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구간 청계산길 정여창 선생과 이수봉, 혈읍재, 마왕굴
성남 누비길 제6구간 청계산길의 스탬프 투어 인증대는 망경대가 아닌 이수봉에 있다. 청계산 중 제일 고봉인 망경대(해발 615m)가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되어 부득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이수봉(해발 547m)이 청계산을 대표하는 상징물로 채택되었다.
이수봉 정상은 소나무가 우거진 널찍한 터에 가운데 데크가 있다. 소나무 그늘 아래로는 야외벤치 여러 개가 일렬로 설치되어, 산행 오른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다. 이수봉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일품이라 사람들은 오래 머물며 일행끼리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래서 늘 혼잡하여 이수봉에서는 호젓한 산길 분위기보다 어디 장마당에 온 느낌이 더 강하다.
제단 모양의 데크 가운데에는 사람 키 한 배 반 정도 훨씬 큰 정상석이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다. 얼마나 큰지 세로로 써진 이수봉 글자 중 ‘봉’ 자에 사람 머리가 닿는다. 게다가 높은 소나무 여러 그루가 호위하듯이 정상석 주변으로 자라고 있어 운치 있기까지 하다. 이수봉 표지석 뒤에는
‘조선 연산군 때의 유학자인 정여창 선생이 스승 김종직과 벗 김광필이 연루된 무오사화의 변고를 예견하고, 한때 이 산에 은거하며 생명의 위기를 두 번이나 넘겼다고 하여 후학인 정구 선생이 이수봉이라 명명하였다.’
라고 적혀있다.
유교를 닦는 선비들을 사림士林이라고 했다.
꼿꼿한 선비들은 불의를 피하여 산림山林을 찾았다.
맑은 계곡과 울창한 숲을 가진 청계산. 옛적에도 계곡이 깊고 숲의 나무도 무성하여 여러 들짐승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조선시대 왕들도 이곳 청계산에 자주 와서 그런 짐승들을 사냥했다. 고려 말에는 유신 이색이 청계산에 숨어 살았고, 조선 초에는 정여창이 연산군을 피해 청계산으로 도망쳤다. 특히 정여창 선생이 청계산에 은거할 당시의 사연들이 자연 지물에 얽혀 있었는데, 그를 흠모하던 후학들은 선생의 피신처 곳곳마다 그의 인연과 연관된 지명을 지었다. 바로 이수봉, 혈읍재, 금정수, 마왕굴이다.
정여창 선생의 호는 한 마리 좀벌레란 뜻의 일두(一蠹)였다. 선생이 18세 되던 해, 부친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중 순국하여 나라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식이 영화를 누리는 일은 차마 하지 못할 일’이라면서 받지 않았다. 그리고 평소 술 마시지 않고 소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모친이 소를 보고 놀랐고 술을 마시지 말라 명하신 것을 따른 것이다. 그만큼 효성이 깊은 선비였다.
후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며, 어린 연산군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하지만, 1498년(연산군 4년) 무오사화 때 김일손 등의 사초가 문제 되어, 국왕 연산군의 스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종직의 붕우라는 이유로 곤장 100대를 맞고 두만강 근처 함경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는 좌절하지 않고 학동들을 데려다가 성리학을 가르치고, 동네 선비들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학문과 문물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504년(연산군 10년) 55세를 일기로 유배지에서 돌아가셨으며, 문인들이 시신을 경상남도 함양으로 옮겨와 장사를 지냈다. 하지만, 같은 해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 한훤당 김굉필이 사사될 때 다시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정여창 선생의 목숨을 두 번 구했기에 이수봉이라 이름이 붙였지만, 죽은 뒤 다시 죽이는 부관참시까지 당했으니 두 번 살아나 두 번 죽은 셈이다.
무오사화는 대의명분을 존중하는 김종직과 신진사류와 사사건건 대립하던 훈구파가 일으킨 사화이다. 훈구파는 신진사대부들이 자신들을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소인배로 멸시하고 자신들만이 고결하다고 주장하는 것에 증오심을 품었고, 연산군 또한 그들의 간언에 진저리가 난 터라 단종을 조의한 제문을 구실로 김일손을 능지처참하고 김종직을 대역죄로 부관참시했다. 이에 정여창 선생은 목숨을 부지하고자 고향 함양으로 도망치다 추포꾼을 피해 이 청계산에서 숨어 지냈다. 깊은 청계산 숲 속 그는 망경대 기슭 험한 암석 조그마한 굴에 숨어 지냈는데, 그 굴은 평소 마왕굴 또는 오막난이굴로 부르기도 했다. 이는 고려가 망하기 직전 맥이라고 하는 이상한 동물들이 떼를 지어 이 굴로 들어갔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맥굴에서 막굴, 망굴, 그리고 마왕굴로 변했다.
마왕굴에 숨어 지낸 정여창 선생은 그의 동료들이 대역무도 죄로 걸려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에 굴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산속에서 마땅히 허기진 배를 달랠 길 없고 목을 축이고자 하나 산꼭대기에서 약수터를 찾을 리 만무했다. 한밤중 인기척 없는 적막한 산속을 헤매다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달려가 보니 달빛에 금빛으로 비친 맑은 샘이 보였다.
무오사화를 피해 청계산에 피신한 정여창 선생은 마왕굴에 은거하며 금정수를 마시며 해갈을 달랬다. 하지만 이내 관군에 붙잡혀 한양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곤장 100대를 맞고 귀양을 갔다. 유배지에서 죽은 뒤 연산군은 다시 사약을 받고 죽은 어머니의 복수를 위해 갑자사화(1504)를 일으키고, 정여창 선생은 다시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때 청계산의 금정수 금빛 샘물은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고 했다. 그 후 1506년(연산군 11년) 중종반정으로 선생은 복관 되었으며, 이때 샘물이 핏빛에서 다시 금빛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과천현 신수읍지에는 금정수의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금정수는 망경대 정상에 있다. 층암이 백길에 서 있는데, 마치 사람이 대를 쌓은 듯하다. 한 가닥 샘이 소리 내며 바위틈에서 똑똑 떨어진다. 그 빛이 마치 금빛 같아서 금정수라 이름 지었다. 이도 볼만하다.'
망경대를 지나 매봉(해발 582m)으로 갈려면 능선 중간쯤 고개를 넘어야 한다. 고개 이름은 혈읍재다. 혈읍재의 유래 또한 정여창 선생의 피난길에서 비롯되었다. 무오사화로 인하여 스승과 벗들이 무참하게 희생되었던 당시 정여창은 피의 칼바람을 피하여 한양을 벗어나고자 청계산을 넘었다. 한때 연산군이 세자 시설 스승이기도 했던 정여창 선생은 동문수학하던 벗들과 스승이 무참하게 살육을 당하는 것을 생각하며 피눈물을 흘리며 청계산을 넘어 도망쳤는데 그 고개가 바로 혈읍재다.
한때 정여창 선생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넘던 혈읍재는 오늘날 등산로 따라 맑은 계곡이 흐르고 물 주변 기암과 단풍나무도 멋지게 서있어 등산객이 많이 찾는 휴식처가 되었다. 그리고 계곡 따라 야외벤치나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어 세파의 시름을 달래는 길손의 힐링공간으로 변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