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살, 혼자 일본 여행

한국에서 외국어 공부한 이야기 - 12

by 이정미

‘빠른 생일’이어서 열아홉 살 때 대학교에 갔다. 원하던 대학교의 합격을 확인하고 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매진한 일은, 고3 때 좋아하기 시작한 어느 일본 가수의 덕질이었다. 그 가수의 동영상을 받기 위해 파일 공유 사이트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그 시절 동영상은 당연히 다운받아서 보는 것이었다), 그 가수가 나온 잡지가 들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매주 교보문고의 외국어 서적 코너에 갔다.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가수였기 때문에 잡지를 번역해서 올려 주거나 동영상에 자막을 달아 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내가 직접 동영상을 보고 잡지를 읽으면서 일본어를 배워 나가는 것도 재미고 보람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일본어를 조금씩 독학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쉬운 글을 읽을 수 있는 정도가 됐는데, 이 시기에 가속도가 붙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 처음으로 본 일본어능력시험 1급도 혼자서 문제집 딱 한 권만 풀고 무난하게 합격했다. 연예 프로그램이나 애니메이션을 보며 독학한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듣기는 전체의 90%를 맞춘 대신 한자는 반타작이었다.


덕질도 열심히 하고 일본어도 많이 배웠으니 이제 다음 단계는 덕질하러 일본에 가는 것이었다. 나는 겨울에 오사카에서 열리는 콘서트를 목표로 삼았다. 대학생이 혼자 또는 친구와 함께 해외여행을 하는 일이 딱 내 세대부터 흔해졌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던 가수의 국내 팬덤은 아주 작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같이 출발할 사람을 구하는 일은 진작 포기했다. 일본에 가서 합류할 수 있는 같은 팬덤의 일본인 지인 한 명, 일본에 사는 한국인 지인 한 명이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나는 출국, 숙소 찾아가기, 귀국을 혼자서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전까지 외국에 가 본 적이 없었고 혼자 여행해 본 적도 물론 없었지만 크게 겁이 나지는 않았다.


외동딸을 혼자 외국에 보낸다는 생각에 부모님이 나보다 훨씬 긴장했다. 심지어 아빠는 일본에 유학했던 후배에게 부탁해서, 나를 대상으로 일종의 말하기 시험까지 준비했다. ‘우리 애가 정말로 일본에 혼자 가도 될 정도로 일본어 회화를 할 줄 아는지 봐 달라’는 목적이었다. 이 ‘시험’도 평소에 일본어 동영상을 많이 본 덕분에 가볍게 통과.


공항에서 나를 배웅하는 동안에도 아빠는 안절부절 못 했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는 나도 조금 걱정이 됐다. 부모님한테는 호텔에 체크인한 후 방에만 얌전히 있겠다고 말했다. 요즘 같으면 내 쪽에서 잘 도착했다고 먼저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냈을 텐데 그때는 부모님이나 나나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발신 요금이 비싸기도 했고,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여서 아직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문화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외국에서 휴대전화를 쓰려면 미리 로밍을 신청한 후 공항에 있는 통신사 부스에서 로밍용 휴대전화를 따로 받고, 귀국했을 때 반납해야 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국제선을 타서 기내식을 먹고, 외국 땅에 내리고, 한국에서 인쇄한 지도를 보며(구글맵 같은 게 없었으니) 무사히 호텔을 찾아가고, 일본인 지인과 만나면서 걱정은 사라졌다. 문제는 부모님이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지인은 오사카 시내를 관광시켜 주겠다고 했고 나는 좋아라 따라 나섰다.


그동안 부모님이 전화를 걸었는데, 북적거리는 길을 걸어 다니느라 진동을 못 느껴서 받지 못했다. 부모님은 ‘잘 있겠지. 막상 도착하고 나니까 이것저것 구경 다니느라 정신이 팔렸겠지.’ 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녁식사가 얹힐 것 같은 기분으로 불안해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부모님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다. 가이드가 돼 준 지인에게도 미안한 일이 있다. 관광을 시켜준 보답으로 식사라도 대접했어야 할 것을, 같이 저녁을 먹고 나서 지인이 일본식으로 동전 하나까지 더치페이를 하기에 나도 무심코 내 몫만 낸 것이다. 아마 내가 내겠다고 해도 그쪽에서 사양했겠지만 말이라도 꺼냈어야 하는데. 열아홉 살의 나는 어리긴 어렸다.


실컷 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 승강장에서 비로소 부모님과 통화를 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부모님이 다시 전화를 걸었고, 이번에는 승강장이 조용해서 진동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부모님은 안도했고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러면서도 몇 분 동안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일본 지하철에서는 아무리 작은 목소리라도 통화를 하지 않는 것이 공공예절이라는 사실은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나중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속삭이고 곧바로 끊는 정도만 용인되는데, 그것마저도 주변의 눈치를 엄청나게 보면서 한다). 사람 자체가 별로 없었던 곳이라 그런지 나를 째려보는 시선은 없었지만 이것도 실수 중 하나다.


숙소로 돌아와서 TV를 켜니 당시 엄청나게 인기 있었던 밴드인 B’z가 생방송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지금도 그 곡을 휴대전화에 넣어놓고 가끔 들으면서 오사카 숙소의 그 TV 화면을 떠올린다. 다음날과 그 다음날에는 나머지 한 명의 지인과 합류해, 일본에 온 가장 중요한 목적인 내 가수의 공연을 보러 갔다. 화면에서만 보던 모습을 실제로 보고 있다는 게 잘 실감이 나지 않으면서도 어쨌든 마냥 신났다.


귀국일인 마지막 날에는 숙소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을 헷갈렸다. 다행히 지하철 역무원들이 친절하게 길을 알려줘서 제시간에 도착했고, 조금 조마조마하기는 했어도 좋은 경험으로 남았다. 일본어로 문제해결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뿌듯하기마저 했던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사카 여행 인증샷은 역시 구리코.


거의 정확히 1년 후, 똑같은 가수의 공연을 보러 이번에는 도쿄로 갔다. 난이도는 조금 높아졌다. 공연을 보는 날 외에는 혼자 관광하게 되었고, 공연 날에 만날 일본인 팬들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이가 아니라 인터넷으로만 조금 대화해 본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별로 긴장은 되지 않았다. 첫 여행을 무사히 다녀온 덕분에 이번에는 부모님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요약하면 이번에도 작은 실수는 몇 가지 있었지만 큰 실수는 없이 잘 마쳤다. 숙소에서 체크인을 해야 하는데 여권을 어디에 뒀는지 잊어버려서, 호텔 로비에서 짐까지 풀어헤치면서 한참 찾았다. 내가 여권을 찾을 때까지 마치 아무 일 없는 척 다른 업무를 보면서(보는 척 하면서?) 기다려 주던 직원의 일본식 배려가 기억에 남는다. 전철 승강장을 헷갈려서 엉뚱한 곳에 서 있다가, CCTV로 보고 있던 역무원이 그 승강장은 전철이 끊겼으니까 나오라고 방송을 해 줘서 얼른 나오기도 했다. 일본어를 몰랐다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서 계속 멍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인터넷 카페에서 부모님과 통화를 했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 보니 벽에 빼곡하게 쓰여 있는 주의사항 중에 ‘통화 금지’가 있었다. 통화하기 힘든 나라 일본. 이번에도 째려보는 시선이나 주의를 주는 사람은 없었고 혼자 민망할 뿐이었다.


공연을 같이 보러 간 일본인 팬들도 내게 아주 잘 해줬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정도의 언니들이었는데, 만으로는 아직 열아홉 살인 어린애가(대한민국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는 만 나이를 쓴다) 오로지 팬심으로 혈혈단신 일본에 왔다고 하니 더 챙겨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알아야 할 것도 많고 조심할 것도 많은 일본 문화 속에서 내가 뭔가 실수한 순간이 분명히 있을 것만 같다. 뭐가 되었든 큰 실수가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서, 서로 잘 모르는 사이에서 베푸는 친절이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P1010257.JPG 도쿄 시부야. 서울 사람인 내 기준으로도 사람이 엄청나게 많아서 놀랐다.


지금까지 살면서 혼자 여행을 해 본 것은 그 두 번뿐이다. 외국어를 독학해서 그 나라를 혼자 돌아다니는 일은 그 자체로 성취감 있고 귀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배운 언어가 마침 안전하고 여행하기 좋은 나라의 언어였던 것도 하나의 행운이다. 어리다면 어린 나이에 혼자 무사히 해외여행을 했다는 사실도 지금까지 자신감을 높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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