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단산길 - 그 장사가 임꺽정이 아니었을까?
검단산에서 망덕산까지 능선을 따라가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으나 은근히 사람 힘을 빼놓는다. 산길은 완만한 것 같으면서도 검단산과 망덕산을 오르락내리락하니 지칠 만도 하다. 하지만, 그런 고단함도 망덕산 정상에 오르면 단박에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해발 500m에서 뒤돌아 검단산을 바라보면 어느새 여기까지 온 자신의 부지런함을 기특하게 생각한다.
망덕산 정상석은 자연스러운 곡선미를 자랑하며 아담하게 설치되었다. 색도 검은색이라 작지만 검단산 정상석과는 달리 사뭇 위엄도 있다.
망덕산을 예전에는 왕기봉이라고 하였다. 여기를 기점으로 하여 하남시에 있는 또 다른 검단산까지 갈 수 있다. 동쪽으로 가면 두리봉이 나오고 그 산을 거쳐 군두레봉, 장작산, 희망봉, 용마산을 지나 마지막 검단산까지 가서 하산하면 팔당댐이 나온다. 후일 성남의 검단산에서 하남의 검단산까지 도전할 만하다.
산 정상에서는 시원하게 펼쳐진 하늘 아래 산 능선을 찬찬히 훑어볼 수 있다. 검단산에서는 볼 수 없는 도심 전경이 망단산 정상에서는 내려다볼 수 있다. 역시 산에 오르는 이유는 정상에서 세상을 발아래 내려다보는 기분을 맛보기 위한 것이다. 높은 곳에서는 골목마다 작은 이익을 구하며 아웅다웅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산 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올라오는 내내 수고한 몸을 시원하게 해준다.
망덕산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은 산 줄기의 남쪽 구릉지를 차지하여 지대가 높고 기복이 심하다. 이 일대의 행정구역은 상대원인데, 송언신의 서원이 있는 곳(상대원)과 이집의 서원이 있는 곳(하대원)을 구별하여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망덕산 기슭에는 보통골로 내려가는 안내판이 있다. 보통골은 보통곡에서 나온 말로 특별하지 않고 평범하다는 뜻의 보통이라는 뜻이다. 그 유래는 옛날에 한 장사가 살았는데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힘이 셉니까?” 하면 항상 “보통이죠.” 했다 하여 장사가 사는 마을 보통골이라 한다.
지금은 하이테크밸리로 개명한 상대원 공단 뒤편 보통골에는 500년 이상 된 상수리나무가 있다. 보호수로써 성남 제 1호로 지정되어 있고, 수고는 20m이며, 흉고직경은 1.12m이다. 매년 10월 상달이 되면 보통골 부락에서 크게 도당굿을 지내는 나무로 사용하였다. 예부터 영험하다 하여 당제에 사용할 제주를 상수리나무 밑에서 제사 준비를 시작하면서 담그면 4~5시간 지나 술이 익어 그 술로 제사를 모시고 참석자들이 마시고 즐겼다는 전설이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그 상수리나무 아래가 의적 임꺽정의 소굴이었다는 전설이 지금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임꺽정(林巨正)은 조선 명종 때(1547~1567) 양주에서 천민으로 태어났다. 백정의 신분으로 천시당하다가 비록 천민이라 핍박을 받을지라도 다른 불쌍한 백성을 도와주기로 결심하고, 집을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함께 의적단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경기도와 황해도, 강원도 일대에서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들을 응징하며 백성들로부터 빼앗아 쌓아놓은 양곡창고를 모두 털어서 가난한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대대적인 임꺽정 토벌이 시작되어 상대원 보통골의 다래덩굴 소굴을 떠나게 되어 황해도 땅 구월산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결국 포도사에 의하여 임꺽정은 잡히고 바로 죽임을 당하였다.
이런 내용은 '임꺽정전’이라는 제목으로 일제시대에 한 신문에 연재되면서 조선시대 타락한 지배층을 비판하며 조선 민중들의 삶을 위로하였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양반계급에 대한 비판의식과 봉건 질서를 배척하는 와중에 임꺽정 같은 도둑 무리를 민중을 구제하는 의적단으로 포장을 한것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임꺽정 무리는 양반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수탈하고 마음대로 살인을 저지르는 도둑의 무리에 불과했다. 결코 홍길동전에서나 볼 수 있는 탐관오리의 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의적이 아니었다. 다만 나라를 빼앗긴 울분으로 당시 조선의 기득권층을 조롱하고자 임꺽정을 민중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타락한 상류층을 비판하고, 하층 계급의 변혁 의지를 고취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오히려 조선의 명종은 임꺽정이 도적이 될 수밖에 없던 현실을 개탄하며 그들을 연민의 정으로 살피고자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지금 재상들의 탐오가 풍습을 이루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요를 섬기고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겠는가. 진실로 조정이 청명하여 재물만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고, 수령을 모두 공·황과 같은 사람을 가려 차임한다면, 검을 잡은 도적이 송아지를 사서 농촌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찌 이토록 심하게 기탄없이 살생을 하겠는가.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고 추적 포착하기만 하려 한다면 아마 포착하는 대로 또 뒤따라 일어나, 장차 다 포착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명종실록 25권, 명종 14년 3월 27일]
임금은 백성들이 생업을 잃어버리고 도적이 되는 현실에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였으며, 그들을 단죄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다시 생업에 복귀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도 하였다.
근본을 돌이켜 찾아보면, 나같이 불민한 임금이 위에 있어서 교화가 밝혀지지 않고 은택이 아래까지 미치지 않았으며 게다가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민생들을 침학하고 계속해서 일 많은 군적을 만들어서 그들이 생업에 편안히 종사하지 못하고 흩어져 도적이 되게 하였으니 우선 눈앞의 생존만 다행으로 여기고 끝내 죽게 되는 줄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불쌍한 우리 백성들의 형세가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한편으로 불쌍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다. 다만 세월이 점점 흘러 이미 큰 근심거리가 되었으니 진실로 작은 걱정이 아니라 심상하게 여겨 처리해서는 안 되는데, 추포의 계책은 매번 전례만 따르고 별로 크게 소탕하는 일이 없으니 완악한 백성이 어찌 징계되어 두려워서 그만두겠는가.
[명종실록 26권, 명종 15년 12월 1일]
망덕산과 보통골 고개 사이에 벌렁고개가 있다고 한다. 벌렁고개는 논에서 농사 지어 벼를 나르던 고개로 힘이 들어 헐레벌떡 오르기 때문에 붙여진 재미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나무가 울창하여 그 고개가 어딘지 찾을 수 없다. 다만, 헐떡이며 오르는 고개가 나오면 혹시나 여기가 벌렁고개가 아닐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