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요한성당, 성 베드로 성당 피에타
경기도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11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동아시아 지역의 무기 발달과 축성술을 알 수 있는 군사유산이며, 조선의 자주·독립의 수호를 위해 유사시 임시수도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 도시라는 점을 들어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남한산성은 한양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자리 잡고 있었다. 전시에는 한양을 지키는 요새였고, 평시에는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동시에 광주 고을에서 강도나 죄인들을 잡아 처단하는 치안을 담당하였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에 남한산성에는 수어청과 광주 유수가 아예 성안에 자리잡기도 했다.
한편, 조선말 이양선이 빈번하게 출몰하고 청과 일본이 서양 열강에 무릎을 꿇게 되자 조선은 나라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당시 천주교인들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파헤치기도 하고,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며 제사를 거부하는 등 조선의 문화와 동화하지 않았다. 특히 황사영은 청나라에 있는 프랑스 신부에게 군사 5만 명을 보내주면 천주교 신자와 합세하여 조선을 천주교 국가에 귀속하겠다고 편지를 써서 역모를 꾸미기도 했다.
조선은 이런 천주교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고, 나라 안 천주교를 금지하여 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이에 남한산성으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어 끌려오게 되었고, 외세와 내통한다는 죄로 이들은 끔찍한 고문과 함께 참수, 교수, 장살 등의 참혹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최초의 천주교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남한산성에서 순교를 했다고 한다.
군사적 목적으로 축성된 산성도시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이면서 동시에 천주교 성지가 된 이유다.
천주교 신자들이 남한산성으로 붙잡혀 들어오면 대부분 가혹한 심문을 받고 처형되어 동문 밖으로 버려졌다. 시체는 동문 근처 시구문으로 사용된 작은 암문인 동암문 밖으로 버려졌다. 원래 암문은 적들 몰래 병력이나 물자를 옮기는 작은 문으로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후미진 성곽에 은밀하게 설치되어 있다.
동암문은 동문에서 서측으로 계곡 따라 숲 속 깊숙한 곳에 뚫은 문으로 물길이기도 한 수구문(水口門)이었지만, 천주교 박해 시절에는 산성 내 처형당한 시신을 내보내는 시구문(屍口門)이 되었다. 시신은 따로 매장하거나 화장하지 않고 계곡에 그냥 버렸다. 순교자가 많을 때에는 계곡 위 나뭇가지나 돌담 밑으로 시신이 참혹하게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이 동암문 앞에서 목숨을 잃은 300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지역을 관할하는 천주교 수원교구에서 설치한 것으로 동암문 인근에는 순교자 현양비와 성당도 건축하였다.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을 때 순교자의 정신을 뒤돌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이렇게 남한산성은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버렸던 순교자들의 신앙의 고백터요 순교지가 된 것이다.
남한산성 포도청 터 앞에는 남한산성 순교성지가 자리 잡고 있다. 초입에 높이 4m에 이르는 현양탑이 우뚝 솟아있다. 순교자들을 세상에 높이 드러내기 위하여 설치한 현양탑은 당시 감옥에 갇혔던 순교자들이 목에 썼던 칼 형상으로 만들었다.
현양탑 기초 검은 비석에는 순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혹독한 고문을 받고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끝끝내 목숨을 바친 분들이다.
남한산성 연무장 앞에는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한옥처럼 2층 목조 양식으로 천주교가 조선말 전해졌을 당시를 연상케 한다. 성당 뒤편으로는 산성 기슭 우거진 숲 속을 산책할 수 있는 숲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중간중간 예수님의 일대기를 형상화한 목조 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신자들은 이 숲길을 돌면서 앞서간 순례자들을 기리며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곤 한다.
숲길을 거의 돌고 날 때쯤 무릎 꿇은 사람의 동상이 있고 그 앞으로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안내판은 백지사(白紙死) 동상이라고 알려준다.
당시 이곳에는 산성 내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었다. 동문 앞은 영남지방으로 내려가는 옛길이 지나가는 곳이고 물레방앗간이 많아 사람들로 항상 분주하였다. 이곳에서 관리들은 사람들에게 천주교를 믿으면 어떻게 끔찍하게 죽임을 당하는지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한 명씩 잔인하게 처형했다. 죽이는 방법은 몸서리칠 정도로 끔찍했다. 선량한 백성들은 감히 천주(天主)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칼로 목을 베는 참수, 목을 메어 죽이는 교수, 매로 때려죽이는 장살이 이곳에서 시행됐다.
거리에 참혹한 죽임이 늘 이루어졌다. 산성 안 저잣거리는 피가 낭자하고 피비린내가 성 안을 가득 메웠다. 형을 집행하는 군졸들은 이웃이기도 한 백성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군졸들이 사람 죽이는 것에 진저리 치자, 관리들은 피를 보지 않으면서도 고통스러운 사형법을 고안했다. 바로 백지사(白紙死)였다.
백지사는 죄인의 손을 뒤로 포박하고 얼굴 위로 한지를 덮어 물을 뿌려 질식사시키는 방법이다. 사지를 묶고 저항하지 못한 사람 얼굴 위로 물에 젖은 한지를 덮는 일을 반복하여 하나님을 부정하게 하였다. 하지만 신자들은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았고 끝내 숨이 막혀 고통스럽게 죽었다. 피가 보이지 않았다고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리지 않았을까! 물에 빠져 죽는 고통은 칼로 내리치는 고통 못지않았다. 신자들은 끔찍한 형벌 앞에서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고 끝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숱한 죽음 앞에서도 신아의 믿음을 잃지 않고 증거 했던 남한산성 성지에 대하여 성당의 한 신부님은
남한산성 성지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한 성지이자,
죽음을 묵상할 수 있는 성지
이며, 영혼의 안식을 찾고 먼저 떠나보낸 이들을 위해 편안히 기도할 수 있다고 소개하기도 한다.
성당을 나와 다시 현양비 앞으로 가면 왼쪽에 있는 '남한산성 피에타'를 볼 수 있다. 남한산성 피에타는 한덕운 토마스가 처형당한 신자를 안고 슬픔에 잠긴 모습을 조각한 동상이다.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韓德運) 토마스는 윤지충 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고향 경기도 광주로 이사한 후에도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하여 한양으로 올라왔다. 길거리에 처형당하고 버려진 교우들의 시신을 일일이 챙기며 장례를 치러주었다. 당시 천주교 신자의 시신을 거둔다는 것은 스스로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는 아주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한덕운은 신도들의 시신을 고이 수습하고 결국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도 역시 숱한 고문을 당했고 결국 한덕운 토마스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의 피에타는 한덕운 토마스가 거리에서 비참하게 죽은 신자의 시신을 부여잡고 슬퍼하는 모습이 강렬하다. 길에 버려진 시신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 자식도 두려움에 차마 거두지 못하였지만, 토마스는 거리낌 없이 시신을 부여잡고 슬퍼하였다. 죽은 교우의 늘어진 손을 붙잡고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깃든 슬픔은 한없이 깊고 깊다.
남한산성 성지가 ‘영혼의 안식처 성지’로 널리 알려진 것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 죽어간 이들을 기억하고 그의 모습 앞에 앉아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볼 수 있는 성지이기 때문이다.
'피에타(Pietà)'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을 의미하며,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다.
대부분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안고 비통에 잠긴 모습의 예술 작품을 통틀어 말하기도 한다.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이자 자신의 아들인 예수의 죽음을 보게 된 마리아의 비통함이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고, 이런 깊은 슬픔을 주제로 유럽에서는 많은 예술작품을 창작했다. 그리고 그 절정은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작품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님의 시신을 성모 마리아 가 무릎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소장된 '피에타'이다.
몇 년 전 바티칸을 들렸던 적이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소장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기 위해서였다.
대성당이 들어선 바티칸 광장은 알렉산드로 7세 재위 시 완성한 것으로 30만 명이 모일 수 있는 크기다. 거대한 성당 앞에서 여러 종교의식이 엄숙하게 거행되곤 했는데, 광장 주변으로 15m 높이의 석조 기둥이 서있는 모습이 마치 신이 팔을 벌려 모든 신도를 감싸 안는 모양이다. 기둥은 총 284개가 들어서 있어 매우 웅장한 모습이었으며, 위에는 사람보다 더 큰 성인상이 서 있었다.
광장 가운데에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그 위에는 십자가 상이 있는 것이 흥미롭다. 높이가 25m에 이르는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으로 원래 태양신 레(Re)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
바티칸에 베드로 성당이 건축된 이유는 이곳이 베드로가 묻힌 장소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12 제자 중 한 명인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후 예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도하였다.
베드로 말년에는 주로 로마에서 활동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결국 네로 황제에 붙잡힌 후 고문을 당하여 순교하고 말았다.
베드로는 한때 로마에서 벗어나려 했다. 로마에서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자 베드로는 신자들의 권유로 탄압을 피해 로마에서 빠져나오려 했었다. 로마를 벗어나던 중 베드로는 자기와 정반대 방향, 즉 로마로 가는 예수의 환영을 보게 되고 깜짝 놀란 베드로는 예수에게 묻는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Quo Vadis, Domine)?
이에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러 로마로 간다.(Venio Romam iterum crucifigi.)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정했던 베드로는 너무 부끄러워 통곡하며 목숨에 연연했던 자신의 허물을 뉘우쳤다. 결국 스스로 다시 로마로 돌아가서 자수를 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순교하면서 죽음을 맞게 된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아 처형당할 때, 베드로는 예수님과 똑같이 죽을 자격이 없다며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십자가가 뒤집힌 채 순교했다고 한다.
그의 순교로 말미암아 전 세계로 기독교가 전파될 수 있었으니 베드로를 흔히 교회의 반석이라는 말은 여기서 온 것이다.
교회의 반석, 베드로 성당에 들어서면 그 유명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조각한 피에타를 볼 수 있다. 20대 젊은 나이의 미켈란젤로가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정도로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조각 예술품이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이름을 직접 새기기도 한 피에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후에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 시신을 무릎 위에 놓인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무릎 위에 죽은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얼굴에는 장엄한 고통과 동시에 위대한 순종을 나타냈다고 한다.
가을 늦은 단풍을 볼 겸 불곡산을 둘러본 후 태재고개를 내려오다가 분당 요한성당에 들렸다. 요한성당은 준공 당시 동양에서 가장 큰 성당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대형 파이프오르간이 유명하며, 특히 마리아의 피에타가 유명하다. 요한성당에 있는 피에타는 물론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 복제품이지만, 이곳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사용한 이태리 토스카나 대리석을 사용하여 원본과 아주 똑같이 복제했다. 바티칸 성당의 검수까지 받은 것으로 전 세계에 몇 개 없는 원본과 똑같은 모습의 피에타인 것이다.
죽음은 두렵다. 특히 고통스러운 죽음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 예수님의 절실한 제자 베드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로마 병사에게 연거푸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다. 늙어 죽기 전에는 로마 병사에게 붙잡혀 죽는 것이 두려워 로마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많은 신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주변에 널브러진 교우들의 시신을 보고서도 그들은 자신의 믿음을 지켰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했다.
남한산성의 피에타 족가 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책임을 지기고 있습니다.
순교자를 기억하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요?