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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Oct 06. 2020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로마인과 신들의 광장 포로 로마노

로마인과 신들의 광장 포로 로마노                                              


로마에 도착하고 제일 먼저 들른 곳은 콜로세움이다. 그리고 트레비 분수, 판테온, 바티칸을 하루씩 들르고 마지막 날 나들이하듯 간 곳이 포로 로마노였다. 

폐허가 되어 무너지고 볼 수 있는 것은 남은 대리석 기둥과 붉은 벽체의 담뿐이었지만, 이천 년 전 여기는 로마인들로 붐비고 그들이 모시는 신들의 정원이었다. 비록 유적지에는 훼손된 건물과 황량한 거리만 남아있지만, 당시 화려했던 삶을 들쳐볼 수 있다.


콜로세움에서 성스러운 길(Via Sacra)을 따라가면 포로 로마노에 도착한다.

 

당시 로마 최고의 번화가였던 포로 로마노는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광장에서는 로마 시민들이 철학과 신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다. 공개토론을 뜻하는 포럼(Forum)도 여기 포로 로마노에서 시작되었다. Forum이라는 단어는 '바깥에 있는 곳'이란 뜻으로 이곳은 로마가 건국되기 전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장사를 하거나 종교행사가 열리던 변두리 장소였다. 그리고 도시가 커질수록 여러 공공건물과 신전이 들어서고 로마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한때 로마 정치 경제의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


아이러니하게도 포로 로마노가 발달할수록 포로 로마노는 쇠락해졌다. 밀집된 공간에서 새로운 시설이 들어설 수 없었기에 새로운 시설들은 로마의 다른 중심지에 세워졌다. 로마가 대제국이 되어 세계 식민지에서 많은 물자와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자 협소했던 포로 로마노는 열악해지고 말았다. 결국 밀집되고 좁은 포로 로마노를 벗어나 새로운 로마 도시가 건설되게 되었고 이후 포로 로마노의 도시 기능은 점차 잃게 되었다. 그 후 5세기경 로마가 분열되면서 이곳의 건물들은 대부분 훼손되고 방치되고 만다. 


포로로마노에서 보이는 베네치아 대사관
포로 로마노에 남아있는 신전의 기둥


다양한 사람들이 머물었던 곳인 만큼 다양한 신들을 모신 사원이 있었다. 그중 지금까지 제법 번듯하게 남아있는 신전은 사투르누스 신전이다. 사투르누스는 농업의 신이다.  매년 12월 24일 전후로 사투르누스를 위한 축제를 열고 시민들끼리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다. 날짜나 축제를 즐기는 방법이 비슷해서 누구는 크리스마스 축제가 사투르누스의 축제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로마의 황제 안토니누스가 그의 아내 파투스티나가 죽자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신전도 잘 보존되어 남아있다. 현관의 콜로네이드 기둥들은 총 8개로 높이가 17m나 된다.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신전




유대인의 통곡의 벽과 티투스의 개선문


포로 로마노에서 가장 상태가 양호한 개선문은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이다. 동방원정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한 개선문으로 높이 23m, 폭 25m로 포로 로마노를 발굴할 당시 가장 먼저 발견되었다고 한다.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지나면 티투스의 개선문을 볼 수 있다. 티투스의 개선문은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개선문으로 81년도에 세워졌다. 

서기 66년 예루살렘의 선민사상을 가진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반란군은 마사다 요새를 지키던 로마 주둔군을 공격하고 예루살렘에 남아있던 로마인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들을 진압하기 위해 시리아에서 온 군대마저 물리쳤다. 하지만, 네로 황제의 명에 의하여 파병된 로마의 정예부대는 치열한 전투 끝에 반란군을 진압하고 지휘자 요셉 벤 마티아스를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함락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다시는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성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살육했다. 

그때 유대인 사망자는 110만 명으로 예루살렘 성안에 피가 무릎까지 찼다고 기록될 정도로 처참하였다. 그나마 남은 생존자들도 티투스에 의해 로마로 끌려가 노예로 팔려갔다. 그런 티투스의 개성 행렬이 티투스의 개선문에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티투스의 개선문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민족이 뿔뿔이 흩어져진 이후 유대인들은 파괴된 성벽 중 유일하게 남은 서쪽 벽에 모여서 통곡을 하였으며, 그 벽이 '통곡의 벽'으로 지금까지 불리게 되었다. 

한편, 예루살렘을 이끌다 로마에게 포로로 잡혔던 반란군 지휘자 요셉은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자신의 민족을 배신하고 티투스의 로마제국을 위해 헌신했다. 이름까지 요셉에서 요세푸스로 바꾼 그는 자신의 배신행위가 오로지 신의 뜻이었다고 변명하며 신께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고 한다.          

                               

신이여, 당신이 만약 몸소 세우신 나라 유데아를 멸망시키고
로마인들에게 모든 운명을 맡기기로 작정했다면,
또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알리기 위해 나를 선택했다면,
 나는 기꺼이 로마 편이 되어 살겠습니다.
하지만 변절자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일꾼으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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