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구간 인릉산길. 생강나무, 천림산 봉수대, 심곡동
춘분이 지난 후 오르는 인릉산 길은 제법 찬 바람에 콧등이 시려도 어연한 봄이다. 숲은 진달래 붉은 꽃잎과 생강나무의 노란 꽃송이를 보이며 이제부터 봄이라고 알려준다. 숲길 메마른 땅 위로는 냉이와 쑥 같은 봄나물이 올라오는데, 예로부터 단오 전에 나는 풀은 모두 약초라 했다. 추운 겨울 단단하게 언 땅을 뚫고 솟아나는 만큼 풀은 억세고 강인하며, 그 튼튼한 기운이 사람의 몸도 튼튼하게 하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 때문에 약초라 여긴 것이리라.
몸에 좋은 만큼 맛도 좋아 나른한 봄 입맛을 잃을 때 향긋하고 쌉싸름한 봄나물이 입맛을 되찾게 해 준다. 특히 냉이는 향이 독특하고 은은하여 봄나물중 일품이다.
누비길 제7구간 주봉인 인릉산은 대동여지도에서 천림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문헌 광주부읍지에도 인릉산은 천림산으로 표기돼있다. 하지만, 천림산은 조선말 순조의 능 인릉의 조산이 된다는 이유로 인릉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인릉산의 옛 이름 천림(天臨)산의 뜻은 하늘에 임할 만큼 높다는 것이다. 누비길 7구간 중 오르기가 제일 수월한 산(327m)이라도 한강 남쪽 근방에서는 대모산(293m)이나 구룡산(306m)에 비하면 제일 높다.
그래서 예전부터 인릉산 정상에 조선시대 봉화 굴뚝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다. 이 근방에 살던 어르신들은 어린 시절 인릉산 정상 봉화 뚝에 올라와 남산과 한강철교를 종종 구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남쪽 용인 석성산 봉수터와 북쪽 서울 남산 봉수터도 한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군인들이 주둔하고 헬기장을 조성하면서 봉화 뚝을 허물고 봉수 연조에 쓰인 석재들은 헬기장 축대로 사용되어 지금은 봉수터 흔적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도 전국 봉화제가 열릴 때 성남에서는 인릉산 정상에서 제1회 천림산 봉화제를 개최하여 축제 한마당이 벌여졌었다.
성남 천림산 봉수지는 조선시대 전체 5개의 봉수 노선 중 제2봉수로써 경기도 관내 마지막 봉수로써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내륙 산간에 위치한 내지 봉수터로 왜적이 침입하면 부산 동래에서 봉화불이 오르고, 불은 경상도와 충청도를 거쳐 안성 망이성과 용인 석성산 봉수를 거쳐 천림산 봉수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천림산 봉수터에서 불길이 오르면 16km 떨어져 있는 서울 남산으로 바로 신호를 전달하여 한양에서는 적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었다.
천림산 봉수군의 근무 인원과 관련하여서는 『중정 남한지』봉수조에 봉군 25명, 봉군보 75명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봉수와 같이 봉군 5명이 조를 이루어 5 교대로 월평균 6일씩 근무하였고, 봉군보는 실제 근무를 하지 않는 대신 근무를 서는 봉군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하였다. 봉수제도는 전신 전화 도입과 함께 고종 31년(1891년) 폐지되었다.
하지만, 제1회 천림산 봉수제가 인릉산에서 개최되고 난 이후 금토동에서 봉수터가 새로 발견되었으며, 이후 봉수터 발굴조사와 문헌고증을 통하여 천림산 봉수는 인릉산이 아닌 청계산 기슭 야트막한 구릉지로 변경되었다. 청계산에서 발굴조사로 나타난 봉수터는 동서방향을 장축으로 하는 장타원형으로 둘레는 80m이며, 동서 길이는 33.6m, 남북 길이는 12m 크기였다. 조선 초기 봉수의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하여 현존하는 봉수 중 규모가 가장 컸다. 그리고 구조적으로 가장 완벽한 5개 조 연조와 방화벽 및 담장지 등을 갖추고 있었다. 이후 추가적인 여러 지표조사를 통하여 천림산 봉수터는 인릉산 정상이 아닌 청계산 나지막한 구릉으로 정해졌고, 곧 경기도 문화제 179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천림산봉수터는 성남시가 자랑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 될 수 있도록 철저한 조사와 고증을 거쳐 봉수의 연조와 방호벽을 복원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복원될 봉수 형태는 성남문화원에서 발간한 '한국의 봉수 40선', '봉수 문헌자료집'과 전국 봉수 실태조사를 토대로 아래쪽은 넓고 위쪽은 뾰족한 굴뚝 모양이 될 예정이다.
한편으론, 봉수대라는 것이 산봉우리 위에서 연기를 지피고 잘 보이게 하는 신호체계라면, 청계산 기슭 아래에 있는 해발 170m의 구릉지보다 해발 327m의 인릉산 정상이 봉수대 부지로 더 적합할 수 있겠다 싶다. 하지만, 봉수대 불을 사시사철 지켜야 하는 봉군으로서는 봉수대가 산 정상보다는 산기슭에 있는 것이 관리하기에 편할 성싶기도 하다.
인릉산 정상에서 내려오면 심곡동으로 들어선다. 심곡동은 인릉산 밑 깊은 골짜기가 되므로 심곡(深谷)이란 이름이 붙었다. 골짜기를 타고 심곡동으로 내려가면 효성고등학교 옆으로 길이 1m, 높이 30cm쯤 되는 거북바위가 있다. 몸 가운데는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가 있는 바위는 거북을 닮았다고 거북바위로 불리며, 원래 하천 중간에 놓여있었다. 거북바위의 머리는 현재 서울공항이 돼버린 건넛마을 전답을 가리켰고, 엉덩이는 심곡동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 모양이 건너 마을의 곡식을 입으로 물어 마을로 똥을 누는 형상이라서 심곡동 마을 사람들이 잘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때로는 건넛마을 사람들이 이 바위 때문에 살기 힘들어졌다고 하여 바위 위치를 돌려놓기도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다시 바위 위치를 제대로 놓곤 했다.
이후, 하천을 복개할 때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귀하게 여겨 공사할 때 바위가 훼손되지 않도록 따로 하천 옆에 옮겨 놓아 비석도 세우고 보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