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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Mar 22. 2019

헌인릉을 지켜주는 인릉산

제7구간 인릉산길.  인릉산과 헌인릉, 조산과 모산

인릉산과 헌인릉


누비길 제7구간 주봉인 인릉산에 오르는 숲길은 푹신한 흙으로 덮인 전형적인 육산이다. 늦가을부터는 수북한 낙엽으로 내딛는 발걸음은 푹신하기까지 하다. 숲길 옆으로는 저마다 개성 있는 바위가 간간히 있기도 하여, 비탈면에 아스라이 서있는 바위를 보며 품평회를 하면서 오르는 재미도 있다. 

전형적인 흙산인 인릉산에도 간간이 바위가 보이기도 하다. 


완만하게 능선 따라 오르면 어느새 흙길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것이 보인다. 언덕배기 푸르른 리기다소나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니 어느덧 인릉산 정상에 도착했다. 산 정상은 넓은 헬리포트가 자리를 잡고 있고 그 공터 너머 남쪽에 제법 큰 바위가 있는데, 그곳이 인릉산길 스탬프가 위치한 곳이다. 산은 그리 높지 않으나 청명한 날 오르면 머리 위에 하늘을 이고 발아래 천하를 내려다볼 수 있다. 그리고 푸른 하늘 아래 청명한 기운을 받는다.


해발 327m 인릉산 정상. 스탬프 인증대와 정상석이 놓여 있다.


인릉산은 청계산, 국사봉, 바라산 등의 산지와 연결되어 성남시 서쪽으로 서초구, 과천시, 의왕시와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높이는 326.5m이다. 산 북쪽에 위치한 순조의 능인 인릉의 조산이 되기 때문에 인릉산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이라고도 한다. 조산(朝山)이란 안산(案山)과 같이 묘소나 집터 앞의 산을 말하는데, 가깝고 작은 것은 안산, 멀고 높은 것은 조산이라 한다. 모두 혈 자리를 보조하는 풍수지리학적인 용어다. 조산 위치는 손님이 주인을 보는 것과 자식이 아비를 보는 것과 부인이 지아비를 바라보는 것과 같아야 한다고 정하고 있다. 인릉에 와서 인릉산을 바라보면 과연 풍수지리적으로 묘소를 멀리서 보호하고 있는 듯하다.

조선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인 인릉.  


인릉산의 명칭을 부여하는 인릉은 서울시 서초구 헌인릉길 34에 위치한 헌인릉에 모셔져 있으며, 조선 제23대 순조(1790~1834) 임금의 능이다. 순조는 정조의 아들로 1800년 불과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순왕후가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조는 검소하고 덕이 높으며 학문을 사랑한 왕이라고도 하나 외척가 세도가에 휘둘려 왕으로써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 세력은 절대적인 권력을 갖고 왕권을 무력화했으며 이에 삼정이 문란해지고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다. 이에 핍박받는 백성들의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극심한 가뭄 등 자연재해까지 발생해 순조 치세 조선은 기울기 시작했다. 

인릉은 처음에는 파주 장릉 근처에 있었다가 1856년 현재 자리로 옮겼다.


인릉보다 헌릉이 먼저라면 인릉산은 헌릉산이 아닐까?


제23대 순조 임금의 능이 모셔진 인릉 바로 옆에는 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이 자리 잡고 있다. 특이하게도 수백 년의 세월을 두고 조상과 자손의 능이 나란히 조성되었다. 이 두 묘소를 합쳐서 헌인릉이 부르며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안동 김 씨 세도 세력에 휘둘려 왕권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던 순조에 반하여 태종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일조하였으며,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개국공신을 죽이면서 강력한 권력을 갖고 왕위에 오른 왕이었다.

왕이 된 후에는 제도를 정비하여 왕권 중심의 나라 기틀을 확립하고 불합리한 관제를 개혁하기도 했다. 강력한 절대권력을 만든 태종은 가장 영특한 셋째 아들 충녕을 세자로 삼고 충녕이 성군이 되어 태평성대를 만들 수 있도록 외척세력과 공신 등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요소는 모두 제거하였다. 이에 충녕이 왕위에 오른 후 조선이 해동의 요순시대라 일컬을 정도로 태평성대를 열었으니 그가 바로 세종대왕이었다. 

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 인릉 바로 옆에 있다.


여기서 인릉산의 유래가 인릉의 조산이 된다고 한다면 바로 옆의 헌릉의 조산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23대 순조의 업적은 3대 태종의 업적에 비할 바가 못된다. 그러면 헌릉의 조산이라고 하여 인릉산을 헌릉산이라 고쳐 불러야 함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세종 2년 원경왕후를 안장하여 헌릉을 조성하고 세종 4년 태종을 안장하여 쌍릉으로 조성했다.


한편으로 사람의 높고 낮음을 규정한 유교 질서에 의하여 산과 바위조차 서열을 부여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기도 하다. 산은 그대로 서 있을 뿐, 능에 가깝다 하여 안산이 되고 능에 멀다 하여 조산으로 구분하는 것도 다 허망한 분별심일 뿐이다. 

인릉산 정상에는 숲이 우거져 헌인릉을 볼 수 없고 능선 타고 내려오면 비로소 볼 수 있다. 


인릉산 정상은 숲이 우거져 주변 경관을 내려다볼 수 없다.

인릉산을 내려와 능선 길을 가보니 여느 산 못지않게 식생이 다양하고 생태계가 잘 보전되어 있다. 군부대가 위치하여 개발 압력이 높지를 않아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고 이웃한 청계산 같은 명산이 있어 등산객의 발길이 여기까지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종을 살펴보면 신갈나무, 갈참나무, 굴참나무, 상수리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참나무 주변으로도 물푸레나무나 층층나무 등 물을 좋아하는 수종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 나무 그늘에 하층 식생의 경우 관목류인 진달래가 많이 보였다. 이른 봄에 찾아오니 메마른 가지에서 불그스름한 진달래가 한 두 송이 피어났다. 


진달래가 봄소식을 알리며 숲 속에서 제일 먼저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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