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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위 Dec 28. 2016

한반도 최후의 심산

가리왕산

애팔래치아 트레일 3,360km를 종주한 빌 브라이슨은 그의 저서 <나를 부르는 숲(A Walk in theWoods)>에서 ‘숲은 거대하면서도 특징 없는, 게다가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 공간이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 있다’고 묘사했다. 그 생명의 힘이 짙어지는 여름, 나는 간혹 숲에서 공포를 느낀다. 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기계로 반듯하게 잘라낸 선과 바둑판처럼 나뉜 거리에 익숙해졌지만 산은 입체적이고 유연하며 쉴 틈 없이 변화한다. 수많은 감각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여름 숲에서 밤을 지새운 날엔 개미가 손등을 건드리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바느질한 살갗을 손가락으로 찌르는 기분이 그랬던가? 도시에 살면서 상실한 감각을 회복 중인 것이다. 그 환부는 아프게 치료되고 더디게 낫는다. 겨울 산은 다른 에너지의 세계다. 

감각은 얼어붙고 이곳에서 누대를 걸쳐 살아온 짐승들은 긴 잠에 들고 이방인과 산은 1대 1의 존재가 된다. 겨울산으로 가는 길은 미술관이나 독립영화관에 가는 마음인 것이다. 그곳에서는 생각을 곱씹듯 천천히 걷고 길게 호흡해야 한다. 나는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그 어떤 작가의 전시회보다 가리왕산에 가보고 싶어 졌다. 지난해 겨울, 청옥산 중턱에서 바라본 가리왕산은 평창 동계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힘을 얻은 개발논리가 본격화되고 있었다. 동계 올림픽 기간 중 단 며칠 동안 사용될 스키 활강 경기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제 가리왕산 중봉의 한쪽 사면은 현이 뜯어져 나간 악기처럼 수백 년을 살아가게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 아슬아슬한 줄을 타고 왕래하던 노루와 금강초롱꽃은 길이 끊길 것이다. 바다가 산이 된 이래 가리왕산은 가장 비극적인 운명을 앞두고 있었다. 마침 2014년부터 평창에 속한 산의 사계절, 밤과 낮, 물리적 변화를 프레임에 담아내고 있는 김영일 사진가를 알고 있었다. 다만, 가리왕산(해발 1560m)의 상봉, 중봉, 하봉을 잇는 대부분의 산자락은 산림 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개발과 임산물 채취는 물론 일반인의 입산 또한 엄격히 제한되어 왔다. 더구나 12월은 산불방지 통제 기간에 속해 있어 정선과 평창 국유림 관리소에 취재 공문과 입산허가 신청서를 보낸 며칠 뒤에야 출입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산의 한 면을 빽빽하게 채우고 있는 사스레나무 군락.
가리왕산의 북쪽인 진부에서 오대천으로 흐르는 장전계곡은 원시림의 습한 기후를 띠고 있어 초록의 이끼가 자라기에 알맞다.
사스레나무 군락한 가운데를 깎아내고 조성된 스키 활강 경기장. 수십 리 밖에서도 보일 만큼 약 6만 그루의 나무가 잘려나갔다.

"산을 알려면 북쪽을 보아야 합니다. 음지가 그 산의 성질을 결정하거든요" 식물이 자라기에 우수한 일조 환경이 아니라 혹한의 추위를 이겨 내야만 싹을 틔울 수 있는 곳. 오로지 산이 가진 흙과 공기가 생명을 키워내는 가리왕산의 북서면을 따르며 김영일 사진가가 말했다. 그는 2년째 평창 미탄면에 숙소를 두고 주말마다 가리왕산을 오가며 그 깊고 넓은 생명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가리왕산의 배꼽 부분에 해당하는 마항치 삼거리에서 가슴께인 장전리, 막동리를 지나 백석산으로 향하는 동안 사스레나무, 산벚나무, 주목, 함박꽃나무가 수피를 입고 벗었다. 그리고 가지를 떨어뜨리고 키워내며 질긴 생명을 이어갔다. 발끝인 평창 회동리부터 머리끝인 모릿재까지 임야 관리를 위해 7부 능선에 낸 구불구불한 임도를 따라가면 약 100km에 이른다고 한다. 산속에 새겨진 수직과 수평의 길을 따라가는 동안 그림자와 햇볕이, 눈길과 마른 길이 거듭 나타났다. 그리고 숲은 수십 번도 더 생명을 변주했다. 산고수장(山高水長). 무릇 산이 아니라 사람도 강하고 진실한 마음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인생의 차가운 겨울을 한 번은 지내보아야 하는 것이겠지.

가리왕산을 찾은 사흘 동안 이상 기후로 인해 따뜻한 겨울날이 계속됐다. 눈 덮인 가리왕산을 기대했는데 며칠 전 내린 눈마저 대부분 녹아버린 겨울 산을 오르며 그나마 쾌청한 하늘이어서 다행이라고 김영일 작가에게 말했더니 뜻밖의 대답이 돌아온다. “맑은 날씨는 산이 가장 안 보이는 날이에요. 외려 날씨가 흐리면 한곳에 집중할 수 있죠.” 그가 보여준 사진을 보니 안개와 눈발이 시야를 뒤덮은 날, 사진 찍은 이를 중심으로 가깝고 선명하게 다가오는 풍경이 새겨져 있다. 어둡고 추운 나날을 지날 때에야 또렷해지는 것들을 산에게서 배운다.

산림 유전자원 보호 구역으로 지정된 가리왕산은 다양한 식생과 많은 약초가 자라기에 오래전부터 국가적인 보호를 받았다. 예로 마항재 정상의 ‘정선 강릉부 산삼봉표(유형문화재 113호)’는 무분별한 입산을 금지했던 표시다. 그만큼 질 좋은 인삼과 산삼이 자생하는 주산지였기에 일반인에 의해 훼손되는 상황을 예방한 것이다. 삼뿐만 아니라 천마도를 그리는 데 지면으로 쓰였다고 전해지는 사스레나무와 내열성이 뛰어나 화폐를 주조하는 거푸집의 소재가 된 산벚나무가 집중적으로 군락을 이룬다. 특히 장구목이와 오장동을 지나 중봉으로 향하는 산의 한 면은 온통 사스레나무와 산벚나무로 빽빽하다. 무채색만으로 이렇게 멋진 무늬를 가질 수 있다니 놀랍다. 가리왕산은 다양한 수종의 유전자 보고로서 전국에 건강한 씨앗과 나무모를 보급 중이기도 하다.

보호수로 지정돼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왕사스레나무 앞에 서자 겸허한 마음이 든다. Photo by Lee Sung Hun

“겨울 산에서는 마른 가지 사이로 산의 바깥을 살필 수 있어요. 가리왕산은 중왕산, 남병산, 청옥산, 백석산 등이 겹겹이 에워싸고 멀리는 발왕산, 계방산, 오대산이 보이기에 그 매력을 실감할 수 있죠.” 김영일 사진가의 시선이 멈춘 지점에서 눈이 더 깊어졌다. 가리왕산의 북쪽인 백석산에 올라서자 옥에 티가 보인다. 원시림이었던 중봉의 정상부 단면이 이발이라도 한 듯 하얗게 드러난 것이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 사용될 스키 활강경기장의 공사 현장이다. 약 6만 그루의 수목이 잘려나간 자리에 들어서는 슬로프, 곤돌라, 편의 시설 등은 길어야 2주 동안만 사용된 뒤 상처만 남기고 철거될 예정이다. 오랜 풍화와 퇴적 작용으로 이루어진 생태계는 하루하루 시공간을 뛰어넘는 변화를 겪고 있다. 겨울도, 음지도 아닌 처음 겪어볼 고통이다. 고 김장호 선생은 <한국 백명산기>에서 가리왕산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정말로 한반도 최후의 심산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일까.

‘입산이라는 말을 가장 요긴하게 실감 나게 하는 산이 바로 가리왕산이다. 산많기로 으뜸인 강원도에서도 정선골, 그 정선골의 주산이 바로 가리왕산이기 때문이다. 전국의 산이란 산이 등산 붐을 타고 근년에 남김없이 까뒤집어지고 있는 마당에 가리왕산은 어쩌면 한반도 최후의 심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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