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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미 Apr 20. 2023

미국 노숙인의 의식주 – 식

스트레이, 익명의 미국인 이야기 - 23

아주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노숙하던 시절 스트레이가 농장에서 일하거나, 길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거나, 구걸을 해서 돈을 번 가장 큰 목적은 굶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스트레이가 노숙을 할 때 의식주 중에서 식은 가장 작은 문제였던 모양이다.


돈이 없어도 최소한 대도시에서는 음식을 아주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 식당 체인과 수퍼마켓에는 남은 음식을 직원들이 가져가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어서 멀쩡한 음식을 그냥 내다버린다. 매장마다 음식을 버리는 시간이 정해져 있고 그 시간이 되면 노숙인들이 몰려와서 기다린다. 노숙인들만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은 아니다. 집과 직업이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수퍼마켓 쓰레기통의 식료품을 가져가는 일이 드물지 않다.


피자 체인인 리틀 시저스Little Caesars가 음식을 많이 버리는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피자를 수백 판씩 버린다고 한다. 던킨 도넛도 열지도 않은 도넛 상자들을 버린다. 일리노이 주에는 쥬얼 오스코Jewel-Osco라는 수퍼마켓 체인이 있는데, 스트레이가 예전에 살던 집 옆의 매장에서는 점심시간마다 손도 대지 않은 따끈따끈한 음식들을 버렸다고 한다. 일시적으로 노숙을 그만두고 시카고에 셋집을 구해서 지내고 있던 2011년 초, 스트레이는 도미닉스Dominick’s라는 수퍼마켓 체인이 폐기한 음식으로 냉장고를 꽉꽉 채웠다. 쓰레기통 주위에 철조망을 둘러 놨지만 틈새가 헐거웠던 덕분에 스트레이를 포함한 동네 사람 여럿이 드나들며 음식을 주워 갔다.


쓰레기통에 있던 음식을 그렇게 많이 먹었어도 스트레이는 노숙을 하는 동안 식중독에 걸린 적이 한 번도 없다. 방임을 당해서 식사에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이 없었던 어린 시절에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도 강철 위장이라고 말할 정도다. 십대 시절부터 종종 특별한 이유 없이 속이 메슥거리는 경우는 있었지만, 자주 폭음을 한 것에 비해 그 정도면 아주 양호하다.


음식이 넉넉한 편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때그때 구할 수 있는 음식은 뭐든지 먹어야 했다. 그래도 스트레이는 채식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고, 선택의 여지가 있는 상황이라면 고기를 피했다.


구치소에 있을 때도 스트레이는 일부러 고기를 먹지 않았다. 고기 조각이 든 스튜 같은 것이 항상 나왔지만 질이 너무 나빠서 무슨 동물의 고기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구치소 식사는 전체적으로 형편없었기 때문에 스트레이는 구치소에서 음식 자체를 많이 먹지 않았다. 과일만이 예외였다. 미국에서는 과일이 저렴하고 품질도 좋기 때문에 구치소에서도 끼니마다 신선한 과일이 나온다고 한다. 스트레이는 자신의 고기를 항상 다른 사람의 과일과 바꿨다. 과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구치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트레이는 어릴 때부터 과일을 좋아했고, 과일을 먹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고기를 먹지 않는 노숙인이라도 단백질을 섭취할 통로는 다양했다. 달걀, 땅콩버터, 검은콩, 요거트가 값싸고 구하기 쉬웠다. 스트레이는 노숙을 벗어난 후로도 여러 해 동안 채식을 하다가 어느 시점에서 그만두었다.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기 위해서 시작했던 채식이었는데, 이제는 방목해서 유기농 방식으로 기른 고기가 예전보다 흔하고 스트레이도 그런 고기를 사먹을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양보다 아쉬웠던 것은 따뜻한 음식이었다. 노숙하는 동안 먹은 대부분의 음식은 차게 식어 있었다. 특히 이동할 때는 통조림, 생라면, 물을 섞어서 먹는 매시드 포테이토 가루가 주식이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회용 마요네즈를 여러 개 집어 와서 참치 캔에 섞어 먹은 적도 많다고 한다. 미국에도 참치마요가 있다니 재미있다.


그래도 노숙하던 중에 가끔은 뜨거운 수프를 먹을 수 있었는데, 맥주 캔 윗부분을 잘라내고 모닥불이나 여행용 버너에 끓인 것이었다. 스트레이는 내게 뉴올리언스 뒷골목에 둘러앉아서 맥주 캔 수프를 끓이는 친구들의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다. 


- 비참해 보이는걸.

- 비참하다니? 맥주 캔 수프는 별미였어. 평소에는 항상 차가운 음식만 먹으니까.


나중에 스트레이의 페이스북에서 그날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솔직히 이름만 수프이고 꿀꿀이죽 같은 무언가였을 줄 알았는데, 나름대로 스트레이의 채식주의에 맞춰서 만든 야채수프였다고 한다. 거기다 두부야채볶음까지 함께 만들었다. 친구들과 돈을 모아서 재료를 산 것인지, 수퍼마켓이 폐기한 재료를 주운 것인지, 재료를 훔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음식을 주울 수 있는 쓰레기통이 없고 돈도 떨어졌을 때는 굶주리기도 했다. 그럴 때는 먹을 것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 많은 뉴올리언스에서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식당들은 랍스터나 게를 요리해서 접시에 담고 랩을 씌운 후 가게 바깥에 견본으로 놓아뒀다. 그저 그 접시를 들고 도망치기만 하면 포식을 할 수 있었다. 견본을 도둑맞은 식당은 마치 별 일 아니라는 듯 요리를 새로 하고 다시 랩을 씌워서 똑같은 자리에 놓아뒀다. 다른 곳에서는 그만큼 쉽게 음식을 훔칠 수 없었다. 스트레이는 수퍼마켓에서 먹을 것을 훔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노숙을 하기 전과 노숙에서 벗어난 후 모두, 스트레이는 푸드 낫 밤즈Food Not Bombs라는 무료급식 봉사활동에 여러 번 참여했다. 전쟁과 빈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채식 요리를 모든 사람에게, 특히 빈곤층과 노숙인에게 무료로 제공하는 활동이다. 전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참여자 중 다수가 무정부주의자들이다. 느슨하게 조직된 비폭력 운동이다. 샌프란시스코 버클리의 큰 공원인 피플스 파크에서 자주 대규모로 열린다.


그저 음식을 나눠주기만 할 뿐인 활동이지만 주최자들이 체포되는 일이 적지 않다고 한다. 노숙인들에게 대규모로 음식을 나눠주는 행위를 규제하거나 금지하는 지역들이 있기 때문이다. 노숙인이 많은 플로리다와 캘리포니아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스트레이의 지인들은 플로리다 탬파에서 푸드 낫 밤즈를 주최하다가 경찰에게 계속 방해를 받아서 완전히 포기했다. 우습게도 똑같은 활동을 교회에서 주최할 때는 경찰이 그다지 문제를 삼지 않았다.


미국에서 노숙인에게 음식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규는 2006년에 처음 등장했고, 스트레이의 노숙 생활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2010년대 초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노숙인 쉼터에 음식을 기부하지 못하도록 하는 지역들도 있다. 2012년 뉴욕 시가 처음으로 금지했을 때에는 전국적으로 논란이 되었는데, 이후 오히려 다른 지역으로도 확대되었다.


심지어 지역에 따라서는 쓰레기통의 음식을 가져가는 행위가 불법이다. 시카고에서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데에 면허가 필요하고, 이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2년마다 250달러씩 내야 한다. 면허 없이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적발되면 그보다 훨씬 많은 벌금을 내야 한다. 사실상 가난한 사람들이 쓰레기통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스트레이가 노숙할 때의 경험으로는 쓰레기통에 자물쇠를 달아서 노숙인들이 음식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는 식당들도 많았다. 음식을 뒤섞고 압축해서 먹을 수 없는 상태로 만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표백제를 뿌리기도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공공위생이지만, 실제 의도는 노숙인을 도심과 관광지에서 몰아내려는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노숙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스트레이를 포함한 내 미국인 친구들은 확신한다. ‘게으르고 편하게 살고 싶어서 일부러 노숙을 하는 것이다. 노숙인들을 최대한 핍박해야 노숙을 그만둘 것이다.’ 라는 단순한 발상에서 나온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스트레이는 분노한다. 대학교와 직장 두 개를 한꺼번에 다니는 무리한 생활 끝에 무너진 자기 자신을 포함해, 열심히 살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유로 노숙을 하게 된 사람들을 너무나도 많이 알기 때문이다.


노숙을 겪어 보지 않은 내가 얼핏 생각해도 이미 굶주리고 있는 사람들을 더 굶기는 것이 어디에 도움이 될까 싶다. 노숙을 그만두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배가 고프면 일자리를 알아볼 힘도 나지 않을 것이다. 밥 먹었느냐는 질문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한국인이기 때문에 이런 생각부터 드는 것일까.


가끔은 식당에 앉아서 식사할 기회도 있었다. 2010년 LA에서 일행의 EBT(저소득층 식비 보조 카드)로 패스트푸드를 먹었던 날의 사진.


(*예전에 '스트레이, 미국의 빛과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수정 보완해서 다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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