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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Sep 18. 2020

문묘와 성균관 文廟 成均館

옛 조선을 다스렸던 인간의 근본 원리 - 유교

공자의 신위를 모시던 사당 문묘


서울 문묘는 혜화역에서 내려 성균관대학교를 찾아가는 길에서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균관은 조선시대 인재양성을 위하여 세운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이었다. 그곳에 유교를 창시한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문묘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묘는 1397년(태조 6)에 착공하여 그 이듬해인 1398년에 준공되었다. 

서울 명륜동에 위치한 문묘. 지명 이름도 명륜당이 있다고 해서 명륜동이다.

문묘는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서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과 학생들을 가르치던 명륜당으로 제사와 교육의 공간이 각각 나뉘었다.  명륜당(明倫堂) 중심으로 좌 우측 동재와 서재가 있는데 이곳은 학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했다. 사적 143호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대성전과 명륜당을 비롯한 동무, 서무, 삼문 등 모두 5동이다. 

한복을 정갈하고 입고 문묘를 둘러보는 어르신들

유교가 우리나라에서 근 500년간 나라를 이끌었던 근본 이념이었건만, 이제는 한물간 학문으로 경시되고 사람들에게는 종교였나 싶을 정도로 잊혔다. 문묘를 찾는 사람도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호기심으로 찾을 뿐 다른 종교의 성지를 찾는 순례자의 감정을 갖고 찾는 이가 드물다. 그래도 문묘에서 매년 음력 2월과 8월에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들에게 제사의식을 엄숙하게 치르는데 이때 연주하는 음악을 문묘제례악이라고 한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문묘. 경치가 아름다워 학생들이 종종 들린다.

조선시대 공자(孔子)의 존칭은 문선왕(文宣王)이다. 그래서 공자의 묘당을 문묘라고 한다.

서울 문묘의 대성전에는  공자와 더불어 증자(曾子), 맹자(孟子), 안자(顔子), 자사(子思) 등 4성을 모신다. 


성균관의 교육기관 명륜당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가르치던 명륜당의 현판은 명나라 사신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쓴 것으로 명륜(明倫)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다. 명륜당 옆에는 학생들의 기숙사 격인 동재와 서재가 온돌방으로 20칸 길게 지어졌고 존경각이라는 도서관 건물도 있다.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 내부

명륜당에 있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이 나무는 1519년 선균관 대사성 윤탁이 심은 것이라 한다.  우리나라 정자나 사원 곳곳에는 은행나무를 심었는데, 할아버지가 심으면 손자재에서 그 열매를 맛볼 수 있다고 하여 공손수(公孫樹)라고 불리는 은행나무는 대대로 유학자들과 함께 한 나무였다. 연유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에게 경전을 가르쳤기 때문이란다.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고 하여 서원에는 은행나무가 많다.
명륜당 앞에 심긴 은행나무. 수령이 400년 넘은 천연기념물 제59호.


조선을 다스렸던 근본 원리 유교


흔히 조선이 패망한 이유로 당시 조선의 정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을 탓한다. 성리학을 추종한 조정과 양반들은 국제질서의 변화에 영민하게 대처하지 못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당시 조선의 권력층은 통치이념이었던 유교에 과도하게 경도되어 성리학 이외의 학문에 대하여 경직성을 갖고 폐쇄적으로 대했다. 

조선말 서구에서 산업혁명시대가 열렸고, 눈치 빠른 일본은 서구의 기술을 습득하여 정치제도와 문물을 일신하였다. 그에 반하여 유교의 나라 조선은 하늘의 이치를 동경하고 이를 인간의 심성 속에 구현한다는 명분 하에 탁상공론과 고담준론에 빠져 있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새로운 학문이 발달하는 가운데, 조상을 모시는 예법과 제사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유교 이외의 다른 학문은 그림자가 그림자를 밟는다는 해괴한 논조로 배척하였다. 사소한 예법의 차이로 능력 있는 인물을 탄핵하고 국가보다 가문의 명예를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 결과 조선이라는 나라는 무너져 내렸고, 유교라는 나라 이념도 자연스럽게 폐기되었다. 

천하유도 즉 서인불의 - 천하에 도가 있을 때 서민은 정치에 대해 왈가불가하지 않는다.


유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공자가 체계적으로 만든 이념으로 인간의 정식적이고 영적인 관계에 대하여 고찰하고 덕치주의와 민본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였다. 백성을 나라의 근본이라고 생각하여 백상들을 위한 정치와 그들의 고통과 시름을 달래주려는 인(仁)과 충(忠)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유교가 다른 종교와 달리 사후 내세의 삶이나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가타부타하지 않고, 단지 현실의 삶에서 실존적 깊이를 더하려 한다는 것에서 종교와 거리가 먼 것 같다. 하지만 유교는 다른 종교의식처럼 제례의식을 중요시하며 신적인 능력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려 했고(신이명지: 神而明之), 고무진신(鼓舞盡神)하며 인간의 초월성에 대하여 고민했다. 인간을 초월한 신을 섬기지 않았다지만, 유교의 중심에 있는 공자야말로 절대적인 존재로 숭배하며 제사 의식도 다른 종교의식 못지않게 엄숙하게 거행된다. 


하지만 유교는 왜 종교로 널리 퍼지지 못했을까? 세계에 널리 퍼진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통적인 특징은 사람을 인종간, 민족 간, 신분간 구분하지 않고 보았다. 그런 차별 없는 평등사상은 다른 민족이나 국가에서도 공감을 얻어 전파될 수 있었다. 기독교의 하나님도 사도바울 덕분에 이스라엘 민족의 수호신의 한계를 벗어나 세계로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만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유대교는 유태인만의 종교에 머물렀다.

같은 이치로 유교는 사회 신분질서를 인정하고 중화민족 중심으로 머물러 이민족을 오랑캐로, 신분이 낮은 사람은 천민으로 차별하였기에 다른 나라로 널리 전파되지 못했다. 단지 소중국에 머물고픈 나라만이 유교를 받아들일 만큼 유교는 철저하게 중국 중심의 민족 종교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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