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비길을 걷는다 - 검단산길
누비길 두 번째 구간 검단산길에서 검단산을 넘고 망덕산을 넘고 형제봉을 넘고 내려가는 길은 숲이 깊다. 그래서 한 여름 기분 좋게 나무의 잎사귀가 하늘을 가리고 있다. 가을로 넘어가면 볕을 가려주는 잎사귀들은 나무로부터 연신 쓸려 내려와 길을 푹신하게 덮기도 한다.
숲 속에 들어서면 사람은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굳이 예쁜 꽃이 피는 꽃나무를 볼 수 있다거나 낙엽 밟는 소리가 좋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호사스러움 말고도 듬직하게 하늘로 뻗은 나무와 바람에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를 포함하여 숲의 모든 풍경이 조화되어 기분을 편안하게 한다. 숲에는 하늘, 구름, 나무, 바람, 흙이라는 환경에서 나뭇잎 스치는 소리, 흙을 밟는 감촉, 지저귀는 새소리 여러 감각을 일깨운다.
낙엽을 밟아 내려가니 이배재고개가 나왔다. 누비길 2구간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이배재고개는 성남 상대원동과 광주 목현동을 연결하는 고개로 해발 삼백 미터 높이에 위치한다. 절을 두 번 하는 고개라는 뜻의 이배재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옛날 경상도와 충청도의 선비가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고개에 오르면 한양이 보여 임금이 있는 쪽을 향하여 한번 절을 하고, 부모가 계신 고향을 향하여 또 한 번 절을 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고개 넘어 성남에 들어섰으면 이 고장에다 절을 해야지 멀리 있는 도성에 왜 절을 한단 말인가 싶다. 모든 고을이 한양도성만 바라만 보던 옛 시절 일이라지만, 요즘도 강남땅만 바라보고 있으니 옛날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배재고개는 옛날부터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다. 왜냐하면, 이 고개의 능선 따라 올라가면 바로 남한산성에 닿기 때문이다. 이배재고개에 조선 말기까지 군사들이 배치되어 적이 남한산성을 침투하는 것을 사전에 방비했다.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 中]
길을 내려가 도로를 횡단하지 않고 등산육교를 통하여 편하게 길을 건넜다. 고개에 놓인 등산육교는 단절된 영장산과 망덕산을 연결하는 육교로 길이는 30m에 이른다.
이배재고개 등산육교를 건너 정상까지 올라가는 길은 매우 가파르다. 등산육교가 산 정상을 연결하기보다는 차도를 횡단하지 않게 배려하는 의미라서 산에서 내려와 육교를 건너고 다시 산 위로 올라가야 한다. 망덕산이나 그다음 봉오리에 있는 야외 탁자에서 식사를 하였다면, 먹은 것이 체할 수 도 있다. 대부분 이 구간에서 사람들은 헐떡거리며 올라간다.
이배재고개가 두 번 절하였던 고개가 아니라, 오르기 힘들어 두 번씩 절하듯이 허리를 굽히며 올라서 이배재고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에 다다르기 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면 산허리에 나무껍질이 하얀 나무들이 맞이하고 있다. 자작나무였다. 흔한 참나무는 정작 몰랐지만, 자작나무는 아파트 단지에 조경수로 많이 심겨 있다. 이배재고개 너머서는 자작나무가 무리 지어 산허리를 감싸고 있다. 나무껍질은 흰색의 종이처럼 얇게 덮여 있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게 아름답다.
자작나무는 한자로 ‘樺화’자다. 결혼식을 화촉을 밝힌다고 하는데 그 화촉의 ‘화’자가 자작나무 ‘화’자이다. 이는 옛날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붙여 촛불 대용으로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부지런히 올라가 정상부에 오르니 앉아 쉴 나무의자가 있었다. 두 다리 쭉 뻗고 잠시 앉았다.
정상 부근에서 북쪽 하늘을 바라보니 북한산의 세 봉우리가 보였다.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다. 이를 두고 북한산은 삼각산이라고 불렸다가 북한산성이 세워진 다음부터 한강 북쪽의 산이라 북한산이라 불렸다고 한다. 남한산도 주장산에서 고쳐 불러진 것이 그때 같다. 병자호란 패배 후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던 김상헌은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면서 삼각산과 한강수를 되돌아보며 시를 지었다.
가노라 三角山삼각산아 다시 보자 漢江水한강수야.
古國山川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時節시절이 하 殊常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