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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Oct 16. 2021

남한산성 세계문화유산

성남누비길 남한산성길과 남한산성 탐방로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남한산성은 조선 시대에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쪽의 방어 산성으로 성곽 전체 길이가 약 12.4㎞이다. 옛날부터 천혜의 요새로 여겨졌다. 성을 처음 쌓은 시기는 672년 신라 시대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산성을 쌓았다. 

그 후로 성곽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외적 방비를 위해 관리되어 오다가 인조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성을 고쳐 쌓게 되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곧 닥쳐올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신라 주장성의 옛터 위에 성을 증축하고 자신이 머물 행궁도 건립했다. 성 안에는 각종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중 가장 완비된 시설을 갖추었다. 인조는 남한산성뿐만 아니라 북쪽 국경 백마산성도 다시 축성했다. 그리고 명장 임경업 장군으로 하여금 백마산성을 지키게 했다. 청나라 군대라 하여도 감히 압록강을 건널 수 없게 함이었다. 인조 임금 나름대로 장차 닥쳐올 청나라와의 일전을 대비한 것이다. 


성남누비길 제1구간 종점 남한산성 남문. 성문 4개 성문 중 가장 웅장하다.

 

1636년 12월. 청나라 군사들은 기어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얼어붙은 강을 건넌 청나라 팔기군은 임경업 장군이 굳게 지키고 있는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곧바로 남쪽 평양까지 말을 몰았다. 선봉부대를 따라 많은 청나라 군사들이 강을 건너 백마산성을 피해 한양으로 진격했다. 임경업 장군이 이끄는 조선의 정예군은 계속 국경을 침범하는 적 때문에 함부로 성 밖을 나올 수 없었다. 조선군이 북쪽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청나라 군은 한양까지 속전속결 당도하였다. 압록강을 건넌 지 불과 10여 일 만이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크게 당황하여 우왕좌왕 남한산성으로 피난 갈 수밖에 없었다.


돌로 치밀하게 쌓아 올린 12.4km의 남한산성 성곽. 당시 탁월한 축성기술을 알 수 있다.


당시 인조는 1만 4천 명의 군사와 함께 사대문 중 가장 큰 남문을 통하여 남한산성에 들어왔다. 천혜의 요새답게 돌로 쌓은 성곽은 굳건하였다. 그러나 한겨울 성안은 매서운 찬바람과 눈보라만 날렸다. 다급하게 성안에 들어온 바람에 성안에 준비된 식량은 고작 50일분. 

조선군사는 수십만 명의 청나라 군사들에게 포위당한 채 굶주림과 추위를 무릅쓰고 힘겹게 싸웠다. 처절한 전투에서도 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혹한 속에서 식량마저 떨어지니 동사자와 기아자가 속출했다. 그리고 믿었던 팔도 구원병마저 패배하여 결국 임금은 성문을 열고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한 겨울 인조 임금과 1만여 군사들이 들어온 남한산성 지화문


항복할 때는 청나라 태종은 조선 임금에게 남문으로 나오지 말라고 하였다. 인조는 전쟁에서 진 죄인이기 때문에 뭐가 당당하여 남문으로 나오냐는 것이었다. 대신 작은 서문으로 나오라고 하였다. 한양에서 청나라 군사를 피해 도성에서 빠져나올 때도 너무 다급하여 남대문이 아닌 수구문으로 도망친 인조였다. 수구문은 궁궐 안 사람이 죽었을 때 시신을 조용하게 내볼 낼 때 쓴 문이었다. 굴욕감을 무릅쓰고 인조는 신하 몇 명과 함께 서문으로 나왔다. 청나라와 싸우기 위하여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는 해가 떠오르는 남문이었고, 항복하러 갈 때는 해가 지는 서문이었다. 마치 조선의 흥망이 해가 뜨고 지는 것과 같다. 

서문을 나온 인조에게는 죽음 보도 더한 치욕이 삼전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청나라 왕에게 삼배구고도의 항복 의식을 할 때는 인조는  머리를 차가운 바닥에 피가 날 정도로 찧어 망건에 피가 흥건했다고 했다. 그리고 한양 도성으로 돌아갈 때는 서로 도망치려는 신하들과 뒤엉켜 송파진으로 내달렸다. 그 뒤에는 청나라 군사들에게 포로로 잡힌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임금에게 외쳤다. 

“왕이여! 왕이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吾君 吾君 捨我以去乎!)

 

남한산성 서문. 병자호란 당시 인조는 서문을 나와 삼전도를 향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남한산성 행궁


인조가 항복할 때 빠져나온 서문은 우익문이라고도 부른다. 남한산성에는 4개의 방향에 따라 동서남북 4개의 문이 있는데, 동문, 서문은 각각 좌익문, 우익문이라고도 부른다. 임금은 남쪽을 바라보면서 나라를 다스린다 하여 남한산성 행궁을 중심으로 방향을 정했고, 서문은 임금이 보았을 때 오른쪽이 되므로 우익문이고 동문은 왼쪽이 되므로 좌익문이 된다.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남문을 따라 가면 남한산성 중심에는 행궁이 자리 잡고 있다. 행궁은 전란을 대비하여 북한산성 행궁, 강화도 행궁과 같이 건립한 것으로 병자호란 발발 시 인조가 47일간 머물며 항전했다. 전란 후 정조 때는 광주부와 수어청을 광주 유수부로 통합하여 서울 남쪽 방어기지로 삼기도 했다. 


남한산성 행궁 정문 한남루.


행궁으로 들어설 때 처음 맞이하는 정문이 한남루다. 한강의 남쪽에 있는 누문이라는 뜻으로 정조 때에 건립되었다. 기둥에는 시구가 연결되어 설치된 주련이 있었다. 내용 중 ‘비록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할지라도 항상 그 아픔을 참고 원통한 생각을 잊지 말지어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청의 사신이 수시로 오면서 이 문구를 보면 그냥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한남루 정문에 버젓이 설치했으니 대단한 강단이다. 

한남루 기둥을 받치는 화강암 기초 중 앞 세 개는 당시 실제 사용된 기초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돌 표면에 남아있다. 

남한산성 행궁 한남루 뒤로 외삼문 남행각이 보인다.


한남루를 지나면 외행전이 나오고 우측으로 들어가면 일장각이 나왔다. 일장각은 광주 유수가 사용한 관아 건물로 청량산의 옛 이름인 일장산에서 유래하였다. 왕이 머문 곳이 아니기에 각(閣) 자를 붙였다. 당시에는 신분이 사람뿐만 아니라 건물에도 있었다. 궁궐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 전(殿)이다. 왕실의 주요한 의전행사나 왕의 공식 업무를 수행하는 건물로 쓰였다. 지붕을 받치는 기둥 모양도 임금이 머무는 전의 기둥은 하늘을 뜻하는 원형이고, 관아로 쓰였던 일장각의 기둥은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이다. 


광주부 유수의 집무용 건물 좌승당. 뒤로 왕의 침소인 내행전이 보이다.


일장각의 서쪽 돌 벽에 숨겨진 계단이 있다. 그 위로 올라가니 임금이 머물렀던 내행전이 있었다. 행궁 내에서 가장 격식이 높아 지붕의 추녀마루에는 왕실건물에만 있다는 잡상들이 올려졌다. 내행전 담장 밖은 유수의 집무용 건물인 좌승당이 있다. 좌승(坐勝)은 말 그대로 ‘앉아서 이긴다.’라는 뜻이다. 관리들이 지략을 짜고 계책을 내놓는 건물이다. 


명녕전 앞 이위장 뒤뜰

좌승당을 나오면 소나무 우거진 산기슭으로 넓은 터가 보인다. 광주부 유수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 이위정이 보였다. 글씨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썼다고 한다. 문화재 안내판에서 "이위(以威)란 활로써 천하를 위압할 만하지만, 활과 화살이 아닌 인의와 충용으로써도 능히 천하를 위압할 수 있다"란 문구를 보며 그 뜻의 심오함에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남한산성 행궁 일장각과 좌승당 사이 소문 

이위정까지 보고서 다시 임금의 침소로 쓰였던 내행전과 집무실로 쓰였던 외행전을 차례로 보고 행궁을 나왔다. 옆 건물로 조선 왕조 임금의 신위를 모신 정전과 영녕전을 둘러보았다. 나라가 위급한 가운데 빠드릴 수 없는 것이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였다. 한양도성을 나와 행궁에 머무를 때도 종묘에 있는 선조의 신주를 옮겨 제례를 지냈다. 청나라 군사가 쏘아대는 포탄 속에서도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빼먹지 않았다. 조선이라는 유교국가에서 죽은 사람에게 지내는 제사는 살아있는 사람의 목숨보다 더 중요했다.


조선 임금의 신위를 모신 정전.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올린다.
행궁 밖 영녕전과 정전. 엄숙한 제례의식이 행해졌다.


행궁 밖 산림은 아름드리 소나무를 중심으로 키 높은 나무로 울창하다. 한낮에도 한 움큼 햇살도 보기 힘들 만큼 짙은 녹음으로 그늘이 드리운 곳이다. 솔잎으로 숲길도 걷기에 발이 편하다. 그런 한가로운 숲길을 조금 걸으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침괘정이 나온다. 침괘정은 화약과 창 등을 만드는 무기 제작소이며 이름은 창을 베개 삼는다는  ‘枕戈'(침과)에서 나온 말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호 침괘정. 무기 제작소로 쓰였다.


침괘정을 둘러보고 돌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동종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종 중에 가장 크고 아름다워 국보 제280호로 지정된 종이다.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복제품이 대신 종각에 걸려 있다. 조선 4대 명종으로 뽑혔던 천안 천흥사의 종은 절이 폐사한 후 남한산성으로 옮겨 한동안 산성 안에 울려 퍼졌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성을 지키는 군사와 백성들에게 시각을 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당신 남한산성과 행궁을 헐어버린 일제는 종을 경성의 총독부로 옮겨갔다. 다행히 전쟁 중 동종 공출을 피해 덕수궁으로 옮겨졌다가 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천흥사 동종은 이곳 남한산성 복제품 말고도 원래 종이 있었던 천안시에도 동종을 복원하여 천안시민의 종으로 매년 타종행사를 한다고 한다.

 

남한산성 종각 천흥사 동종. 국보로 지정된 동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남한산성 행궁을 한 바퀴 돌고 내려오려니 문화해설사 한 분이 무리의 사람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가만히 옆에 서서 듣고 있다 보니 병자호란 뒤 청나라로 끌려간 당시 백성의 고난에 대한 이야기였다. 비록 문화유산 해설을 신청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 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도강하듯 무리게 끼어들었다.


내용인즉슨 당시 패전 후 청나라로 끌려간 백성의 수는 육십만 명으로 한 겨울에 끌려가다가 많은 수가 굶주리고 얼어 죽었다. 그나마 청나라 수도인 심양으로 끌려간 조선 포로들은 노예시장으로 중국 각지로 팔렸다. 남자는 청나라 왕 무덤을 만드는데 대부분 동원되었고 여자는 관리들의 노예로 팔려나갔다. 특히 조선 포로 중 상당수는 여성들이었다. 끌려가는 중에서도 청나라 군사의 노리개로 능욕을 당했고, 종으로 팔리면서도 여러 관리에게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고통스러운 노예 신세를 벗어나기 위하여 목숨 건 탈출도 많았지만, 도주 중 압록강에 빠져 죽거나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경우가 많았다. 탈출하다 잡히면 발뒤꿈치가 잘려나가거나 이마에 문신이 새겨지는 형벌이 가해졌다. 

당시 열세 살 되는 조선 포로 이야기도 해설사가 들려주었다. 개성에서 상당히 부유한 가문의 자손이었지만, 강화도로 부모와 같이 피난 가다가 청나라 군에 붙들려 심양으로 끌려가 대장장이의 노예로 비참하게 살게 되었다. 그 후 고향을 못 잊어 탈출을 노리다가 드디어 서른아홉 살에 이르렀을 때 돼서야 야반도주했다. 하지만 압록강 변에 다다르지도 못하고 붙잡혔다. 몰매를 맞고 뒤꿈치를 잘리는 대신 이마에 문신이 새겨지는 형벌을 받고 다시 대장장이 노예로 지냈다. 그러다 주인이 전쟁에 참전하게 될 때 또다시 고향으로 간신히 도망을 쳤다. 이번에는 성공을 하여 고향인 개성까지 도착하였다. 하지만 막상 고향에 가니 부모님은 생사를 알 수 없었고 일가친척은 환대해주지 않고 나 몰라라 했다. 

당시 청나라에서 도망치는 조선 노예가 있으면 잡아서 되돌려 보내거나 그렇지 못하면 그 수에 해당하는 다른 조선 백성을 노예로 바쳐야 하는 조약이 있었다. 도망친 친척을 보고 행여나 자신이 노예로 바쳐질까 봐 두려워했다. 그런 냉대 속에 숨어 지내다 다시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갔다. 그 뒤의 기록은 없지만 아마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고 말했다. 특히 납치되어 끌려간 여자들이 많은 고통을 당했다고 말했다. 목숨을 걸고 도망치거나 돈을 주고 다시 찾아온 조선 땅에서 정조를 잃어버렸다는 비난과 차별과 함께 자결을 강요당하여 한 많은 생을 마감한 여자들이 많았다고 했다. 

해설사는 오십 대 초 갓 넘을 나이의 여성 분이었다. 두툼한 안경을 끼고 마이크를 손에 쥐며 사람들 하나하나 눈을 마주치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당시 여성들은 무능한 조선의 남자들 때문에 노예로 끌려간 수모를 겪었다. 그것도 모자라 간신히 살아 돌아왔어도 비난을 받았으니 그것을 원통해했다. 그리고는「박 씨 부인전」을 소개하며 청나라를 여성이 직접 무찌르는 이야기가 유행한 배경을 설명했다. 해설사는 박씨 부인이 오랑캐를 무찌르는 이야기에서는 주먹 쥐고 하늘로 올리기도 하였다. 그때의 분함과 통쾌함을 상기하는 것 같았다. 


하기야 조선 시대 무능한 남자들 속에서 일개 부인이 청나라 군대를 무찔렀으니 당시 여성들에게는 얼마나 속 시원한 이야기였을까 싶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혼신의 힘으로 청나라와 싸웠던 조선의 군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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