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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Sep 15. 2020

아잔타 석굴 Ajanta Caves

불교미술의 정수, 아잔타 석굴 불교사원

불교미술의 정수 아잔타 석굴 불교사원


아잔타 불교 석굴사원은 아우랑가바드에서 북동쪽 방향으로 버스를 타고 질주하면 두 시간 남짓하여 도착할 수 있다. 인도 중부 데칸고원은 건조한 기후로 그늘을 만들어 주는 교목은 없고, 단지 키 작은 잡목만이 듬성듬성 자라나 있었다. 버스 타고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사람이 사는 마을이나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을 만큼 황량한 곳이었다. 

아잔타 석굴이 위치하는 황량한 데칸 고원

아잔타 석굴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무려 800여 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인근 엘로라 종교 석굴보다 600년이 앞섰다. 엘로라 초기 석굴이 불교 석굴이었으니 아잔타 석굴부터 엘로라 초기 석굴까지 그 시기에 인도에 불교가 번영하여 예술로써 표현된 셈이었다. 데칸고원에 힌두교가 다시 번성하면서 불교는 자연스럽게 쇠퇴하였고 결국 아잔타 석굴은 모두에게 잊혔다. 그렇게 나무와 덩굴에 감춰진 아잔타 석굴은 천 년간 숨어 있다가 기적처럼 다시 깨어났다. 1819년 영국인 존 스미스가 데칸고원에서 호랑이 사냥을 하다가 석굴을 우연히 발견했다. 

 

1819년에 발견되기까지 아잔타 석굴은 황량한 고원에 천년 간 버려져 있었다.


산 능선 따라 연한 초록의 잡목이 자라나 있고 그 아래에 검은 현무암 바위가 기다랗게 드러난 것이 보였다. 흙빛 바위 아래에는 옥수수 알갱이 이 빠진 듯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영국인이 호랑이를 쫓으며 이 고원까지 왔다가 거대한 바위 절벽과 웅장산 사원을 보고 얼마나 기이하게 생각했을까 싶다. 영화로 만들어도 인디아나 존스 못지않게 긴박감 넘칠 것이다. 


와고라강을 끼고 있는 아잔타 석굴

인도 굽타 왕조 시대의 석굴은 총 30개의 석굴로 조성되어 있으며 이중 25개가 승려들이 거주하는 방이고 나머지 5개는 법회를 여는 예배당이다.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채색과 조각 표현이 예술적으로 세밀하고 아름답다.

아파트 베란다 모양처럼 조성된 석굴
아잔타 석굴은 발견되기 전까지 석굴의 법당은 사람이 살지 않는 굴은 온갖 짐승들의 보금자리였다. 여러 신성한 불상과 벽화는 들짐승의 털과 분뇨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 모습에 뭇 짐승들을 원망할 필요는 없다. 불교는 인간뿐만 아니라 여러 동물의 생명과 삶을 존중한다.

오늘날도 사찰에서는 네 발 가진 길짐승을 위해 법고를 울리고, 
하늘의 날짐승을 위해 운판을 치며 
물속의 물고기들을 구제하기 위해 목어를 두들긴다. 
물론 인간을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하여 범종도 울린다.
석굴사원은 오로지 불심으로 정과 망치를 이용해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


석굴 벽면에 바위를 깎아 만든 부조

아잔타 석굴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문화재 보존에 대한 관리나 노력은 많이 아쉽다. 처음 석굴을 발견한 영국 대위는 동굴 안의 수많은 조각상들과 벽화가 매우 생생하고 놀랄 만큼 보존이 잘 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발견 이후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된 석굴은 폐허로 방치된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이 훼손되고 말았다. 


짐승들이 인간보다도 자신의 영혼을 제도하는 부처님의 뜻을 헤아렸을까?


결가부좌를 튼 본조상

1번이라 쓰인 석굴에 들어서면 신라시대 경주 석굴암과 같은 인상의 본조상이 결가부좌를 튼 채 앉아 계신다. 좌우 기둥은 이집트 풍으로 장식되어 우리의 본존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엄숙함과 다소 푸근한 인상은 비슷했다. 아잔타 석굴은 자연 빛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석굴 안은 상당히 어두웠으나, 한 가닥 햇살이 석굴 안으로 들어와 불상을 비추었다. 그러자 광명이 퍼지는 듯 본존불이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은은한 조명이 비친 조각품

벽화는 돌 표면에 동물의 털이나 짚을 섞은 진흙으로 표면을 다듬은 다음 석고를 입히고 그림을 그렸다.

그림 내용은 부처님의 생애를 담은 본생담과 여러 보살의 모습이다.

석굴사원 내부 기둥의 채색 흔적

석굴의 벽면과 천장 그리고 기둥에는 인도의 풍속이나, 불교에 관한 것들이 풍부하고 다채로운 색감으로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특히 연꽃을 든 보살상인 연화수보살도는 아잔타 색채 미술을 대표하는 정수로 우리나라와 일본의 불교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아잔타 벽화의 대표적인 연화수보살도

 아잔타 석굴의 벽화는 유럽 르네상스 시기 프레스코화 보다 뛰어난 예술작품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네이딘 고디머는 아잔타 석굴을 돌아본 후 이런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친구들에게 시스티나 성당은 잊어버리고 아잔타 석굴을 보라고 하겠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잔타!


아잔타 석굴 위로 데칸고원을 회한에 가득 차서 바라보았다. 우리나라 지형은 산으로 둘러싸여 그 끝을 모르겠으나 고원에서 바라보는 땅은 그대로 바다처럼 지평선을 이루었다. 처음으로 땅이 평평하여 시력이 닿는 곳까지 볼 수 있었다. 이 광활한 땅에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황량한 밀림은 더욱 적막했고, 아잔타 석굴은 찾는 사람이 드물었다.


근처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어서 힌디어로 ‘없다’의 뜻을 가진 아(A)와 ‘사람’이라는 뜻의 잔타(janta)가 합쳐져 ‘사람이 없는 곳’이라는 아잔타라는 이름을 갖게 된 연유를 알겠다. 


돌 한 조각 한 조각 새긴 석공들과 불심으로 기도와 수련을 하던 사람들로 복잡하고 번영했던 아잔타 석굴도 결국은 ‘아무도 없다’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불교에서 가르치는 공수래공수거를 종교 스스로 실천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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