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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첫 외국인 디디

한국에서 외국어 공부한 이야기 - 1

by 이정미

부모님과 나는 거의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지만, 아빠의 직장 때문에 온 가족이 서울을 떠나 생활한 시기가 한 번 있었다. 80년대 후반, 충청북도 청주, 서민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우리 가족은 방 두 개에 연탄을 때는 5층짜리 작은 아파트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고 이웃들의 형편도 비슷했다. 그런데 그 시절부터, 그런 동네에서도 이미 외국어 교육열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다니던 유치원의 등하원용 승합차에서는 외국어로 된 노래를 틀어주고 아이들에게 따라 부르게 했다. 영어도 있고 중국어도 있었다. 나 자신의 기억은 아니고 엄마가 이야기해 줘서 알고 있을 뿐이다. 내가 노래는 물론이고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린 것을 보면 성과가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나는 네 살밖에 되지 않았으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2월생인 덕분에 유치원의 다섯 살 반에 간신히 껴서 다녔다.


외국어 노래보다는 더 공들인 시도도 있었다. 나를 포함해서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 몇 명이 함께 영어회화 그룹과외를 받은 것이다. 심지어 선생님은 외국인이었다.


선생님의 이름은 디디. 여자였고, 짧은 곱슬머리에 은발이었다. 어린 나는 그 머리가 백발이라고 생각해서 디디를 할머니라고 불렀다. 엄마가 당황하면서 할머니 아니라고 말해 준 기억이 어렴풋하게 있는 것을 보면 실제로는 나이가 아주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디디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지만 상냥한 선생님이었던 것 같다. 겁이 많고 낯을 가리는 아이였던 나도 디디를 어려워하지 않았다. 엄마 말로는 그룹에서 나 외의 아이들이 모두 다섯 살이어서 내가 가장 어렸고, 몸집도 가장 작았고, 유일하게 여자아이였기 때문에 디디가 나를 귀여워했다고 한다. (이 글의 커버 사진에서 가장 작은 아이가 나다) 그리고 엄마의 말을 그대로 빌리면 내가 가장 똘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데, 진위를 증명할 수는 없어도 기꺼이 믿고 싶은 말이다. 디디가 항상 나만 무릎에 앉히고 수업을 하는 바람에 다른 아이의 엄마가 항의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디디가 영어권 나라가 아니라 아르헨티나에서 왔다는 사실은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영어를 잘 하는 남미 사람들을 많이 보긴 했지만, 그 당시 엄마들은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아마 영어권에서 온 선생님을 고르지 않았을까? 아니면 지금보다는 '외국인'과 '서양인', 그리고 '미국인'을 잘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이니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까?


어쨌든 80년대 후반 지방 도시의 연탄을 때는 아파트 단지에서 유치원 아이들에게 영어회화를 가르칠 외국인을 찾아냈다는 사실 자체가 용하다. 아르헨티나 사람이 청주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다.


설령 영어권에서 날고 기는 선생님을 데려왔어도 네 살, 다섯 살 아이들에게 뭘 얼마나 가르쳤을까 싶다. 가르쳤다고 해도 다 잊어버렸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도 어린 나이에 상냥한 외국인과 교류한 기억은 희미하게나마 좋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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