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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Dec 27. 2018

응달산이 있으면 양달산은 어디에?

제5구간 태봉산길 - 응달산, 이경석 선생의 묘

응달산이 있으면 양달산도 있어야지.


태봉산에서 내려오며 걷는 능선의 소재지는 하산운동이다. 인근 운중동의 옛 지명인 산운동의 아래쪽에 위치하여 붙여졌다. 운중천 하류 지역에 해당하므로 산운동의 아래라는 뜻이다. 

누비길 5구간 태봉산(해발 310.8m) 구간 중 가장 높은 산인 응달산(해발 357m)에 도착했다. 단어 그대로 대장동 쪽의 산은 그늘이 든다고 하여 응달산이라 부르고, 맞은편 한국학 중앙연구원 쪽은 양달이 든다고 하여 양달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정작 양달산이라는 지명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응달산 맞은편 해가 비추는 쪽엔 서들산이 자리 잡았다. 양달산이라고 이름을 붙일라치면 여기 응달산보다 남쪽에 있거나 햇볕이 더 많이 비치던가 해야 이치가 맞을 텐데 여기 지세는 그런 형국이 아니었다. 아마 응달산이라는 이름은 석운동과 관련 있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석운동은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구름이 자주 끼어서 구름 운(雲) 자가 들어있는 지명이다. 그래서 해가 비추지 않아 응달산이라 부르는가 싶다. 마찬가지로 석운동은 돌이 많아서 돌 석(石) 자를 취하여 말 그대로 구름 많고 돌이 많은 동네다. 이름이 응달산이라서 그런지 오가는 사람을 마주칠 수 없어 길이 그늘지고 외져 보였다. 

응달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응달에 있어서인지 다른 산에 비하여 잔설이 녹지 않는다.

석운동의 지명 유래로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길을 바삐 가던 선비가 해가 저물어 이곳에서 머물러 갔다. 공교롭게 일이 잘못되어 선비가 서운하게 되었다고 하여 서운리라 하던 것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석운리가 되었다고도 한다. 태봉산이나 석운리 지명 유래는 거창했다. 임금의 태가 묻힌 젖가슴 닮은 산이라거나 구름이 자주 끼는 골짜기는 듣기만 해도 운치가 있다. 그 이면에는 엎어진 밥그릇이나 섭섭한 곳이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숨겨져 있다. 사람들이 웃음거리로 지었는지,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 꾸며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흥망성쇠의 낙생


응달산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판교신도시 전체가 조망되었다. 판교 중시지 사이로 고속도로가 시원스럽게 뚫려있고 고층건물마다 유리로 둘러싸인 외관이 세련미를 뽐내고 있었다. 불과 십 년 전에는 넓은 들판이 산 밑으로 펼쳐졌던 곳이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여기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응달산 기슭으로 펼쳐진 평지 일대는 조선 초기부터 많은 군사가 모여 훈련하던 장소였다. 왕이 몸소 군사 훈련하는 모습을 참관하기 위하여 들렀으며, 그때 머물렀던 행궁이 낙생에 있었다고 한다. 행궁에는 세종대왕이 특히 자주 이용했었다. 태종의 능인 헌릉이 인근에 있고 형인 양녕대군은 광주에 살았었다. 세종대왕은 헌릉에 참배하고 양녕대군을 찾아 광주로 갈 때 이곳에 들려 행궁에 머물렀다고 한다. 낙생은 서울을 오가는 주요 도로에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 온 사신들도 낙생 역에서 숙박하기도 했다. 

낙생은 서울을 오가는 주요 도로에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 온 사신들도 낙생 역에서 숙박하기도 했다. 

낙생 지역은 조선 시대에 교통과 통신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역도 있었고 천림산 봉수도 있었다. 한때는 숙박시설도 많았고 각지에서 올라오는 관리나 상인들로 상당히 붐비었다. 하지만 낙생의 번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울 아래 과천이 차츰 번성하기 시작하여 중심지가 낙생에서 과천으로 이동했다. 그 후 여러 관사나 여관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결국 초가집 몇 채만 남아있는 폐허지로 변하고 말았다. 

판교테크노밸리 전경. 낙생역이 있던 곳처럼 교통, 통신의 중심지가 되었다.

한창 성했던 시기가 채 백 년도 못 가고 아주 황폐해진 곳이 되었으니, 그렇게 사람이 머물지도 못하고 낙후된 지역으로 몇백 년을 이어 왔다. 그 후 판교 택지조성 사업이 시작되어 판교 테크노밸리 등 첨단기업이 밀집된 큰 도시가 되었다. 말조차 다니지 않는 버려진 땅에는 판교 지하철 역사와 경부고속도로 포함 여섯 개 고속도로 노선이 교차하는 교통 요충지가 되었다. 한 마을의 흥망성쇠가 낙생만큼 극적인 곳도 없을 것 같다. 


병자호란을 수습한 이경석 선생


꾸불꾸불한 능선을 따라 걸어가니 송전탑의 전선들이 모이는 변전소가 넓게 자리 잡고 있다. 변전소 이후부터는 길은 트럭 한 대 다닐 정도로 넓어지고 잘 정비되어 발걸음을 가볍게 할 수 있었다. 길 따라 나무 사이를 빠져나오니 왕복 이차로 포장도로인 석운로가 나왔다. 

응달산에서 내려오면 석운로가 있다. 길가 서있는 이정표가 맞은편으로 바라산과 청계산을 안내한다. 

석운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오르막길 끝나는 지점에서 갈래길이 나온다. 누비길은 오른편으로 향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쪽으로 걸어가야 한다. 바리케이드가 있고 철조망도 있어서 잘못 들었나 싶지만 누비길은 철조망 따라서 숲으로 다시 들어간다. 여기 갈림길에서 도로 따라 직진하면 삼전도비 비문을 쓴 비운의 재상 이경석 선생 묘가 있다.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50-7번지에 위치한 이경석 선생 묘. 경기도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되었다.

이경석 선생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도승지를 맡아 전란을 헤쳐 나가는데 공헌했다. 청나라의 승전을 기념하는 굴욕적인 삼전도비의 비문을 짓기도 했다. 당시 인조는 여러 문장가들을 불러 삼전도 비문을 부탁했다. 대부분 명나라에 배은망덕한 글을 올리지 못하겠다고 거부하거나 지병 등을 핑계로 몸을 사렸다. 후대에 치욕적인 글을 적었다고 두고두고 욕을 얻어먹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인조는 제일 연소자인 이경석에게 수치스러운 항복 비문을 작성하는 것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니 개인 일신의 명예는 잊으라며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에 선생은 눈물을 삼키고 비문을 지으며 가족에게 “왜 나에게 글공부를 시키셨습니까? 참으로 천추의 한이 됩니다.”라며 한탄하고 비문을 작성했다. 이를 두고 선생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서울 송파구 삼학사로 136에 있는 삼전도비.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 송파구청] 

이경석 선생은 전란 후 청나라가 조선에 갖은 위해를 가하는 상황이었을 때 목숨을 걸고 위기를 수습했다. 하지만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명분을 앞세웠던 선비들은 선생이 삼전도 비문을 작성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고 비판했었다. 반청숭명의 선봉에 있던 송시열은 이경석을 두고 '개조차도 삼전도 비문을 쓴 이경석의 똥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의 행적은 결코 일신의 부귀나 목숨을 구걸하는 삶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조선의 국난을 극복하면서 일생 청백리의 삶을 살았기에 여러 임금에 걸쳐 특별한 존경과 신임을 받았다. 현종 때는 공경의 뜻으로 궤장을 하사했는데 보물 제930호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기도박물관에 보관된 이경석 선생의 궤장. 보물 제930호로 지정되었다.

그가 백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시 한 편이 있다. 


병자호란 후 대군을 따라가는
궁녀의 어미가 손가락을 잘라주며 
딸과 이별하니 듣는 자들이 코끝이 찡했다.
모녀가 괴로이 생이별을 하는데 
서로 붙잡고 길에서 통곡하는구나. 
스스로 능히 목숨을 가볍게 여겼거늘 
어찌 다시 살갗을 아끼리오. 
떨어진 손가락에 옷은 붉게 물들고 
애간장이 끊어져 구슬 같은 눈물이 방울지네. 
간곡히 뜻을 같이 하는 이에게 말하노니 
죽음을 아끼는 것은 결코 장부가 아니라네.


전쟁 후 백성의 고통을 보며 몸서리치게 통곡한 이경석 선생이 백성을 도륙한 청 태종을 찬양하는 삼전도 비문을 작성했으니 그 수치감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명나라와의 의리만을 강조한 조선 성리학자들이 교과서에 실리며 그 이름을 날리는 반면 이경석 선생의 이름이 사람들에게 생소하니 그지없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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