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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Apr 11. 2019

범바위산과 최명길 선생이야기

제7구간 인릉산길, 대모산과 범바위산, 최기남 묘

범바위산에서 바라본 대모산


인릉산길은 숲길로 따진다면 비탈길이 그리 많지 않기도 하거니와 평탄도 하여 등산하기 쉬운 축에 속한다. 그리고 길 주변으로 오동나무와 서어나무, 층층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참나무 틈에서 잘 자라고 있어 걷기에도 쾌적하다. 비록 인근 훈련장 총소리나 비행기가 이착륙할 때 굉음이 들리곤 하지만, 고요한 숲을 음미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이다. 내딛는 발걸음도 편안케 하는 흙길이 대부분이다. 간간이 발길을 멈추고 우두커니 바라보게 하는 바위도 제법 있어 걷는 내내 심심치 않다. 그런 바위 중 으뜸 바위는 바로 범바위다.

흙산인 인릉산에서도 제법 험상궂고 다양한 바위와 마주칠 수 있다.


바위가 들어선 능선의 척박한 땅에는 어김없이 소나무가 자라났다.


범바위는 인릉산 정상에서 신촌동 방면으로 내려가면 등산로 북쪽 작은 샛길로 오십 보정도 걸으면 찾을 수 있다. 숲길에서 바닥만 바라보고 걷노라면 지나칠 수 있지만, 작년에 인릉산 범바위를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찾기 쉬워졌다. 범바위는 해발 273.9m 높이에 불과하지만, 북쪽 사면에는 나지막한 대모산과 구룡산뿐이라 막힘없이 관악산과 북한산을 바라볼 수 있다.

인릉산 범바위와 쉼터.

범바위라는 이름이 범을 닮은 형상이라 그리 불러졌을 텐데, 막상 보면 범의 사나운 모습은 커녕 평온해 보이기까지 는 나지막하게 깔린 바위다. 어쩌면 산 아래서 바라보면 호랑이 모습을 닮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바위 밑 비탈은 된비알이라 일부러 내려가서 보기 쉽지 않다. 그리고 굳이 바위 형상을 볼 필요도 없는 것이 범바위에 올라서면 서울 시내를  눈에 담을  있는 눈요기를 할 수 있다.

날이 맑은 날 범바위에서 바라보는 북쪽 서울 전경. 구룡산과 대모산이 보인다.

정상에서 제일 가까이 보이는 산은 좌편 구룡산과 우측 대모산이다. 멀리로는 관악산과 그 뒤로 남산과 북한산도 보인다. 좌측에 있는 구룡산은 해발 283.2m의 높이로 지명 유래는 열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한 여인이 놀라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용 한 마리는 땅에 떨어져 죽고 나머지 용 아홉 마리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설화에서 비롯되었다. 하늘로 승천하지 못하고 죽은 용은 대신 양재천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대모산은 산 모양이 늙은 할미와 같다 하여 할미산으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의 헌릉이 자리하면서 대모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대모산에는 조선 3대 임금 태종의 능인 헌릉과 제23대 임금인 순조의 인릉을 같이 있는 헌인릉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인릉산은 인릉의 조산이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릉산의 유래가 된 인릉과 헌릉의 안내도. 헌인릉은 대모산에 모셔져 있다.


누비길에 봄이 오니 나무 아래 새 풀들이 솟아나고 있다. 알면 보이는 것일까! 나무가 듬성한 곳에 꼬부라진 할미꽃이 발아래 피었다. 늙은 할미를 닮았다는 대모산을 바라보다 할미꽃과 마주치게 되니 꽃을 자세히 들여다 보게 . 할미꽃은 머리가 하얗게 센 모습으로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꽃을 피워 냈다. 할미꽃은 우리나라 야산에 볕만 잘 들면 지천에서 자란다. 우리나라가 원산지라 학명도 ‘Korean pasque flower’다. 할미산이 대모산으로 고쳐 부르듯이 할미꽃도 노고초(老姑草)로 불리기도 하지만, 정감 있는 이름은 할미꽃이다. 굶주린 할머니가 셋째 손녀딸을 찾아가다가 집 앞을 두고 쓰러져 그 넋이 산골짜기에 핀 꽃이라 더욱 그렇다.  



병자호란 주화파 거두 최명길의 부친 최기남


범바위를 내려오는 인릉산길. 쓰러진 고사목으로 흙막이 축대와 계단목을 조성했다.


누비길 제1구간 남한산성길은 병자호란 발발로 인조가 피난을  떠나 급히 목을 축인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각 구간마다 치열한 항전의 역사가 곳곳에 배어 있다. 누비길 마지막 구간 인릉산길에서도 병자호란의 역사적 자취를 엿볼 수 있다. 그 흔적은 바로 신촌동 주민센터 방면을 지나는 누비길 오야동 산 3-1번지 임야에 있는 묘에 있다. 나지막한 산줄기에 조성된 묘소는 병자호란 당시 청과 회친을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의 아버지 최기남 묘이기 때문이다.

최기남(1559~1619)은 문신으로 학문과 재행에 뛰어나 왕자사부에 임명되어 왕세자인 광해군의 학문을 잘 이끌기도 하였으며, 병과에 급제한 후 함경북도 평사로 나가기도 했다. 이때 함흥지방에  머물면서 날로 강성 해지는 여진족을 보며 장차 조선에 국난이 닥칠 것을 염려했다. 그리고 아들 최명길에게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는 오랑캐라고 업신여기지 말고 서로 화친하며 상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 영향으로 병자호란이 닥쳤을 때 최명길은 오직 백성을 위해서라면 청과도 화친할 수 있다고 했다. 주변 사대부로부터 나라를 팔아먹는 간신으로 모멸당하면서도 청과 끝까지 화친을 주장했다.


최명길의 부친 최기남의 묘는 인릉산 줄기 나지막한 야산에 위치해 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당시 청과 화친을 주장했을 때, 대신들은 그를 오랑캐의 개로 업신여기며 탄핵을 여러 번 주청했다. 병자호란 말미에는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작성하였으나, 이 문서마저 김상헌이 부친 뵈기 부끄럽지 않냐 하며 호통치고 찢어버렸다. 이때 최명길은 “대감은 찢으나 나는 주워 맞추리다.”며 태연하게 말하고 조각난 국서를 붙였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김상헌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나라에는 문서를 찢는 신하도 필요하고 나처럼 붙이는 신하도 필요하다.”며 말했다.

최명길은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에서 청과의 화친으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영화 '남한산성' 최명길(이병헌 역)]

훗날 최명길이 임경업의 심복을 명나라 밀사로 보낸 것이 청나라에게 발각되어 자신의 장례 도구를 가지고 청나라 심양으로 떠나게 되었다. 거기 감옥에서 심문을 당할 때 먼저 압송당한 김상헌과 재회하게 되었는데, 그때 김상헌은 비로소 최명길이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 후부터 최명길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그를 존중하게 되었다.  

묘소에는 동자석이 좌우로 서있으며, 이 외에도 향로석, 묘표, 상석 등 다수의 옛 석물을 갖추고 있다.

후세 사람도 그들 모두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진심이었다고 하여 ‘찢는 사람도 옳고, 붙이는 사람도 옳다.’란 말로 그들의 절의를 존경했다. 한편 최명길은 전란 후에 청나라로 끌려간 백성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발 벗고 나서서 수만 명의 조선 포로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참혹한 전쟁의 상흔을 겪고 끝까지 살아남은 조선 사람들은 최명길의 인도로 이역만리에서 조선을 다시 찾아올 수 있었다.

무수한 칼날과 발길에 짓밟히고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터벅터벅 고국땅으로 들어올 때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민중의 산야초 민들레가 그들을 맞이했다.

봄이 오는지 누비길 위로 민들레꽃이 피어났다.


민들레꽃처럼 살아야 한다.
특별하지 않을지라도
결코 빛나지 않을지라도
흔하고 너른 들풀과 어우러져
거침없이 피어나는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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