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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Jul 24. 2018

임금이 남한산성에 계신다

그 해 겨울 인조가 들어선 지화문 - 남한산성길

인조가 들어선 남한산성 지화문


누비길의 첫 구간 남한산성길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남한산성 지화문(남문)이다. 1구간 말미에서 산을 올라온 수고스러움을 단박에 날릴 수 있을 만큼 성문은 웅장하다.

지화문은 남한산성의 사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걸려있는 가장 큰 문이다. 정조 3년 산성을 보수하면서 지화문이라고 썼다. 산성 사대문 중 남문이 가장 큰 이유는 임금은 남쪽을 바라보면서 나라를 다스린다 생각했기 때문에 임금이 바라보기 좋게 장엄하게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임금이 계시는 남한산성 행궁을 중심으로 서문은 오른쪽이 되므로 우익문이고 동문은 왼쪽이 되므로 좌익문이라 한다. 


성곽에 다가가 지화문 앞에서 이를 찬찬히 살펴보면 성문 안쪽 천장은 회반죽으로 마감된 것을 볼 수 있다. 일부가 박락되고 전돌이 노출되어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하단의 거대한 화강석 초석으로 서 있는 남문의 문루는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팔작지붕 형태다. 초석 위의 돌들은 아치형으로 촘촘하고 치밀하게 쌓여 수백 년의 세월을 더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굳건해 보이는 지화문을 중심으로 남한산성의 동쪽과 남쪽 성곽은 조선 중엽 이회 장군이 축성했었다. 

초여름 남한산성 지화문. 느티나무 노거수가 힘겹게 성문을 지키고 있다.


1636년 12월 9일 추운 겨울, 청나라 12만 군사가 압록강을 건너왔다. 그리고 불과 5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인조와 조정은 급히 한양 도성 중 시신들이나 나가는 광희문으로 빠져서 몽진을 떠나 남한산성으로 떠나게 되었다. 인조가 삭풍의 매서운 바람을 맞아가며 청나라의 사나운 군사들을 피하여 몽진하였을 때, 임금을 따라나선 군사의 수는 고작 일만 사천이었다. 날쌘 말을 타고 달려오는 청군이기에 당시 사정은 급박하여 사전에 준비된 군마나 병기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산성에 입성할 때는 임금 체면에 도성의 큰 문도 아닌 사소문 중 하나인 광희문을 통해 도망쳤다는 자괴감인지 인조는 조선 군사와 함께 사대문 중 가장 큰 남문을 통하여 남한산성에 들어왔다. 그때가 12월 15일이다. 

그나마 남한산성은 평소 전란을 대비하여 병기와 식량이 갖추어져 있었지만, 추위를 막는 옷이나 많은 군사들이 머물 가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식량은 고작 40일분이 있었을 뿐이었다. 더구나 병자년 추위는 혹독하여 노숙하는 군졸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많이 죽었다. 이에 반해 청나라 군대는 남한산성 아래 평탄한 탄천에 수십만이 집결하면서 민가를 노략질하고 조선 조정이 남겨놓은 많은 물자를 획득하여 여유 있게 진을 치고 있었다.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저물 무렵에 대가(大駕)가 출발하려 할 때 태복인(太僕人)이 다 흩어졌는데, 내승(內乘) 이성남(李星男)이 어마(御馬)를 끌고 왔다. 대가가 숭례문(崇禮門)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良鐵坪)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 상이 남대문 루(樓)에 올라가 신경진(申景禛)에게 문 밖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다. 최명길(崔鳴吉)이 노진(虜陣)으로 가서 변동하는 사태를 살피겠다고 청하니, 드디어 명길을 보내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게 하도록 하였다.
상이 돌아와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향했다. 이때 변란이 창졸 간에 일어났으므로 시신(侍臣) 중에는 간혹 도보로 따르는 자도 있었으며, 성 안 백성은 부자·형제·부부가 서로 흩어져 그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초경이 지나서 대가가 남한 산성에 도착하였다.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4일 1636년 명 숭정(崇禎) 9년 中]
구한말 남한산성 남문 전경 사진

패전보다 못한 항복, 그 치욕을 감내한 남한산성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떨쳐내려야 떨쳐낼 수 없는 운명이다. 그만큼 당시 청나라의 침입과 삼전도 굴욕에 대한 충격은 매우 컸으며 남한산성은 오랫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다. 역사에서 패전과 항복의 쓰라림을 사람들은 다시는 상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작금에서야 영화나 뮤지컬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이 조망받기도 했지만, 이는 한낱 역사에서 비극의 서사적 구조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을 뿐이다.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은 민관이 협력하여 고난을 극복했거나, 아니면 무능한 관에 버려진 민초들이 적과 맞서서 승리를 획득한 자랑스러운 유적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차라리 로마군의 포위 공격으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 전원 자살한 이스라엘의 마사다 같은 비극의 역사를 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산성에 갇혀서 이도 저도 못하고 같은 편끼리 아웅다웅하다가 초라하게 항복한 장면은 모두가 원하지 않았던 결말이었다. 성내에서 최명길 등 주화파와 김상헌 등 주전파가 나라의 운명 앞에서 자신들의 사상에 기초한 논쟁만 거듭하고 왕은 그 사이 오락가락하다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적과의 전투 승패나 대신 간 논쟁의 합의가 아닌 단지 식량이 떨어지고 몹시 추워서 성문을 열고 적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희극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었다.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면 결국 외부 조건에 의하여 운명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영화'남한산성' 중 인조(박해일 분)가 홀로 근심하고 있다.
상이 남한 산성에 있다.
상이 체부(體府)에 하교하였다.
"지금 군신 상하가 함께 한 성을 지키고 있는데, 화의는 이미 끊어졌으니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싸워서 이기면 상하가 함께 살고 지면 함께 죽을 것이니, 오직 죽음 가운데에서 삶을 구하고 위험에 처함으로써 안녕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마음과 힘을 합하여 떨치고 일어나 적을 상대한다면 깊이 들어온 오랑캐의 고군(孤軍)은 아무리 강해도 쉽게 약화될 것이고, 사방의 원병이 계속하여 올 것이니 하늘이 우리를 도와준다면 전승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아, 같은 근심이 있는 사람이 서로 도와주고 같은 병을 잃는 사람이 서로 돌보아 주는 것은 이웃끼리도 그런 법인데, 더구나 부자와 같은 군신이며 한 성을 함께 지키며 생사를 같이 하는 사람이겠는가. 나는 그대들이 이 혹한 속에서 어려움을 함께 하며 허술한 옷과 보잘것 없는 음식으로 추위에 몸을 드러낸 채 성을 지키고 있음을 생각하고, 눈길이 닿을 때마다 마음이 아파 온 몸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 오직 바라건대 그대들은 각자 충의심을 분발하고 함께 맹세하여 기어코 이 오랑캐를 물리쳐 함께 큰 복을 도모하라. 그러면 훗날 작상(爵賞)을 어찌 조금이라도 아끼겠는가."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6일 1636년 명 숭정(崇禎) 9년 中]


한 겨울 남한산성 지화문. 화창한 햇살에 녹지 않은 잔설로 성곽은 얼어있다.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락겨렸다. 겨우내 가루는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 그해 바람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습기가 빠져서 가벼운 바람은 결마다 날이 서 있었고 토막 없이 길게 이어졌다. 칼바람이 능선을 타고 올라가면 눈 덮인 봉우리에서 회오리가 일었다. 긴 바람 속에서 마른나무들이 길게 울었다. 주린 노루들이 마을로 내료오다가 눈구덩이에 빠져서 얼어 죽었다.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김훈 남한산성 中]
영화'남한산성' 중 인조가 군사들을 이끌고 남한산성 남문으로 들어갔다. 


인조와 조정을 따르는 군졸들이 얼어붙은 남한산성 지화문에 들어설 때 그들은 무슨 심정이었을까!

살아서 성문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죽을 자리를 찾아 들어왔다고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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