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아테네 피렌체
피렌체 역에서 판자니 길(Via Panzani) 따라 관광객들에 묻혀 5분 걷다 보면 두오모를 만날 수 있다. 가뜩이나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피렌체에서 볼 것이 많다 해도 두오모는 과연 독보적인 건축물이다. 피렌체를 벗어나 이탈리아 전체를 아울러 인상 깊은 유적을 꼽으라고 한다면 로마의 콜로세움과 토스카나의 피사의 사탑, 그리고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이다.
가능한 한 장엄하게, 더욱더 화려하게
이 문구의 모토를 피렌체 천주교 성당 두오모가 가장 잘 따랐다.
두오모의 정식 명칭은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이다. 이름처럼 피렌체에는 수도승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장미꽃향 화장품이 인기가 있다.
두오모는 영어 돔(Dome)을 뜻하며 하느님의 집을 의미하고 라틴어 Domus(집)가 어원이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Firenze Duomo)
피렌체 대성당이 지어지기 오래전, 그 터에는 이미 900년 정도 된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있었다. 낡고 노후한 성당은 당시 르네상스 시대를 맞아 번영하던 피렌체를 대표하기에는 너무 좁고 누추했다. 피렌체에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세인트 폴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밀라노 대성당 등과 맞먹는 규모의 성당이 필요했다.
신이 하늘에서 내려다보실 때 다른 도시보다 제일 먼저 피렌체를 굽어보길 원했다. 사실 도시민의 자긍심과 성직자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다른 도시의 성당보다 더 크고 더 화려한 성당이 있어야 했다.
당시 피렌체는 십자군 원정의 길목이어서 십자군 원정에 의해 상업이 발달하고 경제적으로 넉넉했다. 부유한 시민의 막대한 헌금과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피렌체 두오모 성당은 1292년에 지어지기 시작해서 140여 년에 걸친 노력 끝에 1446년 완성되었다.
완성된 두오모 성당은 당대를 대표하는 가장 화려하고 가장 웅장한 성당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었다. 건물 외벽은 하얗게 빛나는 대리석과 붉은색과 초록색 대리석으로 치장하였다. 벽면마다 새긴 섬세한 조각들은 두오모 성당과 인접한 산 조바니 세례당과 조토의 종탑 벽면까지 이어져 통일감 있게 했다.
그래서 이탈리아 고딕식 건축의 전형적인 건물을 들라하면 단연 섬세하게 지어진 두오모 성당을 뽑는다.
섬세한 고딕식 건축 양식의 두오모 성당 벽면
두오모 성당을 대표하는 돔 공사는 1420년에 시작되어 1436년에 완성되었다. 건축 당시 가장 거대한 돔이었으며,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이다. 돔을 짓기 위해서 무려 4백만 개 이상의 벽돌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거대한 구조이면서도 동시에 무척 섬세한 건축물인데, 건축가였던 브루넬레스키 직업이 원래 금세공이었기 때문이라 가능한 것이라 추측도 해본다.
돔 구조의 건축양식은 로마제국 시대의 건축기술이었으며, 로마의 옛 양식이 부활되었다는 것은 신본주의의 중세시대가 막을 내리고 인간 중심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알리는 일이었다.
신을 찬양하며 바친 성소가 인본주의의 선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무척 아이러니한 일이다.
지오토 종탑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두오모 반원형 지붕 큐폴라
피렌체 어느 골목에서도 올려다 보이는 반원형의 지붕 큐폴라(cupola)에 오르면 반대로 피렌체 어느 골목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피렌체 역사지구에서 두오모는 도시의 구심점이며 모두가 지향하는 천국으로 안내하는 성소였다.
두오모 성당에서 내려다보는 피렌체 시내 전경
두오모에서 내려다보이는 지오토의 종탑
지오토의 종탑(Campanile di Giotto)
두오모 성당 옆 지오토의 종탑은 두오모 건설의 총책임자였던 지오토가 설계를 하고 그의 사후 제자였던 안드레아 피사노가 1359년에 완성되었다. 안드레아 피사노는 피사의 사탑(1173년)을 만든 보나노 피사노의 후손이다. 지오토의 종탑 입구에서 414개의 계단을 오르면 종탑 꼭대기에서 두오모의 화려한 모습과 피렌체 붉은 지붕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두오모 돔 내부에 그려진 그림 '마지막 심판'
화려한 피렌체 두오모의 돔 안에 그려질 천장화를 구상하고 결정하는데 많은 심사숙고가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돔의 천장화는 하나남의 마지막 심판을 그리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며 3,600제곱미터의 천정에 신이 내리는 마지막 심판을 묘사하였다.
프레스코화 그림은 위에서 아래로 천사들의 합창과 예수님과 마리아, 도덕심과 행복감을 그렸고, 돔의 맨 아랫부분에는 죄를 지은 사람들이 고통받는 지옥을 그려 넣었다.
두오모 성당 첨탑 십자가 인본주의 출발 르네상스
신 중심의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탐구와 자유로운 예술을 발달시킨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꽃 피웠다. 금융과 보석, 가죽 등으로 유명한 피렌체는 상공업이 발달하여 도시는 안전했고 시민은 부유했다. 생계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난 시민은 문화와 예술을 발달시켰고 점차 중세 교회와 영주의 속박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사실 부유한 시민은 귀족이나 성직자보다 높은 신분을 부여받지 못한 것에 반발감도 있었다. 재력이나 교양으로 따져보아도 부족함이 없던 시민들에게 기존 질서는 속박이었다.
자유로운 시민은 자유롭게 생각하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다. 예술작품에 있어서도 신과 성서 위주의 창작활동 대신 다양한 인간의 본성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피렌체와 르네상스 대표적인 예술가 미켈란젤로 언덕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배하던 중세시기는 흔히 문화적 암흑기라고 한다. 그시대 유럽 사람들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생활하였다. 그리스 로마시대에 위대한 학문과 예술을 영위했던 활동에 비해 중세 유럽은 엄격한 신본주의 가톨릭 교리에 맞는 생활을 철저히 하였다. 당연히 인간의 지식 탐구와 예술창조는 상당히 제한받았다.
피렌체를 포함한 이탈리아 북부에서 르네상스 문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인간의 본성을 중심으로 삼고 모든 철학과 예술에서 종교가 강요한 억압 상태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 정신과 지혜를 소중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리스 로마의 인본주의 학문과 예술을 다시 부흥시켰다.
르네상스는 문자 그대로 ‘재생’이라는 뜻으로
신보다 인간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며
그리스 · 로마시대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그리스 로마시대 인간 중심의 예술활동을 부흥시켰던 르네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