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 패스트패킹과 UTMJ
어릴 때 나는 또래 사이에서 꽤 잘 달렸다. 친구들끼리 뛰 노는 놀이에서 여간 술래가 되는 법이 없었다. 교내 체력검정에선 단거리와 장거리를 막론하고 1등을 다퉈 지자체에서 주최하는 대회까지 출전하곤 했다. 군대에서도 스프링처럼 튀어 다니는 체육학과 출신들과 경쟁해 오래 달리기만은 최고 기록이었다. 이후엔 마라톤 하프코스와 풀 코스를 차례로 완주했다. 그러나 달리기로 경쟁할 필요가 없는 지금 전력을 다해 뛰어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다. 최근 몇 년 동안은 러닝 머신 외에 5km 이상 달려본 적이 없었다.
8월호 취재를 위해 선자령으로 떠나기 며칠 전 함께하기로 한 알트라(ALTRA) 코리아의 고민철이 달리기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내 머릿속은 달려선 안 되는 이유를 찾느라 분주했다. 이제는 달릴 시간이 없고 무릎이 아프고 지루해요. 그 대신 서핑이나 낚시에 빠져 있어요. 궁색한 변명이었다. 달리기는 인류가 삶을 보전하기 위해 진화시킨 가장 기본적인 움직임이니까. 달리기 때문에 아프다는 것은 퇴화하는 인간의 감각이나 현대인의 나쁜 습관처럼 느껴졌다.
나는 선자령을 뛰어서 오르내리고 몇 명의 러너를 인터뷰하고 달리기와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그동안 기록과 경쟁을 위해서가 아닌 ‘나만의 달리기’를 해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기억을 쥐어짜도 찾을 수 없었다. 앞서 나가던 주자를 따돌리거나 가장 첫 번째로 결승선을 통과할 때 짜릿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달리기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진 못했던 것이다. ‘소설 쓰기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도서출판 문학사상)는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인생의 교훈을 얻을 새도 없었다. 어릴 때는 1등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체육 대회를 앞둔 전 날 밤에는 잠을 설칠 정도였다. 우리의 달리기에는 출발선과 결승선만이 존재했다. 달리기는 언제부터 기록과 경쟁의 상징이 된 걸까?
나는 이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악지대를 달리고 야영까지 하는 여행을 계획했다. 트랙이나 포장된 도로를 달리는 것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내가 만난 트레일 러너들은 기록보다 완주를 자랑스러워하고 경쟁보다 협동을 중요시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자령은 대관령보다 약 300m나 더 높은 산(해발 1157m)이지만 해발 900m 지점에 위치한 양 떼 목장에 주차하면 왕복 10km 안팎의 짧은 산행 코스도 계획할 수 있다.
우리는 이곳을 패스트 패킹(Fast Packing)으로 여행하기로 했다. 패스트 패킹은 트레일 러닝과 라이트 하이킹이 결합된 형태다. 라이트 하이킹이 야영 장비의 경량화를 통해 장거리 트레킹을 가능하게 했다면 패스트 패킹은 ‘속도와 달리기’의 개념이 추가된 것이다. 패스트 패킹은 능선을 따라서 달리다가도 해 가 지기 전에는 하산해야 했던 트레일 러닝을 하룻밤 이상 지속 가능하도록 했다. 이로써 일본 OMM(The Original Mountain Marathon) 레이스처럼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 나가면서 중간중간 야영을 하는 산악 스테이지 대회도 열리고 있다. 이 대회에 참가하는 주자들은 자연 속에서 육체와 정신을 고양하고 완주를 목표로 하며 걷거나 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국내에는 동두천, 선자령, 제주도, 거제도 등지에서 50~100km 국제대회 규모의 트레일 러닝 레이스가 열리고 있다.
우리는 강원도 평창군의 신재생에너지 전시관 인근에 주차를 하고 선자령을 오르기 시작했다. 선자령은 올해 미국 노스페이스에서 주최한 ‘TNF 100’ 대회가 열렸을 만큼 검증된 트레일 러닝 코스. 포토그래퍼까지 다섯 명은 쌀과 고기 대신 초콜릿, 비스킷, 누룽지, 통조림 참치, 에너지 바 등을 지참했다. 요리가 필요한 음식은 따뜻한 물을 부어서 조리하는 동결건조 즉석 비빔밥뿐이었다. 물을 끓이는 용도로 스토브는 단 하나만을 준비했고 불필요한 연료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LED 랜턴을 챙겼다. 햇볕과 비를 피할 타프도 하나뿐이었다. 장비를 공유하면서 그룹을 지어 달리는 방식에 대해 고민철은 ‘철새’ 같다고 했다. 주자들은 길을 찾고 서로의 상태를 파악하고 필요한 장비와 식량을 나누며 철새들과 같은 동반 상승효과를 경험한다.
우리는 캠프 사이트를 설치하자마자 요리를 하느라 분주하지 않아도 됐다. 주변을 가벼운 달리기로 산책한 뒤 챙겨 온 과자와 조금의 술을 마셨다. 당연히 쓰레기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마운틴 로버(MOUNTAIN ROVER)에서 제작한 4.5L 에코 색 하나로도 충분했다. 먹거리와 잠자리가 단순해졌다는 것은 자연 활동에서 많은 의미를 가진다. 다만 추운 겨울이면 침낭의 부피만으로도 팽팽하게 부풀어 오를 만큼 작은 배낭이기 때문에 패스트 패킹은 온화한 날씨에만 가능한 것이다. 선자령의 등산로는 크게 양 떼 목장, 풍해조림지, 샘터를 경유하는 서쪽 능선과 국사성황사를 지나는 동쪽 능선으로 나뉘는데 들머리부터 선자령 정상까지는 두 가지 길 모두 약 5km 길이로 같다. 우리는 숲과 계곡이 이어지는 서쪽으로 올라 비박을 한 뒤 동쪽에 펼쳐진 너른 초지를 따라 내려왔다. 가끔 숨이 차올랐지만 그럴 땐 잠시 계곡물을 마시며 쉬었다. 아침 안개로 피부가 기분 좋을 만큼 촉촉했고 흙과 풀이 가진 탄성이 무릎에 전해져 오는 듯했다.
나는 첫 패스트 패킹을 경험한 이후 달리기의 의미를 더 이해하기 위해 크리스토퍼 맥두걸의 <본투런>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두 권을 읽었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니 달리기에 대해 진지한 통찰을 기록한 책들이 꽤 많다는 것도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이집트 사하라 사막, 중국 고비 사막, 칠레 아타카마 사막, 남극, 북극점 마라톤 등 1만 km를 달려온 트레일 러너 안병식의 <나는 달린다>도 읽어보고 싶은 책 중 하나. 나 또한 달리기라는 단순한 동작들을 반복하며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자의식을 발견할 수 있을까? 당장 그렇지 않아도 좋다. 달리기의 진정한 즐거움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세계적인 아웃도어 회사인 노스페이스가 멕시코 치와와 주 코퍼 캐니언의 트레일 80km를 달리는 ‘울트라 마라톤 카바요 블랑코 대회’의 스폰서가 되겠다고 제안했을 때, 일생일대의 기회 앞에서 카바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우리는 함께 달리고 먹고 마시고 춤추고 어울릴 사람만 원해. 달리기는 물건을 파는 일이 아니야. 달리기는 자유로워야 해!”<본투런>
나는 이로부터 얼마 뒤 경남 하동에서 10월 2일에 열리는 UTMJ(Ultra-Trail Mt. JIRI) 트레일 러닝 대회 50K 코스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두 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이키 러닝 애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아 일주일에 세 번 정도 한강을 달렸다. 첫날은 5km를 달렸고 한 달쯤 지났을 땐 10km를 달릴 수 있었다. 독일 뉘른베르크와 미국 포틀랜드로 출장을 떠났을 때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서 아침 달리기를 하며 그곳의 공원, 건축물, 자동차들을 구경했다. 아무 생각이 없을 때도 있었고 미뤄둔 일이 나 인간관계에서 생긴 조그만 고민거리를 곱씹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자주 영어 회화 라디오를 들었다. 뜨거워진 몸으로 다시 집 앞에 돌아오면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다섯 살 조카가 반겨주었다.
아침 공기와 함께 땀을 흘리면 머릿속이 맑아져서 마치 물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지만 단 몇 주의 훈련만으로 눈에 띌 만큼 살이 빠지거나 명민해지진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 안의 무언가를 버리고 새로 얻으면서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침내 훈련 막바지에는 무려 26km를 달려 남산을 세 번이나 오르내릴 수 있었다.
UTMJ 대회는 클라이밍 의류 브랜드인 CAYL의 이의재와 동반 완주를 목표로 준비했다. 이의재는 강원도 대관령과 선자령을 잇는 TNF 100 코리아 대회에서 50K 코스를 완주한 경험이 있다. “먹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그의 조언대로 경기 중 바닥난 탄수화물과 아미노산을 보충해줄 수 있는 에너지 젤을 충분히 휴대했다. 이것이 무릎 부상으로 신음하던 내가 레이스 후반부에도 쉬지 않고 걸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이밖에 아디다스(ADIDAS)의 ‘Agravic GTX’ 트레일 러닝슈즈 외 쇼츠와 양말, 하이만(HEIMAN)의 러닝 싱글렛, 파고 웍스(PAAGOWORKS)의 ‘Rush 7’ 트레일 러닝 백팩, 블랙다이아몬드(BLACK DIAMOND)의 ‘Z’ 폴 등을 사용했다. 모든 장비와 의류가 만족스러웠다. 그중에서도 파고 웍스의 트레일 러닝 백팩은 조끼처럼 상체에 밀착되는 디자인으로 하중이 느껴지지 않았고 달리면서 물과 에너지 젤을 꺼내먹기도 편리했다.
경남 하동과 지리산 국립공원 일대에서 열린 UTMJ는 올해 첫선을 보이는 대회로 50K 코스의 실제 거리는 56km, 누적 고도는 자그마치 3570m나 된다고 공지했기에 대회 전부터 악명이 높았다. 더구나 대회 당일 우천으로 길이 미끄러워져 100K 코스는 취소되고 50K 코스에서 약 200명의 주자가 레이스를 펼쳤다.
50K 코스에는 총 5개의 CP(Check Point)가 준비돼 있는데 물과 식량을 보충하고 간단한 치료도 받을 수 있다. 나는 CP1을 지난 직후 왼쪽 무릎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해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악화됐다. 초반 1100m 고도의 급경사 지대를 급속 산행한 뒤 300m 다운힐 코스에서 기분이 좋아진 나머지 오버 페이스를 한 것이 원인이었다. 결국 압박 붕대를 무릎에 감고 약 45km 걸어야 했다. CP에 들릴 때마다 압박 붕대를 교체해 더 강하게 묶었다. 내리막에선 뒤로 걸어야 할 만큼 최악의 상황이었다. 트레킹 폴을 너무 세게 쥔 나머지 양손바닥에는 동전만 한 물집이 잡혔다. 다만 에너지 젤과 아미노산 가루를 풀어 넣은 물을 꾸준히 섭취했기에 체력적으로 지치지 않았고 정신 상태도 꺾이지 않았다. 물론, 파트너가 되어준 이의재의 희생이 없이는 걷기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마지막 CP를 통과할 때쯤 출발선을 지난 지 열두 시간이 지났고 헤드랜턴을 켠 채 레이스는 계속됐다. 우리는 내리막에서 지체되는 시간을 보완하기 위해 CP에서 쉬지도 않고 어둠 속을 걸었다.
Race Time 15:15:03, Rank Overall 102 /209
내가 첫 트레일 러닝 대회에 참가해 받아 든 성적표다. 7월에 만난 인터뷰이들이 나를 달리기의 세계로 이끌었다. 두 달의 훈련을 거쳐 이제 막 결승선을 통과한 내게 ‘달리기의 즐거움’을 알았느냐고 묻는다면, 천만에 달리기는 끔찍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릎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고 발톱이 두 개나 빠졌다. 더구나 면역력이 약해진 탓에 안 걸리던 감기까지 달고 말았다. 그러나 체력이 회복되면 다시 아침 달리기를 시작할 것이고 내년 봄에 열리는 트레일 러닝 대회에 참가할 계획이다. 그렇게 달리기를 하면서, 체크 포인트를 지나면서, 언젠가 내 인생의 레이스를 모두 마쳤을 때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비록 상처와 먼지투성이인 인생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것. 그 웃음이야말로 정직하게 레이스를 마친 자들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메달이라는 것을. 그 메달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지금 자신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남기고자 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한 마디를 적는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