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연.

-우리는 어떤 이유로 함께하게 되었을까?

by 얼간이

고민과 번민이 너무 버거워 지금은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20대, 특히 여행 중 만난 많은 사람들이 더 뚜렷한 추억으로 남곤 해요.

가끔씩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뭘 할까? 하는 생각을 하지요.

예전에는 사람을 부러 만나지 않지만 꺼리지도 않았는데 요즘은 사실 좀 버겁긴 해요.
아무래도 사회 물을 많이 먹은 탓이겠죠.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인터내셔널 백퍼커 호텔(이름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어요)"에 일본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전형적인 일본인 모습이었어요. 바가지 머리였죠. 이름이 무슨무슨 "꼬"였는데 대충 "하루"라고 불렀던 듯해요.


그 호텔은 말만 호텔이지 대부분 객실이 도미트리로 되어 있었고 6인 1실이 제일 싼 방이었어요.
저와 같은 도미트리 에서 머물던 여자아이 둘 중 하나였는데 다른 하나는 정말 자유로운 영혼이어서
별명이 '나룻배'였어요. 온 동네 남자들이 모두 거쳐간다고. 그런데 "하루"는 단아하며 고급스러운 어투에 꽤 인기를 끌만 했어요.

이 친구는 잘 웃지도, 말도 거의 없었는데 어느 날 제가 숟가락으로 "펑!" 하고 병을 따는 묘기를 보고
하도 밝게 웃어서 그 친구 앞에서는 열심히 "펑! 펑!" 하고 병을 따주곤 했죠.

하루는 제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쩌다 찾아낸 닭죽 집(거의 한국식 닭죽과 같아요)에 가는 길에
"같이 갈래요?" 하고 물으니 제가 병뚜껑을 열 번쯤 따준 것처럼 밝게 웃으며 "그래도 될까요?" 하더군요. 그리고는 가는 길을 정말 꼼꼼히 적기 시작했어요.

아랍에서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50인의 도둑 이야기가 괜히 나온 건 아니었어요.
아랍식 골목은 정말 찾기 어려울뿐더러 방향 감각을 잃기 십상이죠.
저도 몇 번이나 길을 잃어버리곤 했었죠. "그거 왜 적어요? 어디 쓰려고?", "그냥"

나중에 노트를 보니 일본 만화처럼 말끔한 그림과 각각 골목에 "꺾어지는 지점까지 거리"를 미터로 적었더군요. 신문배달 아르바이트 경험이 있던 저는 "좌1꺽 우3대" 뭐 이런 식, 즉 왼쪽으로 한번 돌고 오른쪽 세 번째 대문이라고 외운다고 했더니 또 병뚜껑을 뻥뻥, 스무 번쯤 따준 것처럼 밝게 웃었어요.

도미트리의 사람들은 매번 자주 바뀌었는데 주로 일본 친구들이 많이 왔고 저는 당시 원칙이 한 국가-한 도시 한 달 이상이어서 꽤 꾸준히 머물렀는데 그 친구와 나룻배도 그랬죠.


덕분에 무척 친해지게 되었는데 말수가 별로 없는 하루는 참 묘하지만 나룻배와는 많은 이야기를 하더군요. 나룻배는 외국 남자들을 '기념품'이라 생각한다고 했는데 다행히 한국 남자는 기념품에 들어가지
않아서 인지 같이 있는 것이 불편하진 않았어요. 어차피 머무는 동안 절반 정도는 다른 방에
가 있었으니까. 그런데 하루는 나룻배가 어디선가 보드카를 한병 구해왔어요.
(사실 거기서도 술 구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기쁜 마음에 셋이 모여 깠죠.

그리고는 술김에 그랬는지 몰라도 제 머리가 길어진 걸 보고 머리를 깎아주겠다고 했어요.
저는 제 대가리를 잘 모르는 여자, 특히 나룻배에게는 맡기고 싶지 않았지만 저도 술김에 맡겼죠.
쓱싹쓱싹. 가위소리가 날 때마다 대가리는 점점 불쌍해졌고 강적 나룻배도 좀 당황한 표정으로
이걸 어떻게 수습하나 하고 있는데 하루가 "대신해도 될까요?" 하고는 금세 제 가련한 대가리를
괜찮은 대가리로 바꾸어줬어요. 저는 기분이 몹시 좋아져서 또 맥주병을 열심히 깠죠. "뻥뻥!"

제가 며칠 "하마"라는 도시에 수차를 보러 갔다 온 틈에 일본 남자 둘이 며칠 머물렀는데 하루랑 나룻배에게 "어차피 둘둘이니 하룻밤 같이 할까?" 하다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귀때기를
맞은 적이 있다고 나룻배가 전해줬는데 정작 하루는 별로 내색을 안 하더군요.

그 사이에 나룻배와 저, 그리고 하루는 무척 친해졌어요.

그때는 한류가 시작되기 훨씬 전인데 병 따기가 심심하면 한국 군대 이야기를 많이 해줬더니 그게
나룻배의 육감을 자극했나 봐요. 어느 날 하룻밤 안 들어오더니 다음날 "한국 남자들. 박력 있다"더군요.
나룻배의 수집품 목록에 한국 남자도 들어갔나 봐요. 이게 걱정을 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담배를 나눠 피는 사이라서 방을 옮길 것 까지는 없었죠.

나룻배는 당시 케냐로 떠나기 위해 카이로로 갈 예정이었어요. 속으로 케냐 남자들 이제 다 죽었네
싶었지만 가방 안에 책이 정말 많았던 터라 지성하고 나룻배의 행동양식과는 별개로 분류했었죠.

당시 그 친구들은 필름을 종종 현지에서 현상하곤 했어요. 하루는 사진을 현상하러 간다길래
우리 기념사진 찍자 해서 제가 중간에 서고 둘이 양쪽에 선 후 프런트에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어요.

저도 당시 아프리카 가나로 갈 계획이어서 우선 카이로로 가는 비행기를 이곳저곳 알아보던 중이었는데, 가나에 다녀온 어느 양키가 카이로발 쌍발기 가격이 싸게 나온 걸 알려줘서 표를 겨우 구했어요.

그날 밤 11시에 출발하는 야간 비행기를 정가보다 훨씬 싸게 표를 구한 기념으로 급하게 저녁을 같이 했는데 그날은 나룻배가 기념품을 수집하러 떠났던 날이라 하는 수 없이 하루랑 둘이 밥을 먹게 되었죠.
하루가 시리아로 올 계획이 있는지 묻더군요. "글쎄. 너 여기 계속 머물면 올 수도 있어" 하고 미직지근한
농담을 했는데, 엄숙한 표정으로 "나 여기서 두 달 더 머물 거야" 했어요. 표정이 약간 침울해서 병뚜껑을 따줄까 싶더군요. 저도 아쉽긴 마찬가지였지만.


뒤늦게 호텔에 남긴 메모를 보고 나룻배가 동참을 했는데 하루가 잠시 밖에 나간 틈에
나룻배가 은근히 제게 그러더군요.
"하루한테 make love 하자고 해봐"

혈기 왕성한 청년이 그런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내긴 쉽겠지만 한 20분 후에 돌아온 하루의 손에 들린 걸 보고 그런 말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동물적이죠.

"사진"

하루와 나룻배가 제 옆에 서서 찍었던 사진을 현상해주더군요. 제가 포로처럼 양쪽으로 팔을 잡혀 있더군요.

"얼간이 님. 즐거운 날을 보내게 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이메일 주소"

한 달 후 가나에서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오자 웬일인지 하루와 나룻배 둘 다 없었고 그 둘을 아는 일본의 유명한 콘돔회사 비서실에 다녔다는 일본인 형이 제가 머물던 방에
머물렀는데 하루에게 "make love" 했다가 귀때기를 맞은 사람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어요. 둘이 요르단으로 갔다더군요.

제 다음 일정이 요르단이어서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물었더니 잘 모르겠다더군요. 그리고 요르단에 갔을 때는 그 둘이 터키로 간 걸 알았죠.
한 달 후 터키에서 그들을 만났어요. 보스포러스 대교 아래 '정말' 나룻배에서 고등어 케밥을 먹고 있는데 거기서 '인간' 나룻배를 만났어요. 72년생. 저와 동갑인 나룻배가 반갑게 "얼간이 옵하!" 하고 불러서 보니 하루가 맥주병을 일만 개쯤 딴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더군요.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기념품을 챙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룻배는 좀 피곤한 얼굴이었고 하루는 좀 야윈 듯했는데 그전보다 말이 훨씬 많아졌더군요. 아야소피아 앞까지 걸어가 그 앞에 불꽃 까페엘가서 이야기를 하는데 사과차를 몇 잔이나 마셨나 몰라요. 나룻배가 제가 가르쳐준 대로 코맹맹이
소리로 '오빠아아'만 안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우리는 이스탄불에서 카파도키아까지 동행을 했어요.

한번은 카파도키아 여인숙에서 현대 아반떼를 타고 온 동네 유지가 여자 친구를 데리고 와서 옆방에 잠시 머물렀는데 방음이 하나도 안되어 셋다 침을 골깍 꼴깍하며 아무 말 못 했던 기억이 있어요.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온 우리는 정말 헤어지게 되었죠. 나룻배는 원래 예정대로 케냐로 가고, 하루도 원래 예정대로 귀국을 하고 저는 불가리아로 출발했어요.

마지막 날 저는 가나에서 직접 만들어 가져온 유클립투스 나뭇잎과 커피를 선물로 주었고 직업이 미용사이자 클럽 댄서였다는 하루는 제 대가리를 다시 예쁘게 깎아주고 직접 짠 모사 장갑을 선물로 주었고 일본의 모 명문대에서 박사과정 중이던 나룻배는 제게 그동안 모은 엽서를 주었어요.

놀랍게도 나룻배는 저랑 똑같은 이유. 즉, 칼릴 지브란 때문에 레바논에 다녀왔는데 저와 동일한 시기에
한도시, 그것도 같은 호텔 다른 층에 머물렀었더군요. 다른 건 몰라도 엽서는 나룻배에게 무척
소중한 것이었을 거예요.

그리고 루마니아에서 잃어버린 가방 안에는 나룻배의 엽서와 하루가 짜준 장갑, 제가 포로로 잡힌 사진이 모두 들어가 있었는데, "돈은 상관없습니다. 추억만이라도 돌려주세요" 하는 분실물 호소 광고가 그때처럼 절실하게 다가온 적이 없었죠.

며칠 동안 몹시 아까워 밤잠을 못 이룰 정도였고 다행히 이메일은 기억하고 있어서 나룻배와는 근근이 연락을 하곤 했었죠. 그 친구 5년 전까지만 해도 미혼에 꽤 이름난 섬유회사에서 "팀장(임원)"을 했어요. 가끔씩 하루 소식은 없는지 물었는데
여행 직후 연락이 끊겼다더군요.

하루나 나룻배가 저를 어떻게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한국사람만큼 충분히 (행간의 의미를 스스로 파악할 정도로) 말이 통하지는 않아서 더 친해졌던 듯해요.

마치. '으리' 를 다양한 의미의 친밀감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말을 꼭 해야 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좋다는... 그런 것

가장 큰 추억중 하나예요.

하루와 나룻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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