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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미 Apr 13. 2023

미국 노숙인의 의식주 - 의

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22

스트레이는 나를 포함한 친구들에게 노숙하던 시절 찍은 사진 여러 장을 보여줬다. 처음에 나는 노숙을 하던 사람이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는 데에 놀랐다. 그러나 스트레이를 포함한 많은 젊은 떠돌이들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요금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서비스가 끊기도록 내버려 두고, 돈이 생기면 다시 새로 개통해서 새 번호를 썼다.


사진 중 상당수는 씻지도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전형적인 노숙인의 모습이다. 화물열차에서 먼지를 뒤집어썼을 때는 더 지저분했다. 다른 사람의 집에서 묵거나 하면서 빨래를 한 덕분에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사진들도 있다. 더럽든 깨끗하든, 대부분의 옷은 한눈에 보기에도 낡았거나 사이즈가 전혀 맞지 않는다. 만화에서 가난한 사람을 묘사할 때 흔히 그리는 모습처럼 천을 덧대서 기운 옷도 있다.


2010년쯤 위스콘신에서 찍은 사진. 바지의 무릎 부분에 천을 덧댔다.


2010년에서 2011년 사이의 사진이 특히 많다. 2010년 5월 콜로라도 주 오로라에 머물 때, 전자제품 매장인 베스트바이에서 누군가가 잃어버린 아이폰을 주웠던 덕분이다. 스트레이가 줍기 전부터 이미 원래 주인이 원격으로 통신 기능을 정지시킨 상태였다. 스트레이는 주인이 찾기를 포기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가지기로 했다. 그리고 충전기 하나를 훔쳐서 쇼핑몰에서 충전해 가며 사용했다.


아이폰은 스트레이가 원래 쓰던 구형 휴대전화보다 사진을 찍고 옮기기에 훨씬 좋았다. 스트레이는 무료 와이파이를 쓸 기회가 생기면 아이폰 속의 사진들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컴퓨터를 쓸 기회가 생기면 아이폰을 직접 연결해서 사진을 컴퓨터로 옮기고 인터넷에 올렸다. 그렇게 해서 떠돌이 생활 중에도 사진이 차곡차곡 쌓였다.


스트레이가 직접 찍은 사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숙하면서 만나 어울리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사진을 찍어서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리고 스트레이를 태그했다. 그 사람들은 노숙인인 경우도 있었고 아닌 경우도 있었다. 그 둘의 중간쯤인 경우도 있었다.


스트레이가 알고 지낸 노숙인들은 젊었고, 서로 연락하기 위해 공립도서관에서 페이스북을 했다. 스트레이는 노숙을 그만두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페이스북으로 다른 노숙인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미국에는 젊은 노숙인이 흔하고, 대도시의 공립도서관은 대부분 젊은 노숙인들을 환대한다고 한다. 눈에 띄게 취해 있거나 심한 악취가 나지만 않으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스트레이는 뉴욕 시, 샌프란시스코, 버클리, 포틀랜드, 보스턴, 뉴올리언스에서 도서관 회원증을 만들었다. 회원증에 사진을 붙일 필요는 없었다.


노숙을 하는데 어떻게 악취가 나지 않을 수 있는지 내가 묻자, 스트레이를 포함한 미국인 친구들은 미국의 대도시에서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용 샤워 시설이 있다는 것이다. 또 겨울에 노숙인들이 많이 모여드는 남쪽 지역의 경우는 바다나 강에서 씻을 수 있을 만큼 날씨가 따뜻하다. 구걸로 몇 달러만 벌면 그 돈으로 비누를 사서 몸을 씻고 코인세탁소에서 빨래를 할 수 있다. 젊은 노숙인들에게 무료로 샤워와 세탁을 제공하는 아웃리치 센터들도 있다. 다만 일주일에 몇 시간 정도밖에 문을 열지 않는 곳이 많기 때문에, 문을 여는 날을 알아두고 줄을 서서 오래 기다려야 한다.


세탁소나 아웃리치 센터가 있다고 해도 옷이 한 벌밖에 없으면 빨기 어렵다. 스트레이는 6개월 이상 옷을 갈아입지 못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사람의 후각은 금방 둔감해진다고도 덧붙였다. 스트레이와 많이 대화해 본 내가 추측하기에 스트레이의 ‘6개월’은 실제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상당히 긴 시간’이라는 뜻이다. 몇 달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주 동안 옷을 갈아입거나 빨지 못하고 그대로 입고 있는 일은 예사였던 듯하다.


옷보다 훨씬 큰 문제는 양말이었다. 스트레이는 노숙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양말을 여러 번 강조했다. 양말이 없는 경우, 또는 아주 낡은 양말을 신는 경우에는 발에 잘 맞지 않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보다도 더 빨리 발이 망가진다고 한다. 아마 당시의 스트레이처럼 장거리를 이동하는 노숙인들에게 주로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닐까? 어쨌든 스트레이에게 양말은 최우선순위였기 때문에 배낭 속에 항상 깨끗한 양말 여러 켤레를 가지고 다녔다. 돈이 있으면 샀고, 돈이 없으면 훔쳤다.


음식을 살 돈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구걸을 하다가, 상대방이 돈을 주는 대신 음식을 사주겠다고 제안하면 거절하고 그냥 가 버리는 노숙인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사실은 음식이 아닌 다른 곳에 돈을 쓰려던 것이다. 하지만 스트레이의 경험에 따르면, 그 돈을 꼭 마약 같은 떳떳하지 못한 곳에 쓰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음식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이 가장 쉽게 돈을 주기 때문이다. 버스 요금이 필요할 수도 있고, 치약을 살 돈이 필요할 수도 있고, 양말을 살 돈이 필요할 수도 있다. 여기서 스트레이는 양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정착한 후 회사에 다니는 동안 스트레이는 노숙인이 자신에게 돈을 구걸하면 항상 돈을 줬다. 그 노숙인이 약물중독이고, 자신이 준 돈을 분명 마약을 사는 데에 쓸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경우도 있었다. 스트레이가 노숙하던 시절 길에서 만난 중독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스트레이는 아무 말 없이 돈을 준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스트레이는 I don’t judge, 라고 덧붙였다. 이 영어 표현을 볼 때마다 한국어로 깔끔하게 옮기기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상대방의 잘잘못을 가리거나 비난하려 들지 않는다는 뜻을 짧게 함축한 문장이다.


물론 스트레이는 별로 가난하지도 않으면서 쉽게 돈을 벌기 위해 구걸하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주지 않는다. 스트레이 자신이 오랫동안 노숙을 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아주 잘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비싼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꼭 가짜 노숙인은 아니다. 스트레이도 노숙을 하던 시절 누군가가 칼하트Carhartt 옷을 사 줘서 오랫동안 입고 다녔다. 아마 ‘트러스티’ 여자친구가 사 준 것일지도 모른다.


스트레이는 옷은 깨끗하게 입지 못해도 면도는 노숙인 치고는 자주 했다. 수염이 굵고 빨리 자라서, 며칠만 내버려둬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또 동안이어서 면도를 하면 실제 나이보다 어려 보였고, 어려 보이면 남들이 시비를 덜 건다는 장점이 있었다고 한다. 스트레이는 일회용 면도기를 한 팩씩 사거나 훔쳐서 가지고 다니다가 공중화장실에서 사용했다. 노숙을 하면서 오랫동안 면도를 하지 않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도록 내버려둔 것은 단 한 번, 2011년에서 2012년쯤 캘리포니아에 있을 때였다. 그냥 면도가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흥미롭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우울증이 심한 지금은 노숙할 때보다도 수염을 훨씬 길게 길렀다.


머리는 노숙하기 전부터 항상 직접 잘랐다. 한 번은 어깨까지 자란 머리카락으로 드레드 스타일을 만들었다. 직접 하기 어렵지 않다고 한다. 어차피 시간도 아주 많았다. 대부분은 자신이 했고, 나머지는 여러 사람이 도와줬다. 머리가 조금 자라서 드레드가 느슨해지자 몇 가닥만 남기고 잘라내서 맥가이버 머리를 만들었다. 사진이 남아있지 않은 줄 알았다가 최근에 찾아냈는데, 다시 보니 드레드도 맥가이버 머리도 왜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한다.


2009년 가을, 시카고에 잠시 돌아왔을 때 직접 드레드를 하는 모습.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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