 알게 되었다.

 어느새 시노부가 옆에 다가와 있었다. 그 역시 사연이 많은 얼굴로 멀어지는 육지의 불빛들을 바라봤다. 내게 담배를 권했지만 피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더니 꼭 향수병에 걸린 뱃사람 같은 목소리로 낯선 일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엔 영어를 말하던 그의 입에서 불쑥 일본말을 들으니 마치 그의 내면을 엿본 듯한 기분이었다. 그 노래가 어쩐지 내 슬픔까지 부추기는 것 같았다. 곧 나는 최면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손을 내밀었다. 담배를 달라고 말했다. 그가 처음이냐고 묻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물고 최초로 그것을 흡입하자 부드러운 연기가 익숙한 고통처럼 가슴속을 찔러 왔다.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기대했는지, 시노부는 내게서 으레 일어나는 거부반응이 없자 "오"하며 신기해했다. 그는 한 수 가르쳐주려는 듯이 나른하게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뱉었다. 새카만 밤하늘을 향해 하얀 기체가 피어올랐다. 내 연기는 어쩐지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자꾸만 배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오랜 시간 '김나단'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한 남자가, 소리 없이 조금씩, 그렇게 검고 깊은 바다 속으로 침잠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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