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수행자에게 설법한 초전 법륜지
사르나트(Sarnath)는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약 8km 걸아가면 나오는 작은 마을로 녹야원(鹿野園)으로도 불린다. 부처님이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고 자신과 함께 고행했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땅으로 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다.
사르나트에 가는 날은 아침에 일어나 목욕재계하고 델리에서 세탁한 후 잘 보관했던 옷을 정갈하게 입었다. 부처님 발자취 따라 직접 걸어갈까 생각도 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다른 수행자들에게 들려주기 위하여 보드가야에서 300km 떨어진 사르나트로 걸어갔다. 수행하느라 야윈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먼 거리를 맨발로 열하루 동안 걸었다. 사르나트에 힘들게 당도하고서도 수행자들을 찾아 숲을 헤매어야 하셨다.
하지만, 오토릭샤를 타고 편안하게 앉아가도 50루피에 불과하여 2시간 정도 걸어가는 수고로움을 피했다.
순례자로서 무색한 순간이었다.
누가 묻지도 않건만 마음속으로 나는 여행자라고 둘러대고 있었다.
사르나트는 외곽 작은 시골 마을이다. 사람이 살고 있는 집보다 폐허로 무너진 유적지가 오히려 더 큰 건축물이었다. 지금은 황량해도 이곳은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기원전 3세기) 시대에 가장 번성했으며, 지금도 발굴하고 있는 곳곳마다 그 당시의 유적이 다수 출토되고 있다.
불교 유적지가 이렇게 파괴된 것은 이슬람교도들이 이곳을 침략하여 알라를 믿지 않는 이교도의 신전을 철저하게 짓밟았기 때문이다.
사르나트는 사슴의 왕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사란가나타(Sarangatha)'가 변형된 말로 이곳은 말 그대로 사슴이 많은 숲이었다. 옛날이야기에 따르면 사슴 무리의 한 우두머리가 사르나트를 다스리던 왕에게 다른 사슴을 사냥하지 말고 자신을 죽이라고 말해서 이에 감동한 왕이 이곳에 사는 사슴들은 사냥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했다고 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시기 전 다른 다섯 수행자와 함께 6년 동안 고행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부처님이 한 소녀가 바친 공양을 받는 것을 보고 그가 변절했다고 생각하여 그를 버리고 사르나트로 왔었다. 부처님이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수행자들을 찾아 사르나트까지 걸어오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시어 중도의 법을 말씀하셨다.
수행자들이여! 출가자들이 실천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하나는 여러 가지 욕망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탐욕과 즐거움에 빠지는 일이다. 이것은 천박하고 비속하며 어리석다.
다른 한 가지는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다. 이것은 괴로움이며 고상하지 않고 쓸모없다.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양극단에 다가가지 않고서 중도를 깨달아야 한다.
사르나트에 들어서자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승려들과 많은 불교신자가 보였다. 곳곳에는 불탑과 사찰, 사원, 불교 유적이 들어섰다. 경내에 들어가 탑을 향해 공손하게 삼배를 올리고 잔디밭에 무릎 꿇고 앉았다. 주변 잔디밭에서는 불교 법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예불이 끝나자 스님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티베트 스님들이 입고 있는 적색 법의 때문에 거리는 붉은 물결치듯 했다.
사르나트에서 단연 눈에 들어온 것은 다메크 탑이었다. 원래 맞은편에도 비슷한 크기의 다르마라지카 탑이 있었지만, 지금은 기단만 남았다. 다메크 탑은 부처님이 다섯 수행자에게 처음 설법하신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아소카 왕이 세웠다. 탑을 바라보니 구운 벽돌을 층층이 높이 쌓았으며, 우람한 탑 몸체에는 여러 아름다운 무늬와 부처님 일대기를 묘사한 그림이 장식되었다. 크기는 높이 약 42m, 직경은 약 28m 정도다.
다메크 탑으로 갔다. 둘러보니 탑 옆에는 미처 읽지 못했던 설명문이 있었다. 내용은 1835년 A. 커닝엄이 탑의 중심부를 파 내려가던 중 정상에서 91.4cm 지점에 브라흐미 문자로 새긴 둥근 석판을 발견했고, 석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하여 생겨난다.
인연이 다하면 사라진다.
나의 스승은 석가모니 부처님이시고,
이것이 그분의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