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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위 Feb 19. 2017

인생의 맛

입질네 어죽

입맛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만 1차적인 형성 배경이 고향과 어머니임은 부정할 수 없다.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어머니는 무슨 음식이든 손이 크고 맛깔스럽게 했다. 몇 해 전에는 <착한 식당>이라고 쓰인 간판을 내걸고 조그만 밥집을 차렸다. 어머니는 장사를 하던 분이 아니라서 음식으로 이윤을 남기는 데는 어수룩했지만 가족을 먹이기 위해 만든 밥과 반찬처럼 솔직했다.

미용실과 족발집 사이, 시장으로 이어지는 골목에 자리 잡은 우리 식당에는 인테리어 가게 사장님 내외, 네일숍 춘희 누나, 야채가게 광준이 형이 매일 백반을 먹으러 왔다. 새로 들어서는 복합 상가 인부들은 다달이 식권을 끊었고 세차장 김 아무개 아저씨는 결국 외상을 갚지 못한 채 동네를 떠났다. 넉넉한 양과 신선한 재료는 어머니의 자랑이었다. 어머니는 전날 야채 상태를 보고 다음 날 무엇을 만들지 결정했다. 시들고 힘이 없는 야채는 버리거나 마구 볶아서 덤으로 주었다.

가끔 네일숍 춘희 누나가 메뉴에도 없는 칼국수를 해달라고 조르면 금세 밀가루 반죽이 책장을 훑듯 국수로 잘려 나왔다. 춘희 누나가 시집의 첫장을 펴는 표정으로 호로록 칼국수를 빨아 먹을 때 모두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났다. 때로는 중국집 사장이 계주인 계모임과 시의원 선거 운동원의 휴식처가 된 식당에서 무성한 소문이 피어나고 사라졌다. 식당은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정리하고 해소하는 데 큰 역할도 했다. 사람들은 어머니가 끓인 국과 나물 반찬을 씹으며 싸우고 화해했다. 그리고 한나절 동안 생긴 일들과 남은 하루에 대해 생각했다. 저녁이 되면 삼삼오오 성에가 가득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소주를 마셨다.

나이를 가리지 않고 가장 인기 있는 안주는 단연 닭볶음탕이었다. 맛의 비결은 그저 건강한 닭과 감자, 양파, 마늘 따위를 넣고 오래 끓이는 것이다. 어머니는 조금 기다려야 해도 오래 끓이는 방법을 어떤 음식에나 고수했다. 그렇게 팔팔 끓여내야만 재료들의 맛이 서로 융화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음식에 꾀부리길 싫어했다. 비록 건강 때문에 식당을 내놓게 되었지만 지금도 시장에서는 어머니의 손맛이 회자된다.

어머니의 손맛은 곧 나의 입맛이었다. 스물세 살, 입대하기 전 혼자 목포까지 내려갔다가 서울로 되돌아오는 동안 어머니의 고향인 전라도를 보름 넘게 여행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찜질방과 피시방에서 잠을 잤고커다란 맘모스빵 하나로 이틀을 먹을 만큼 경비가 궁했다. 식당에 들어간 것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다만 어머니가 순천에 가면 아무 데고 백반 집에 들어가 꼭 한 끼를 먹어보라고 했기에 기차역 앞 식당에서 백반과 유자 동동주를 먹었을 뿐이다.

그리고 순천만과 낙안읍성을 여행하는 사이 같은 시티투어버스를 탄 할아버지에게 매운 코다리찜과 소주 서너 병도 얻어먹었다. 나로서는 이 여행 중 가장 많은 식당을 들른 곳이 바로 순천인 셈이다. 할아버지는 코다리찜이 나오길 기다리며 중국 지도를 식당 바닥에 펼쳐 보이고 자신이 지나온 곳들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티베트에서 샀다는 해골무늬 목걸이와 투박해 보이는 은반지도 자랑했다. 헤어질 때쯤에는 자신의 별명이 입질일 정도로 낚시를 잘해 충청도 어딘가에 어죽 집을 차렸다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와보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을지로 3가의 노가리 집들을 지나 좁디좁은 골목에 쪼그려 앉은 듯한 우화 식당에서 내 돈을 내고 매운 코다리찜을 먹었다. 미원 상표가 버젓이 붙은 젓가락 통. 서너 개의 테이블이 겨우 배치될 정도로 비좁은 식당. 그 순간 순천에서의 짧은 인연이 떠올랐다. 온갖 걱정으로 가득 차 있던 나의 모습과 만면에 홍조를 띤 입질 할아버지의 푸근한 웃음이 교차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충남 예산에 위치한 <입질네 어죽> 이란식당을 찾았고 마침 서산에 있던 볼 일을 앞당겨 그곳에 가보았다. 오래 근무했음직한 식당 아주머니께 할아버지의 인상착의와 오래전 내게 보여주었던 물건들을 말하니 전 주인이 맞지만 5년 전 돌아가셨다고 한다.



입대하기 전 여행에서 만난 입질 할아버지가 꼭 한번찾아오라고 했던 충남 예산의 어죽집. 할아버지는 수년 전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그 맛을 이어가고 계신다.


늦게나마 입질 할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들으니 그 여행에서 음식을 떠올리게 하는 이가 한 명 더 있다. 바로 전남 영광에서 홀로 지내던 둘째 외삼촌이다. 외할머니와 함께 살던 삼촌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자식들이 상경한 뒤 그 집을 지켰다. 방학이 되면 외할머니댁에 놀러 가길 좋아했던 나는 입대하기 전 인사를 드리려 영광 터미널에서 돼지고기 만 원어치와 소주를 사서 마을버스에 올랐다.

어디에 가느냐고 물어보는 어르신들에게 삼촌 이름을 대면 내려야 할 정류장을 알려줄 정도로 몇 가구 남지 않은 조그만 촌락이었다. 삼촌과 스쿠터를 타고 절 구경을 다녀온 뒤엔 집이 너무나 추워 점퍼를 벗지도 않은 채 밥상을 차렸다. 돼지고기의 반은 굽고 반은 김치찌개를 끓여 소주와 먹었다. 시골 정육점에서 큼직하게 썰어낸 고기는 껍데기가 야무지게 붙어있어 씹는 맛이 남달랐고 그저 굵은소금만 찍어 먹어도 육즙이 달게 느껴졌다.

다만 삼촌은 이가 아파서 찌개 국물을 더 좋아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낸 뒤 같은 버스를 타고 한산한 논밭과 어머니가 다니던 초등학교를 지나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날 밤 마을에는 유래 없는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하루라도 더 머물렀다면 며칠 동안 오도 가도 못했을 거라고 삼촌이 전화기 너머로 웃으며 말했다. 휴가를 나오면 다시 찾아가기로 약속을 하고 입대해 훈련을 받던 중, 삼촌은 그 해 겨울이 지나기도 전 지병이 악화되는 바람에 인천의 큰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가 돌아가셨다. 눈을 감기 전까지도 감나무와 우물과 외양간이 있던 시골집을 그리워하셨다고.

어쩌면 폭설 속에 고립돼 삼촌과 며칠을 더 보낼 수 있었다면 지금 느끼는 허전함은 덜했을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나는 삼촌 덕에 돼지고기를 소금에 찍어 먹는 맛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든 돼지고기의 맛 속에서 우리가 함께 나눴던 상쾌한 밤공기와 두터운 정도 느낄 수 있다. 생선살 한 조각도 보이지 않지만 진한 민물고기의 풍미를 전하는 어죽과 씹을수록 깊어지는 동물의 살처럼, 오랜 시간 속에서야 되살아나는 인생의 맛.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저녁을 대접하려면 요리를 잘하기 전에 진심을 담아야 하는 이유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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