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구간 청계산길-청계사와 하우현성당, 둔토리 동굴
나무가 빽빽하고 계곡이 깊은 청계산.
숲은 울창하다. 우거진 산림은 옛날에도 유명하여 많은 짐승이 사람 눈을 피해 청계산 기슭을 어슬렁거렸고, 조선 초 왕들은 이 짐승들을 자주 사냥했다. 깊은 산중은 사람도 눈을 피해 몸을 숨기기 안성맞춤이었다. 고려 말에는 유신 이색이 청계산에 숨어 살았고, 조선 초에는 정여창이 연산군을 피해 청계산으로 도망쳤다.
몸을 숨기려는 사람들 중 죄인들도 빼놓을 수 없다. 도적들도 한양과 가까운 이 깊은 산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임진왜란 난리 통에 송유진이란 사람은 지리산, 속리산, 광덕산 등 여러 골짜기의 도적들을 청계산에 한데 모았다. 당시 청계산에 모여든 송유진의 군마와 병사의 위세가 대단했다는데, 결국 역모를 꾸미다 사로잡혀 사형을 당했다. 송유진이 한양을 노리면서 청계산을 주둔지로 택한 것은 청계산이 서쪽 관악산과 더불어 남쪽 방벽을 이루는 산이기 때문이다.
청계산 하오고개 쪽도 골짜기가 깊어 조선 말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하여 숨어 살기도 했다. 국사봉 아래 용갱이골로 내려가면 하우현성당이 있는 원터가 나온다. 하우현성당은 백 년 넘는 역사를 가진 성당이다. 1894년 공소되었고, 지금의 사제관은 20세기 초반 지은 건축물로 한국과 프랑스의 건축방식을 절충해 지은 것이다.
청계산 국사봉 일대는 높고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을 때 핍박받는 교인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깊은 산속에 숨어 땅을 파고 토굴 속에서 살았다. 그러면서도 신앙심을 잃지 않아 이에 감동받은 프랑스 알릭스 신부는 성금을 모금하여 초가 목조 강당 10칸을 짓기도 했다.
국사봉을 넘어 이수봉 능선까지 동쪽의 산부 지명은 금토동 둔토리라는 마을인데, 말 그대로 땅을 파서 머문 곳이란 뜻이니 천주교 신자들의 토굴생활을 미리 예측이나 한 것 같은 지명이다.
국사봉에서 성남시 운중동으로 가는 금토동 등산로 방면 산비탈에는 토굴이 하나 있다. 깎아지는 급경사면에 위치하며 여러 명 몸을 숨기기 알맞다. 이 굴이 바로 성 루도비꼬가 병인박해 때 몸을 숨기며 살았던 토굴이다.
루도비꼬는 1840년 프랑스 랑공에서 태어났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1865년 5월 지구 반대쪽 이름도 모를 나라에 왔다. 당시 흥선대원군 시퍼런 서슬 아래 천주교인들이 무참하게 죽어나가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운중동 교우촌에서 조선어를 배우며 열심히 전도하다가 발각되어 국사봉 산기슭 동굴에 피신했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서울 의금부로 압송되어 1866년 3월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했다. 조선에 온 지 일 년도 안 되어 겨우 27살 나이에 순교했다. 우리나라에서 순교한 외국인 신부 중 가장 어린 나이였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 시성 되었다.
국사봉 산줄기를 내려가 안내판 따라 비탈길을 위태위태하게 내려가니 기슭으로 동굴이 보였다. 안에는 마리아상과 양초, 몇 송이 꽃다발이 있었다. 깎아지는 흙 비탈면에 있는 동굴은 바위로 되었으며, 그 위로 낙엽이 쓸려 내려왔다. 돌아보니 험준한 산줄기로 둘러싸여 적막했다. 성 루도비꼬는 한겨울 여기 동굴에서 상처 입은 어린 짐승처럼 공포와 추위로 부들부들 떨었을 것을 것이다. 동굴 안으로 세차게 몰아치는 눈바람을 낙엽으로 막으면서 신께 기도드렸을 것이다. 아무리 굴속에서 신앙의 힘으로 이겨낸다고 하지만, 벽안의 젊은이에게 청계산은 너무나 낯설고 험준했다. 더구나 한겨울 음지의 동굴은 추위를 피할 수 없었고, 먹을 것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여기 좁은 바위틈에 은거하여 고난 속에서도 순교하기까지 신을 향한 그의 믿음은 얼마나 강인한 것인지 헤아릴 수 없다.
[나는 누비길을 걷는다 中]
탄압받는 가운데 믿음을 꿋꿋이 이어간 천주교는 마침내 우리나라에서 뿌리를 내렸다. 모두 성인들의 희생과 신도들의 믿음 덕이니, 그들의 순교를 통해 믿음은 더욱 널리 알려지고 강인해질 수 있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요한복음 12:24
국사봉 봉우리에서 내려가는 길은 산 능선에 올라탈 수 있어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며 숲길을 지날 수 있었다. 능선 위에 가끔 암릉 지대를 만났는데 돌 골라 밟는 재미도 쏠쏠하다. 국사봉을 연거푸 오른 수고로움이 그 값을 톡톡히 했다. 몇 걸음을 떼니 갈림길이 나오고 친절하게도 의왕시 등산 종합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지형과 상세 위치가 자세히 소개되었는데, 이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청계사가 있고 이수봉까지 500m 남았다고 알려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국사봉을 정점으로 찍고 능선 따라 내려갈 때 서쪽 산기슭에서 스님의 불경 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사찰 경내에서 목탁 두드리며 조용히 염불 하는 소리가 산 능선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의왕시 청계동 11번지에 있는 청계사는 경기도 지정문화재자료 제6호로 청계산 중턱에 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가 고려 충렬왕 10년(1284) 시중 조인규에 의해 중건되었다.
조선시대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배하는 배불숭유를 건국이념으로 삼았다. 사찰은 허물어 정자나 사원으로 지어지고 승려들은 강제로 노비나 군졸로 편입되었다. 그래도 암암리에 불교는 왕실에서도 믿었지만, 조선 연산군에 이르러서는 더욱 불교 탄압이 심해져 도성 내에 있는 사찰을 없애고 그곳에 관청을 세웠다. 승려들도 모두 내쫓아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청계산 깊은 산속에 있는 청계사는 흩어진 승려가 모여들어 불교 사찰의 명맥을 유지했다. 그래서 한때 선종의 본산으로 정해지기도 했다.
청계사는 중형 사원으로 사원 규모와 사찰 배치는 조선시대 전형으로 보인다. 3천 년 만에 한 번 핀다는 전설의 꽃 우담바라가 피어나 유명해진 청계사는 유서 깊은 사찰답게 볼 게 많다. 사찰 내에는 조선 숙종 15년에 세운 청계사 사적비가 있고 조선 후기의 건물로 보이는 극락보전이 있다. 청계사 동종은 보물 제11-7호인데 무게만 420kg이며 18세기 종의 형태를 잘 나타냈다. 극락보전 중앙에는 주존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조선 건국의 공신이었던 변계량은 유학자로서 여러 사회제도를 개혁하면서도 불교에는 우호적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 부처를 섬기는 것이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한 사람'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그가 청계사에 머물며 지은 다음 글귀는 깊고 적막한 산속에서 도를 구하고자 하는 한 수도승의 일상을 느끼게 해 준다.
'돌길은 1천 언덕에 궁진하였고,
향 연기는 한 방이 맑도다.
손은 와서 차 끌이기를 구하고,
중은 앉아 스스로 불경을 뒤적인다.
나무는 늙었으니 여느 해에 심었는고.
종은 쇠잔하니 밤중의 소리도다.
공(空)을 깨달아 인사가 끊어졌으니,
높이 누워서 생이 없는 것을 즐거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